439화. 채유림의 싸움 (2)
나는 채유림의 자리 옆에 나란히 앉은 둘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처음엔 모르는 척할까 고민도 해 보았다.
다른 평범한 납세자와 대리인처럼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긴 평범한 세무서 조사과가 아니고, 저들도 평범한 대리인이 아니지 않은가.
몇백억짜리 탈세가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내가 굳이 평범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그중 하나인 회계사라는 놈은 머리 위에 개인치고는 꽤 큰 금액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데다가 자기 거래처와 손잡고 장부에 손댄 게 분명해 보이는 놈이고.
세무사가 좀 불쌍하긴 하지만 저놈도 전문직이다.
장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고도 힘이 없어서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순수하게 장부 문제를 모르고 있었으면 바보 멍청이고 프로 미달이다.
그러니까 좀 불편한 자리가 되어도 할 말은 없지 않을까.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자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도 내가 봐주거나 동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전문직이라는 건 그런 무게가 있는 거니까.
우리 반장님인 채유림만 봐도 안다.
때문에 나는 왼손은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형광펜을 데구루루 돌리며 대각선 건너편에 위치한 두 전문가들을 지그시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떻게 나오나 궁금한 것도 있었고, 채유림이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
갑자기 찾아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 김기훈과 고송철.
그 둘은 같은 전문직이었지만 모든 것이 상반되어 보였다.
고송철은 이런 압박감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다리를 쩍 벌리고 편안히 앉아 있었다.
애초에 들어오면서 각오하고 왔겠지.
내가 쳐다보는 걸 알 텐데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는 고송철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반면에 김기훈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저놈은 각오도 안 하고 왔나?
이런 건 예상했을 텐데.
김기훈은 애써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내 쪽을 흘끔거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기겁하면서 얼른 고개를 내리깔았다.
저 둘은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쩌다 같이 왔는지도 모르겠네.
일단은 지켜볼까.
채유림은 둘을 앉혀놓은 채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말하자면 기 싸움이다.
내가 권새호만 데리고 처음 회계법인 고송에 찾아갔을 때 고송철이 썼던 방법처럼 말이다.
굉장히 노골적이면서도 효과가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무시라는 것은.
-사락.
-타다다닥.
-사각사각.
종이를 넘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이면지에 뭔가를 갈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소리만 듣는다면 공부할 때 듣기 딱 좋은 백색소음, 도서관 ASMR 같은 느낌이었다.
마침 창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도 했고.
내가 아까 그랬듯, 조용한 사무실이라는 것은 손님에게도 시간 감각을 잊게 하는 마경 같은 공간이었다.
고송철은 ‘이딴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하는 얼굴로 편안하게 사람들을 구경했지만, 김기훈 같은 경우에는 아니었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버티지 못했다.
“하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타이밍이 안 좋았죠?”
김기훈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엠티의 신입생 같았다.
그러나 채유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서류를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니 일부러 그런 것이 분명했다.
“어…….”
상대가 무시하는 것만큼 무안한 상황은 없다.
어떻게든 말문을 틔워보려고 애쓰는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기선제압의 종류 중에서는 가장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좋았다.
‘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너와는 말하고 싶지 않다.’
채유림의 온몸에서 냉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고송철은 여전히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식으로 사무실을 구경하고 있었고.
손님 둘의 반응은 예상 범주 내라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내가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채유림이었다.
둘은 단순히 학원만 함께 다닌 게 아니다.
채유림에게 들은 사전 정보에 의하면 세무사 학원은 1년짜리 커리큘럼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그야 1년에 한 번 있는 전문직 시험이니까 그렇겠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오기 전, 채유림은 잡담을 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학원 생활을 풀어놓았다.
9월 초에 기초수업반이 시작하는데, 그때 같은 강의를 듣는 학원생 수가 약 200명에서 250명이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회계원리나 세법개론, 재정학 같은 기초 이론 수업을 듣는데 그게 약 4달이라고 했다.
이듬해 1월부터는 4월에 있는 1차 객관식 시험을 위해 1차 대비반이 시작된다.
이때 남은 수험생이 100명 남짓.
그렇게 공부하다 4월의 1차 시험에 합격한 수험생들은 8월의 2차 시험을 준비한다.
세무사 시험은 1차 시험을 합격했을 경우 1년의 유예 기간을 주기 때문에, 올해 2차에 떨어져도 내년 2차 시험까지 볼 수 있었다.
채유림은 어느 수업은 유예 학생들과 함께 듣고 어느 수업은 1차부터 함께 해온 기존의 수험생들과 함께 들었는데, 7월이 되자 남은 사람의 머릿수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정확히 46명 남았더라고요. 전년도 9월 기본반부터 함께해 온 사람들이.
유예생과 함께 듣는 수업에서는 수강생이 족히 300명은 되어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년간 쌓이고 쌓여온 수강생들이다.
처음부터 커리큘럼을 밟아온 학생들은 다들 중간중간 벽에 부딪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물론 인강으로 전환한 학생이나 학원을 그만두고 자습을 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채유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학원 첫날을 봤을 때 인강 전환은 몇 명 안 될 거예요.
첫날 첫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강의실이 빽빽했다고 한다.
그리고 1시간 반짜리 첫 수업이 끝나자마자 10% 정도가 사라졌다.
쉬는 시간에 졸린 눈을 뜨기 위해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둘러 마시고, 강의실로 돌아오면서 학원 데스크에 환불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그렇게 하나둘 떨어져 나간 학생들은 1월 객관식 반에서는 10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마지막 2차 시험 직전에는 50명도 안 되게 남았다.
그쯤 되자, 서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알고 있어서 무의식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럼 딱히 친구는 아니지 않냐고 했더니 채유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친한 건 아닌데 1년이나 같이 있다 보면 동질감 같은 게 생겨요. 처음엔 200명으로 시작했다가 반의반밖에 안 남은 작은 강의실에서 같이 밥 먹는 멤버라는 건, 친구랑은 좀 다른 의미로 친밀감이 드는 법이거든요.
채유림은 김기훈이 친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이해했다.
어려울 때 함께한 사람은 잊기 어려운 법이지.
1년간 학원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면 감정이 생기기 쉽다.
남녀 간의 감정이라는 게 아니다.
공부하기 바쁜 사람들이 무슨.
내가 전문직 공부를 해본 건 아니지만,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 나왔다는 동료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함께 학원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에서 저랑 김기훈 세무사님, 딱 둘만이 생동차를 했거든요.
여기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란 서로 이름을 알고 함께 밥 먹은 멤버들이다.
참고로 생동차란 처음 공부 시작한 사람이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1년 만에 1차와 2차 전부 합격하는 걸 말했다.
학원 전체로 따지자면 생동차가 몇 명 더 있겠지만, 적어도 마지막까지 남은 46명 중에서는 자신이 알기로 둘뿐이라고 했다.
-저희는 붙고 다른 사람들은 떨어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어요. 김기훈 세무사님하고는 함께 연수도 받았으니까 더 친해지고.
나는 끄덕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담당을 바꿔 드릴까요, 라고.
채유림은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김기훈 세무사님을 마주한다 해도 제 결정이 흔들릴 것 같진 않아요. 물론 1년간 힘들게 공부한 동문이지만 그게 제 판단력이 흐려질 이유는 되지 않잖아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채유림의 두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에겐 탈세액이 보일 뿐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없지만, 그때는 알 수 있었다.
채유림이라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동료로서 내가 몇 달간 봐온 채유림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사실이었다.
분침이 1에서 10까지 움직일 동안, 놀랍게도 채유림은 그들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사이 참지 못한 김기훈이 몇 번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잡담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야근하시나요? 등등.
가장 마지막으로 시도한 ‘오늘은 몇 시까지 일할 예정이세요? 제가 시간을 많이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라는 말까지 씹히고 나자 김기훈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이고, 애 울겠다.
이거는 거의 왕따 수준인데.
서른 명도 넘게 있는 이 사무실에서 홀로 고독해 보이는 김기훈이 불쌍해 보이긴 했지만, 채유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긴 예고 없이 쳐들어온 것부터가 먼저 싸움을 건 것이나 다름없으니 일부러 초장부터 세게 잡고 시작하는 것이다.
채유림이 물렁하게 나갔으면 반대로 저쪽에서 눌러 버리려고 했을 테니까.
김기훈이 안 한다 해도 고송철이.
그러니 지금 나는 가만히 채유림을 지켜보기만 했다.
과연 누가 먼저 입을 열까.
이런 분위기에서는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김기훈은 기세가 완전히 꺾여서 입을 뗄 용기를 잃어버린 것 같고, 채유림은 솔직히 이들이 그냥 돌아가도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
먼저 연락한 건 저쪽이니까.
우위를 잡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입을 열게 되는 것.
지고 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자, 그럼 여기서 가장 아쉬운 건 누구지?
나는 고송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김기훈을 보고 있었다.
그럴 거면 당신이 직접 나서든가.
그런 뜻을 담아 고송철을 쏘아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가 오른손으로 돌리고 있던 형광펜 끝으로 채유림을 가리켜 보였다.
이어서 사무실 문을 가리켰다.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빨리 얘기나 꺼내시죠. 싫으면 나가든가.
아쉬운 건 고송철이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김기훈이야 그냥 화살받이인 것 같고, 실체는 아마 고송철일 것이다.
이면지에 부드러운 글씨체로 휘갈겨 내려가던 채유림의 펜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숫자를 이어 썼다.
고송철이 입을 열었다.
“조사관님, 먼저 협의를 하고 싶습니다.”
우뚝, 채유림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채유림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채유림은 그와 대화하는 대신 김기훈에게 질문했다.
“재무 책임자는 김기훈 세무사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김기훈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고송철이 가로챘다.
“세무조사 대리인 자격으로 왔으니 저에게 말씀하셔도 무방합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존중은 담겨 있지 않았다.
일단 김기훈을 협상 테이블에서 빼려는 의도가 보였다.
물론 채유림은 아직 테이블에 앉지도 않은 상태긴 하지만, 어쨌든 고송철 본인 입으로 김기훈을 책임자라 하지 않았는가.
김기훈의 현재 상태를 봤을 때 제대로 된 협상은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빼버릴 거라면 왜 데려왔는가.
물론 채유림과의 연결 고리를 위해서겠지.
채유림은 그걸 눈치챘을까.
나는 주의 깊게 채유림을 보았다.
그녀는 아까 김기훈을 무시했듯 이번에는 고송철을 무시하고 있었다.
“김기훈 세무사님 용건부터 듣도록 하죠.”
고송철 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까마득하게 어린 조사관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기훈은 용케 고개를 들어 마른입을 열었다.
그는 판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당했으면서도 프로의식만은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희도 나름의 계산을 해봤습니다. 최근 5년간의 서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요. 검토 결과 저희가 내야 할 탈세액은 270억이라고 판단됩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있네.
내 눈에 떡하니 379억이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그러나 채유림은 대한농어촌공사의 정확한 탈세 규모를 모른다.
아직 검토 중일 뿐이다.
그러니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채유림이 가만히 듣고 있자 김기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는 270억을 전부 내겠습니다. 그러니 조기 결정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하, 그렇게 나왔구나.
270억만 징수하고 끝내자, 김기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