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물어보면 해결된다 (1)
-토독토독.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이 흐리더니 점심이 지나자 급기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벌써 장마철인가.
그렇게 많은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에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다 보니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거기에 밖은 하루 종일 어두컴컴해서 시간 감각을 잊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반대로 사무실 안은 환해서,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뚝 떨어져 우리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의 소음을 비가 다 흡수하기 때문이다.
-번쩍!
간혹 내리치는 번개만 아니었다면 사무실째로 우리만 어딘가 다른 곳에 날아온 것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왜 싱숭생숭해지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4시밖에 안 됐는데도 어두운 하늘에 가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방을 밝히는 번개.
그리고 사무실 곳곳을 가득 채운 박스와 일거리들.
아무리 봐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혼이 나갈 것 같다.
“팀장님…….”
“네.”
“확인 부탁드립니다.”
“넵.”
잠시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자 귀신같이 채유림이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이제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현실적인 창밖의 광경이 아니라 우리가 해치워야 하는 서류들이었다.
“팀장님, 많이 힘드세요?”
“아닙니다. 다들 똑같이 일하시는데 혼자 어떻게 힘들다고 하겠어요.”
눈이 빠져라 자료를 보고, 넘기고 또 훑어보는 지루한 작업은 결국 팀원들의 몫이다.
나는 그들이 정리해서 올린 걸 보고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럴 리가요. 여기서 가장 많이 일하시는 건 팀장님이신데. 대한공항공사 맡아서 확인하시고, 거기에 다른 팀 일까지 결재 중이시잖아요. 결재라는 게 결국 처음부터 마지막장까지 다 훑어보고 검산하면서 세법 맞나 확인 작업까지 다 해야 된다는 소린데.”
채유림의 말에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감이 굉장히 크다.
직원들은 실수해도 된다.
그러나 그걸 최종적으로 잡아내는 나는 실수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결재 인을 찍는 순간, 그건 조사단의 이름을 걸고 윗선으로 올라가는 보고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윗선의 결재 라인이 없는 조사단의 특성상 그건 곧 외부로 공개되는 기초 자료가 된다.
외부라 함은 납세자에게 안내하는 과세자료안내문이 될 수도 있고 검찰에 제출하는 조사 결과문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내 앞에 쌓인 과세 근거들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틀리면 조사단이 틀린 것이 된다.
탈세액이 보이는 내 눈 덕분에 큰 실수는 면할 수 있다지만 부담감은 꽤 크게 작용하고 있었나 보다.
비 좀 온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나도 계절을 타나?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팀장님이 보셔야 할 서류를 제가 함부로 손댈 수는 없고…… 이거라도 드시면서 잠시 쉬세요.”
채유림은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더니 무언가를 부스럭부스럭 꺼냈다.
그녀가 내민 것은 초콜릿 코팅이 된 빵과 과자였다.
“……반장님은 서랍에 과자를 넣어두고 다니세요?”
“네. 우리는 머리를 쓰는 일이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계산기만 두드려도 머리가 멍해진다니까요. 방금 팀장님도 그런 거 아니었을까요?”
내가 정신이 팔려 있던 게 보였나 보다.
나는 얌전히 채유림이 내미는 간식거리를 받아 들었다.
파이는 그리 크지도 않았다.
딱 두 입만 에 털어 넣고 보니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함에 일단 혀가 녹을 것 같다.
입이 텁텁해지는 불쾌함에 물을 들이키자 뇌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와, 잠이 확 깨는 것 같다.
“어, 맛있네요.”
“그렇죠? 당 떨어질 땐 이런 걸 먹어줘야 해요.”
말을 꺼낸 채유림도 보란 듯이 초콜릿을 하나 꺼내 먹더니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계속 같은 자세로 모니터와 종이만 보고 있었던 탓인지 목을 돌릴 때마다 뚜둑 소리가 났다.
나도 허리를 펴고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눈앞에 꼈던 뿌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다.
마치 홀렸던 것 같다.
[email protected]#871^86$90
어라, 안개가 또 끼기 시작하네.
눈을 비비며 초코 과자를 하나 더 까던 나는 깨달았다.
마치 뿌연 안개가 끼는 느낌이 들었던 게 아니고, 실제로 내 앞에는 안개가 껴 있었다.
정확히는 숫자로 이루어진 안개다.
사방에 널린 자료는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봤을 때처럼 명확한 탈세액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email protected]*
대신에 지직거리며 먼지처럼 자그마한 숫자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자릿수까지는 보이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안 보이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는데 시야 한구석에는 계속 남아 있었다.
예전에 대규모 조사할 때는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내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에서도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지 않은 숫자들이 조각조각 나서 떠오르고 있었다.
“미치겠네.”
나도 모르게 본심을 말했나 보다.
채유림이 또다시 서랍을 열더니 판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하나 더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미 뇌가 일어났어요.”
“그럼 방금 그거는 정신 차린 뇌가 상황 파악하고 내뱉는 감탄사로군요.”
“……비슷합니다.”
대화 내용이 제정신이 아닌 걸 보면 채유림도 반쯤 넋이 나간 게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2주째 야근 중이었다.
공기업 회계라는 게 이렇게 복잡하고 신경 쓸 것이 많을 줄은 몰랐다.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없어지고 계속된 야근으로 몸도 지치고.
그렇게 2주가 지나면 이제 헛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크아악!”
“아, 이거 찾으세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자 옆자리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실무서 한 권을 내밀기도 하고.
“조사관님, 아까 결재 올리신 거…….”
“왜요! 뭐가! 왜! 어디가 틀렸대요!”
“아뇨, 결재 통과됐다고요…….”
“아, 갖다 주신 거구나. 감사합니다.”
아니면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서 서로 눈총을 준다기보다는 ‘음, 많이 힘든가 보다’ 하고 넘어가주는 경향이 강했다.
“바람 쐬실 겸 나갔다 오실래요?”
“비 맞으면 추워요.”
“6월 말치고는 춥긴 하네요. 오늘은 또 난방을 안 틀어줘서.”
“중앙난방은 이래서 싫어요. 내가 더운지 추운지 결정하는 건 난데 왜 온도를 마음대로 맞추는 거야.”
“맞아요. 겨울엔 햇빛 들어와서 엄청 더운데 난방은 또 뜨겁고, 여름엔 공공기관 적정 온도 맞춰야 된다고 에어컨도 미지근한 바람 나오는데. 거기에 햇빛 들면 진짜 쪄죽는다니까요. 국세청은 아주 1년 내내 더워.”
“오늘만 빼고요. 오늘 선선하니까 너무 좋네요.”
이런 잡담마저 없으면 조용한 사무실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채유림과 나 말고도 곳곳에서 직원들이 잡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책상 위 서류에 집중은 하고 있었지만 귀는 닫을 수 없다 보니, 다른 직원들의 잡담이 들려왔다.
“저는 세법 중에서 부가세가 제일 좋아요.”
“왜요? 법인세가 제일 편하지 않아요?”
“부가세법은 퍼즐 맞추듯이 딱딱 맞아 들어가잖아요. 예외 조항도 거의 명시되어 있고.”
“법인세법도 퍼즐 맞추기 아니에요?”
“아니요. 법인세법은 포괄주의잖아요. 거긴 예외 한번 따지기 시작하면 판례 다 뒤져야 하는데.”
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네.
나도 세법 중에서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부가세법이다.
법이라는 게 다 그렇듯 현실에 적용할 때는 애매한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부가세법은 그 간극이 제일 작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경우의 수에 딱 맞게 시행령이나 판례가 다 나와 있다는 건 아니고, 다른 세법에 비해서 덜 애매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이거다.
부가세법은 ACEHSY를 과세하되 E-는 제외하고 B+는 과세하세요, 라고 말하는 식이고.
법인세법은 A부터 Z까지 전부 과세하는데 B-1하고 E-3을 제외하세요, 라는 식이다.
둘은 이제 그 차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법인세가 더 낫다는 직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법인세는 전체를 과세하되 예외에 해당하는 것만 비과세로 빼준다, 이거잖아요. 이게 훨씬 쉽지!”
부가세 옹호파도 지지 않았다.
“부가세법은 뭘 제외할지 경우의 수를 다 따져주잖아요. 실무에서 애매하다 싶을 때 시행령이랑 판례 찾아보면 이미 비슷한 경우가 다 있어요. 소득세법도 마찬가지고.”
“그건 경험상 판례가 쌓이고 쌓인 거죠. 그렇게 따지면 법인세법도 웬만한 경우의 수는 판례로 다 있어요. 차라리 예외만 외우면 되는 법인세법이 편하죠. 부가세법이랑 소득세법은 뭘 과세하는지, 뭘 빼는지 그것도 다 외워야 하잖아요.”
“그래도 책 보면 어떤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경우가 다 나오니까 마음이 편해요. 법령 해석하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 잘못 해석할까 봐 걱정될 때가 있죠.”
“법령해석과 안 가서 다행이에요. 저 거기 발령 나면 매일매일 스트레스 받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조사하는 게 낫지.”
“저는 재밌던데. 논리 퍼즐 푸는 기분이잖아요. 근데 말 어렵게 써놓은 건 진짜 한 대 패고 싶네요. 옛날식 단어 좀 바꾸면 안 되나.”
“법 제정할 때 외국에서 가져와서 그런 거죠. 이젠 고칠 때도 됐는데.”
“처음엔 욕하지만 익숙해지면 고치기 싫어지는 거 아닐까요?”
“아뇨. 저는 지금도 중단이랑 중지 헷갈려요.”
“사실 저도 취소랑 해제 가끔 구분 못 해요.”
둘의 대화에 옆자리 직원이 끼어들었다.
“어, 조사관님도? 전 아직도 합의랑 협의 헷갈리는데요.”
“그건 민법이잖아요. 우리가 자주 안 쓰는 용어니까 헷갈릴 만하지.”
“제가 보는 계약서에 이미 합의가 10번도 넘게 나왔는데요.”
“아, 계약서 검토하고 계시는구나…….”
직원들 사이에 애도의 침묵이 흘렀다.
법이라는 게 이래서 복잡하다.
비슷한 단어인데 뜻이 달라서 단어 용법 하나 차이로 해석이 갈리곤 하니 말이다.
세법 하나만 놓고 봐도 이러는데 다른 법은 대체 어떻게 공부하는 거지?
“어, 미치겠다.”
그러던 중 나와 가까운 쪽에 앉은 직원 하나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자료 보다 막히면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는데, 지금 저 탄식이 딱 그런 감정을 담고 있었다.
주위의 직원들도 무슨 일인가 고개를 빼고 탄식한 당사자의 책상을 넘겨다보았다.
왼쪽에는 신고서철이, 오른쪽에는 영수증철과 세금계산서 내역 같은 기초 자료가 있는 걸로 봐서는 대조 작업 중에 뭔가 막힌 것 같았다.
“어디서 막혔어요?”
즉각 양옆에서 도와주려고 양팔을 걷고 나섰다.
“이거 작정하고 보려면 오래 걸려요. 도와주시면 시간 너무 많이 뺏게 될 것 같아요. 제가 좀 더 고민해 볼게요.”
“아니에요. 숫자라서 한 번 막히면 계속 막힌단 말이에요. 눈에 안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디가 틀렸는지 안 보여요. 이럴 땐 남이 잠깐 봐주면 금방 찾아요.”
“숫자가 틀렸다기보단…… 으음, 일단 그럼 한 번 봐주실래요?”
직원의 책상에 세네 명의 공무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신고서를 들춰보더니 으음, 하고 신음했다.
“이거는 판례를 봐야겠는데요.”
“그렇죠? 근데 공기업은 거의 유일무이하잖아요. 비슷한 판례가 있을까요?”
이쯤 되자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끼어들까?
아니지, 팀장이 직원들 하나하나에 간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지금 끼어들면 계속 듣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러면 직원들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서울청의 소규모 팀이었다면 언제든 끼어들었겠지만 지금은 또 사정이 다르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잘 대해준다고 해도 자신이 일하는 걸 상사가 지켜보고 듣고 있다가 끼어든다고 생각하면 무섭지.
아, 근데 진짜 궁금하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애써 못 들은 척 내 앞에 놓인 서류를 읽었다.
그래, 내 것만 해도 쌓인 게 얼마나 많은데 직원들 서류에 참견하고 있냐.
억지로 눈을 서류로 내렸지만 온 신경은 모여 있는 직원들 쪽으로 가 있었다.
저들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자 이번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팀원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뭐에 막혔어요?”
건너편 책상에 앉아 있던 장세훈과 강혜원도 일렬로 놓인 책상을 빙 돌아오더니 검토 중이던 신고서를 들여다보았다.
“아, 이거였구나.”
이거? 이게 대체 뭔데!
“혹시 아세요?”
“아뇨.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장세훈이 시원하게 대답하자 기대했던 직원들이 아,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장세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는 모르는데 누구한테 물어보면 될지는 알겠네요.”
“이거 아시는 분 있어요? 누구요?”
“저기요.”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내 정수리에 무언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못 참고 고개를 들어 보니 모여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뭐가요?”
장세훈은 가만히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팀장님이 승진 시험 준비한다고 연수원에서 온갖 판례 다 훑었거든요. 한번 물어보세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팀장님도 모르는 판례면 그건 진짜 희귀한 케이스일걸요?”
“어, 그래요?”
기대를 잔뜩 품은 눈빛으로 고민하던 당사자가 신고서를 들고 왔다.
“팀장님. 혹시 아실까요?”
궁금하던 차에 잘됐다.
아예 이렇게 가져오면 나도 거부할 명분이 없지.
나는 신나서 신고서를 들여다보았다.
-팔락팔락.
직원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신고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직원이 가져온 것은 대한철도공사의 부가세 신고서였다.
그리고 공통매입세액 안분계산서를 보자마자 왜 그가 고민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손끝으로 종이를 문질렀다.
오래되어 먼지를 머금은 종이의 까끌한 감촉이 내 기억을 끄집어냈다.
연수원 도서관에서 판례집을 봤었는데.
아까 초코 과자를 먹길 잘한 것 같다.
당을 충전한 뇌는 평소처럼 휙휙 돌아가더니 내가 원하는 판례를 떠올려냈다.
나는 고개를 들고는 씨익 웃었다.
“네. 대한철도공사 말고 지방의 지하철을 맡은 모 철도공사의 판례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이걸 보셨다고요? 특수 기업에만 적용되는 이런 판례를요?”
“네. 설명해 드릴게요.”
얼떨떨해하는 직원이 주위를 둘러보자 장세훈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나는 책상 밑에 쌓여 있는 이면지 하나를 꺼내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판례 내용부터 설명드릴게요.”
“넵.”
나는 내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을 잠시 옆으로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직원들이 내 책상 앞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