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채유림의 싸움 (1)
대한농어촌공사 재무부에서 일하는 김기훈은 우울했다.
공사의 결정권을 가진 임원들이 너무나도 앞뒤가 꽉 막혔기 때문이다.
그는 눈앞에 서 있는 깔끔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건물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떨구었다.
김기훈은 지금 국세청 앞에 있었다.
“허허, 제가 회계사 일 하면서도 국세청에 와보는 건 처음이네요. 김기훈 씨는 와봤습니까?”
“세무서나 지방청은 몇 번 와봤는데 본청은 처음입니다.”
“그럼 잘됐네요. 온 김에 구경이나 합시다.”
김기훈은 앞서 걸어가는 회계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전부 다 저놈 때문이다.
회계법인 고송의 대표 회계사 고송철.
며칠 전 그가 대한농어촌공사 본사로 찾아왔다.
-소문 들었습니다. 국세청 쪽에 아는 분이 있으시다면서요? 그런 끈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죠.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아주 잘됐어요.
어디서 들었는지 조사단 1반 반장인 채유림과 김기훈이 아는 사이라는 것이 퍼져 나가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공사의 이사진들이겠지.
이번에 조사단의 대상이 된 3개의 공기업 이사들은 대책을 마련한답시고 함께 만나거나 이상한 사람들과 자리를 가지는 일이 허다했다.
김기훈은 그때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할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들은 전직 국세청 국장이나 기재부 차관보 같은 인물들을 만나 조언을 들었다.
그 조언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료나 근거를 가지고 소명하는 방법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그 후에 고송철이 찾아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한 번 뜨고 나면 줄을 대기 어려운 법입니다. 사방에서 승냥이 떼처럼 몰려들기 때문이죠. 겉으로는 친해지고 싶다면서 속으로 청탁을 바라고 접근해 오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겁니다. 조사단의 반장님도 이미 그런 속물들을 많이 겪어보셨을 테니 과거의 인연은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래서 사람이 뜨기 전에 미리미리 아는 척을 해 둬야 하는 겁니다.
제일 속물적인 건 당신이잖아, 라고 김기훈은 생각했다.
애초에 김기훈이 보기에는 공사의 임원들이나 고송철이나 그게 그거였다.
세무조사를 받게 됐으니 감사를 맡았던 고송철은 공사 로비에 발도 못 붙이고 쫓겨날 줄 알았는데 이사들이 그를 안으로 들인 것이 의외라면 의외였다.
‘상식적으로 장부 조작한 게 그대로 감사 의견 받았으면 백 퍼 회계사도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왜 저렇게 감싸고돌아?’
그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다 한통속이라서였다.
-자자, 그런 의미에서 김기훈 씨가 공사 소속인 건 정말 천운입니다. 전부터 알고 계셨으니 필요해서 접근한다는 의심도 벗을 수 있고, 무엇보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사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럼요! 이런 우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함께 동문수학했던 인연이 조사관과 기업체 직원으로 만나다니, 이건 필연입니다. 두 분이 잘되시면 저희도 참 좋겠는데 말이죠.
잘되긴 개뿔, 오히려 미움받게 생겼다.
자신이 조사관 입장이라 쳐도, 같은 학원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들이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쳐들어간다고?
채유림이 거절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함께 공부했던 친분 때문에 봐준 것이나 다름없다.
예고 없이 찾아가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닐 뿐더러 조사 중인 사안이다.
문전박대당하지 않는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앞서가는 고송철이 입이 마르도록 김기훈을 칭찬한 것은 사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일이었다.
잘나가는 회계법인 대표가 뭐 하러 이름 없는 세무사 개인에게 관심을 갖겠는가.
이유는 오직 하나.
채유림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조사단과 다리를 놓는 데 쓰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임원들과 아주 죽이 잘 맞으면서도 마지막에 꺼낸 말이 이거였다.
-그러니까 김기훈 씨가 이번에 활약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원래 가진 인맥은 어떻게든 활용해야 하는 법 아시죠? 세무사라면.
김기훈은 이를 뿌득 갈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정말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무사 자격증이 있다고는 하지만 공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다.
근로자라는 뜻이다.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 할지라도.
‘그래도 내 발로 죽으러 갈 수는 없는데.’
고민 끝에 김기훈은 고송철을 불러 세웠다.
상대는 공기업을 전문으로 다루는 유명 회계법인의 대표 회계사.
그 인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김기훈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국세청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더 싫었다.
때문에 김기훈은 용기를 내서 따졌다.
“회계사님. 지금 이게 정말 맞는 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은데요. 신재현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 세무사 업계에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김기훈 씨, 무서워요? 이미 방문한다는 약속까지 했으면서.”
“네. 솔직히 무섭습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기분이에요. 차라리 있는 자료 끌어모아서 소명을 준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신재현이라는 사람은 이런 뒷공작을 더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이러다가 괘씸죄로…….”
“으하핫! 김기훈 씨가 아직 어리긴 하네요. 경험이 부족한 건가? 젊으면 오히려 패기가 넘쳐야 하는데 몸을 사리네.”
고송철은 명백히 김기훈을 깔보고 있었다.
그것이 표정에서부터 느껴졌다.
아니, 애초에 고송철은 김기훈에게 직함이나 ‘세무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반 직원을 대하듯 ‘김기훈 씨’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는 김기훈을 자신과 같은 전문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토도도독.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빗소리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김기훈도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하지만 사실 빗소리는 핑계였다.
김기훈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회계사 업계는 세무조사를 직접 받아보지 않으니 그 두려움을 모르는 겁니다. 세무사 업계에는 이미 그 악명이 자자해요.”
“어떤 식으로요?”
“신재현을 만나면 쓸데없는 술수 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원칙대로 해라. 소명하는 게 가장 적게 세금을 내는 일이다. 괜히 인맥이나 연줄 들이밀었다간 그 인맥까지 함께 날아가는 수가 있다고요.”
“허참, 이래서 세무사들은 안 된다니까.”
이건 흘려 넘기기 어려운 말이었다.
김기훈이 발끈했다.
“대표님, 방금 뭐라고요?”
“기분 나빴으면 미안합니다. 근데 사실이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큰물에서 놀 줄을 몰라요. 작은 동네 업체들 상대로 장사하다 보니 속이 좁다고 해야 하나. 방금도 그래요. 이 업계는 연줄입니다. 세무사도 그렇지 않습니까? 왜 청 출신이 수수료를 더 받겠어요. 그게 다 국세청에 아는 후배들이 있어서 그들을 통해 이러저러하게 사건 덮을 수 있으니까 돈을 많이 주는 겁니다.”
“대표님. 그 말씀은 취소해 주시죠. 세무사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신 겁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방금 그 말씀만은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김기훈은 상대가 유명 회계사라는 것도, 협력해야 하는 사이라는 것도 잊은 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지금이야 세무조사를 받는 탈세 기업 재무부에 있다고는 해도 전문직으로서의 긍지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고송철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사실을 얘기한 것뿐인데 무슨 사과씩이나. 오히려 업계인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죠. 세무사회 사람들하고 만나도 이런 얘기 심심찮게 하는데. 김기훈 씨는 너무 자존심 센 거 아닙니까? 그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습니다.”
“고송철 회계사님!”
김기훈이 씩씩대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흙탕물이 바짓단에 튀자 고송철이 혀를 찼다.
“쯧. 잘 들으세요, 김기훈 씨. 오늘 당신 역할은 다리입니다. 본인이 얼마나 귀중한 연줄을 갖고 있는지 자각을 못하나 본데요. 그런 연줄 하나를 뚫기 위해 수많은 회계사나 세무사가 밥을 사고 술을 먹고 골프를 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접대라는 거고 영업이라는 거죠. 저는 세무사 중에서도 세무사업 떠나서 기업체나 공무원으로 간 사람들을 싫어하거든요. 김기훈 씨도 영업하기 싫어서 공기업 취직한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김기훈이 움찔했다.
사실이었다.
접대라는 것이 깔끔하게 사업적인 얘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2차, 3차까지 달리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이는 거래처도 있었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개인 사무실을 가지려면 영업이 필수였고, 김기훈은 그것이 신물이 나 공기업에 지원한 것이다.
김기훈이 반박하지 못하자 고송철은 경멸의 눈빛을 띠었다.
“그렇게 업계에서 도망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인맥이고 연줄이고 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고 수단인 겁니다. 국세청 가기 싫어서 뒤로 빼다니 그러고도 전문직입니까? 자기가 일하는 회사를 위해서 국세청에 맨발로 들어갈 각오 정도는 해야지. 나는 말입니다, 얼마나 추하든 사건 해결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설 생각이에요. 당신의 그 가느다란 연줄을 붙잡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순간 김기훈은 깜짝 놀랐다.
다른 건 몰라도 방금 한 말은 프로의식이 느껴졌다.
고송철도 그 나름대로 전문직이라는 뜻이리라.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는지 김기훈이 조용해지자 고송철은 코웃음을 쳤다.
‘젊은 놈이라 이런 거에 넘어오는구만. 구워삶기 딱 좋아. 좀 순수해 보이는데 국세청 들어가면 앞세워 볼까? 내가 들이미는 것보다 저놈이 앞장서는 게 더 상대가 누그러질 것 같은데.’
김기훈은 자신이 고송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나 깊이 고심했지만, 불행하게도 고송철은 딴마음을 먹고 있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번 일은 잘 해결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끝장난다고.’
고송철이 휘하의 다른 회계사를 시키지도 않고 직접 국세청까지 나선 것은 본인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회계사님, 일단은 믿도록 하죠. 저도 일단은 세무사니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네. 기대하죠.”
말과는 다르게 축 처진 채로 국세청 로비로 향하는 김기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어리숙하고 젊은 세무사 하나를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한 고송철이 히죽 웃으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뭐야. 왜 안 들어오고 비 맞으면서 한참 서 있대요?”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고 있던 신재현이었다.
김기훈이 알았다면 기겁했을 만한 일이다.
머리 위에 칼날이 있다는 게 이런 뜻인가! 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네요. 제가 전화해 볼까요?”
함께 창밖을 내려다보던 채유림이 책상 위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자 신재현이 막았다.
“아뇨. 왜 안 오나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죠. 저쪽은 어디까지나 소명하러 오는 겁니다. 갑자기 왔다고 해서 우위를 잡게 둘 수는 없죠. 저기 보이는 저 사람은 회계법인 대표 고송철 회계사라는 사람인데, 사람 다루는 방법을 아는 작자예요. 틈을 보이면 바로 기선 제압하려 들 겁니다.”
신재현의 경고는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채유림이 긴장된 표정을 했다.
“비 오는 날에 국세청까지 왔길래 읍소하러 온 줄 알았더니 반대였나 보네요. 저도 각오를 좀 해야겠군요.”
신재현은 흘끗 채유림을 보더니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여기는 국세청이고 다른 팀원들도 함께 있잖아요. 반장님의 홈그라운드입니다. 어깨에 힘 빼시고 자신 있게 웃어 보세요. 네, 그렇게.”
옛날엔 이선균이나 민치호가 신재현의 긴장을 풀어주곤 했는데 지금은 신재현이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채유림도 눈에 띄게 표정이 안정되어 갔다.
“네. 지금 딱 좋네요. 어디까지나 조사관은 채유림 반장님입니다. 상대는 소명을 하러 온 탈세 기업의 대리인이구요. 반장님이 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가 뒤에서 보고 있을 거구요.”
그 어떤 응원보다 마지막 말이 채유림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다.
뒤에 있을 거라는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채유림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걱정 안 합니다. 반장님은 잘하시는 분이라서.”
신재현이 빙그레 웃자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온 채유림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느 때처럼 일하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기 위해서였다.
-똑똑.
드디어 왔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권새호가 문을 열어주었고, 먼저 젊은 남자의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농어촌공사에서 온 김기훈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부단장님. 오늘은 세무조사의 소명에 입회하기 위해 재무 책임자분과 함께 찾아뵈었습니다.”
소개를 듣는 순간 신재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송철의 꿍꿍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재무 책임자라니, 말 한번 거창하게 하네. 아하, 채유림 반장님의 동기라는 저 세무사를 제물로 삼겠다 이거구나. 반장님은 눈치챘으려나.’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라지만 동기가 저런 놈 대신에 모든 잘못을 덮어쓰게 된다면 채유림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상황을 봐서 개입해야겠다.’
하지만 일단은 채유림에게 맡겨둘 생각이었다.
걱정 안 한다고 해놓고 바로 개입해 버리면 채유림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여기서는 믿고 맡겨야 한다.
민치호와 이선균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이쪽으로 앉으세요.”
채유림은 자신의 자리 옆에 놓인 2개의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긴장된 표정의 김기훈과 조금 거만해 보이는 고송철이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일단 오신 용건부터 듣도록 하죠.”
막 안부 인사를 건네려고 입을 떼던 김기훈을 차갑게 막아낸 것은 채유림이었다.
순탄치 않겠구나, 각오를 한 김기훈의 얼굴 뒤로 고송철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 발 물러나서 반장님을 관찰하고 있네.’
물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고송철은 신재현에게 간파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