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이게 조사단이다 (2)
권새호에게 있어 이후 일은 눈이 핑글핑글 돌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계사들은 언제 신재현과 기 싸움을 했냐는 듯 극진하고 공손했다.
아예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신재현도 2주 전의 만남은 깡그리 잊은 듯이 사무적으로 대했다.
지난번 만남 때 솔직히 좋게 헤어진 게 아니라서 서로 얼굴을 보기엔 껄끄러운 사이일 텐데.
저렇게 철저히 표정을 숨기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걸 보니 감탄이 나오기 전에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송철을 비롯한 회계사들이야 경력 있고 노련한 사람들이니 아무렇지 않은 척 신재현을 대할 수 있다고 쳐도, 신재현 역시 지극히 공적인 자세로 대하는 게 희한했다.
그 모습이 조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평소 사무실에서 보는 신재현은 직원들의 놀림의 대상이었으며 장난을 잘 치고 잡담을 좋아하는, 굳이 말하자면 예쁨받는 막내의 이미지였다.
다른 팀원들이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함께 온 팀원들은 뒤에 서서 그를 철저히 상사로 대하고 있었으며, 신재현 역시 그들을 이끌고 지시를 내리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어 보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신재현은 그야말로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사무실에서의 편안한 모습보다 지금 이것이 공무원으로서의 진짜 신재현일지도 모르겠다.
권새호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말씀하신 조사 대상 자료는 저희가 모아놨습니다.”
“이쪽 사무실인가요? 국세청에서 일단 어떤 자료가 대상 기업 자료인지 확인하겠습니다.”
이 사무실이냐고 물은 것은 안내한 고송철에게 한 말이고, 뒤에 이어서 한 것은 조사단의 직원들에게 한 말이었다.
회계법인에서는 아예 사무실 하나에 관련 자료를 다 모아둔 상태였다.
다른 기관의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세청 팀원들이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자료를 헤집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동부나 관세청, 기재부 등의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자료를 분류했다.
신재현은 본인이 직접 들여다보는 대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팀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반장님. 여기 부탁드립니다. 두 분만 저랑 가실까요?”
채유림이 잽싸게 눈치 좋고 손이 빠른 팀원 둘을 골라 붙여주었다.
신재현은 다른 사무실들을 가리켰다.
“좀 보겠습니다.”
“예? 말씀하신 자료는 다 한 군데에 모아뒀습니다만.”
세무조사 때는 납세자가 제출하는 자료가 옳다고 믿는 것이 기본이지만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러 불리한 자료는 숨기거나 누락하고 국세청에는 엄선한 자료만 제출하는 것이다.
거기에 회계와 세법을 다 아는 회계법인이라면 어떻겠는가.
순순히 주는 대로만 가져갈 순 없었다.
“대상 기업 이외의 자료는 어차피 봐도 안 가져갑니다. 아시잖습니까.”
“다른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있을 수 있어요.”
고송철은 어떻게든 막아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저도 매번 이렇게 현장 조사 나올 때마다 납세자분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세무조사 대리 해보셨죠? 다들 그렇게 하잖습니까. 대표님께만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어서요. 저희 조사단이 이런 자료 수집에는 아주 능숙하니 최대한 빨리 정리할 겁니다. 걱정 마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예 변명의 여지를 차단해 버린 신재현이 지현석 검사와 경찰들을 불렀다.
회계사들도 따로 해명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경이 나란히 걸어오자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국세청이 훑는 동안 여러분들은 저희 조사에 응해주시죠. 자녀분 취업 얘깁니다.”
“예에? 우리 애요?”
지목당한 회계사들이 끙끙대며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정작 대표인 고송철도 방법이 없었다.
고송철은 눈빛을 외면하며 신재현을 따라나섰다.
뒤에서 검경이 각자 한 명씩 맡아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개중에는 이 자리에 없는 회계사를 찾아 다른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경찰도 있었다.
명분은 취업 청탁 문제지만 그걸 빌미로 공기업 탈세 및 장부 조작을 알고 협조했는지 캐낼 것이다.
상대가 노련한 회계사라 해도 검찰과 경찰 수사관 앞에서는 잔머리 굴릴 여유도 없다.
저쪽은 이제 알아서 정보를 캐줄 것이다.
남은 것은 신재현 쪽이다.
그는 복도를 활보하며 눈에 보이는 족족 사무실을 열고 들어갔다.
실제로 일하던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겁에 질린 얼굴을 하기도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한 바퀴 둘러보며 구석구석 캐비닛 안에 있는 자료를 꺼내 훑어보다가 원하는 게 아닌지 도로 꽂아 넣었다.
거의 패턴 수준으로 정형화된 동작이었다.
“대체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원하는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십시오. 제가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고송철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져 갔다.
조사 통지서가 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신재현이 진짜로 사무실 곳곳을 헤집고 다니니 고송철에게도 인내심의 한계가 온 것이다.
어느 공무원이든 조사를 한다고 나오면 그 순간 갑이 된다.
그러나 을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바로 민원과 소송이다.
‘조사단이라 최대한 친절하게 해줬더니 끝도 모르고 기어오르네. 진짜 마음 같아서는 확…….’
고송철이 이를 부득 갈며 신재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뒤가 따가울 만도 하건만 신재현은 별 느낌도 없는지 한 군데도 빠짐없이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고송철의 불편한 심경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나 다름없다.
애초에 고송철이 기분 나쁜 이유는 자신을 믿지 않고 갖다 준 자료가 아닌 다른 걸 찾으러 다닌 것 때문이었고, 물론 신재현이 그의 기분을 봐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재현이 점점 고송철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고송철의 불쾌감은 커져만 갔다.
이대로라면 대표의 방이라 해도 어김없이 뒤집어엎을 기세가 아닌가.
‘소송하면 국민 대역적 되려나?’
고송철은 진지하게 소송했을 경우 입을 이미지 손해와 신재현을 놔뒀을 경우 입을 타격을 저울에 올리고 고민했다.
그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신재현이 드디어 고송철의 방에 도착했다.
역시나 그는 방의 명패를 보고도 망설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서 일단 신경에 거슬렸다.
방 주인이 눈 시퍼렇게 뜨고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신재현은 책장 사이사이를 더듬어보고 파일철을 꺼내 읽어보기도 했다.
“그건 타 기업의 중요 내부 자료입니다.”
“제목만 읽었습니다. 내용은 안 봤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실제로 신재현은 파일철을 꺼내고도 자세한 내용을 훑어보지 않았다.
아무리 속독이라 해도 기업 관련 문서는 숫자와 전문 용어가 섞여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데, 과연 저렇게 봐서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의문이 들었다.
뭘 찾는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처음에 빌딩을 돌아다니기 시작할 때는 숨겨둔 실물 자료라도 찾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대충 훑어보면 뭐가 보이겠나.
대표의 책장에서 서류철을 집중 공략하며 꺼냈다 넣었다 하는 괴상한 모습을 보며 고송철은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정말 뭔가 찾는 거라면 신재현을 따라온 국세청 직원 둘이 저렇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다!
셋이 뒤지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데 둘은 놀고 신재현 혼자 뒤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같은 조사단 내에서 조사 대상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을 리도 없고, 신재현만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이 법인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고송철의 생각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자료 찾는 게 목적이 아닌가 본데? 뭐지, 그럼? 설마…….’
그래, 지금까지 봐온 신재현의 이미지와는 정말 다르지만 이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대표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내내 망설이던 고송철은 머뭇거리다가 신재현이 구석으로 다가가는 걸 보고 자기도 모르게 냅다 질렀다.
“부단장님! 제가 드릴 게…….”
“아뇨, 대표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면 됩니다.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고송철의 얼굴에 온갖 의문이 떠올랐다.
이것도 아니면 대체 뭐야!
뇌물이라도 바라는 줄 알았는데 아예 입을 막아 버리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뭘 찾는단 말인가.
찾는 척만 하고 다른 걸 노리나 했더니, 막상 신재현은 한눈팔지 않고 쌓여 있는 상자 사이로 직진했다.
고송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점점 포위망이 좁혀오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사슴의 심정이 이해될 지경이다.
‘아냐. 저 안에서도 못 찾을 거야. 일부러 잡동사니만 열 박스 갖다 놨는데.’
저걸 통째로 가져가지 않는 이상, 열어서 싹 뒤집지 않는 이상 모를 것이다.
윗부분만 보고는 절대 발견하지 못한다.
특히 지금은 3명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에 숨겨놓은 걸 안 상태에서 자정하고 뒤지면 몰라도, 저들 입장에서는 빌딩 전체가 수색 대상이다.
아니, 회계사와 직원들의 집도 수색 대상에 넣을지 모른다.
그러면 찾아야 할 곳이 넓어지니 조사단의 부담만 더 커진다.
‘상자 전부 가져가겠다고 말 꺼내면 내가 이기는 거다.’
그걸 빌미로 과도한 세무조사라고 언플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송철에게는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 역시 조사단에게는 익숙했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 두 직원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괜히 소송 걸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신재현이 딱 핀 포인트로 자료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아하, 여기 있었네요.”
신재현은 상자를 엎어보지도 않았다.
사무실을 뒤질 때와 같았다.
뚜껑을 열고 안을 뒤적거리고 닫고.
그리고 다음 상자를 열어보고.
그렇게 6번째 상자를 열었을 때, 신재현은 손을 집어넣어 정확히 하나의 파일철을 꺼냈다.
안에 종이가 몇 장 들어 있지도 않았다.
구겨진 흔적에 커피 자국까지 묻어 있어서 당장 버려도 상관없을 만큼 중요해 보이지 않는 종이였다.
‘아냐, 제발! 보기만 해서는 모를 거야! 넘어가라!’
고송철의 기도가 무색하게 신재현은 파일철을 덮더니 씨익 웃었다.
“이거네요. 혹시 모르니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두 분 도와주세요.”
신재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직원이 들러붙어 상자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잘 걸렸다, 하는 느낌.
그리고 고송철은 신재현이 왜 2명만 데려왔는지 알게 되었다.
열 개나 되는 상자를 뒤지는 데 3명이면 충분했다.
고송철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동안, 셋은 순식간에 몇 개의 파일을 더 찾아냈다.
“아니, 그건 상관없는 타 기업의 자료입니다!”
“여기 떡하니 공항공사 계약서가 있는데요?”
“그건 조사랑 아무 상관 없는 겁니다. 저희 개인 자료예요!”
“스스로 말씀하시고도 말 안 되는 거 아시죠?”
이미 다 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잡아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고송철이 어어 하는 사이, 신재현은 찾은 자료를 직원 손에 들려 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신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조사단을 거쳐간 기업들이 멍청해서 뉴스를 타신 줄 아십니까.”
고송철이 이를 바득 갈며 노려보았다.
“부단장님, 소송은 안 당해보셨죠?”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박이었지만 신재현은 코웃음을 쳤다.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분은 많으셨죠. 그래서 하실 겁니까? 저야 상관은 없는데.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건 허세가 아니라 정말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렇게 찔려도 막히고 저렇게 찔려도 막힌다.
고송철이 절망하고 있을 때 신재현이 물었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공기업 장부 그 지경인 거 알고 하셨죠?”
여기서 맞다고 대답하면 자존심까지 내려앉을 것 같았다.
고송철이 입을 꾹 다물었지만 신재현은 개의치 않았다.
“회계사님이 모를 수가 없거든요. 도왔다고 보는 게 맞아요. 하지만 정황만 갖고 몰아붙일 순 없고, 철저하게 조사는 하겠습니다. 민원이든 소송이든 알아서 하세요. 그 정도로 무너질 것 같았으면 국회 때 이미 조사단은 산산조각 났을 거거든요.”
자신 있어 보이는 태도에 고송철은 깨달았다.
뭘 하든 소용없다.
온갖 변호사를 동원해 법원으로 끌고 간다 해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민원을 넣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전문가들을 거느리며 어떤 공격이든 막아내는 존재는 대기업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사단은 그보다 더한 철옹성처럼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세금 내겠습니다. 그걸로 끝냅시다.”
“회계사가 적극적으로 탈세와 분식회계를 도우면 어떻게 됩니까? 회계사법 아시죠?”
마지막으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신재현은 단호했다.
고송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징역…….”
“네. 물론 하신 일에 따라 법원에서 판단하겠죠. 그럼 다음에는 거래하시는 공기업에서 뵙겠습니다. 조사 입회하실 거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신재현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표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고송철이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명패를 쓸었다.
대표 회계사 고송철.
그가 한 짓을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신재현의 말이 맞다.
원칙대로 법을 적용한다면 징역이었다.
“허허헛.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고송철은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내가 했다는 증거는 없잖아.”
이 법인에는 회계사가 많다.
그리고 그중 누가 장부에 손을 댔는지는 아직 우길 수 있는 것 아닌가.
“최근에 들어온 막내 회계사가 공기업 회계 배우고 싶다고 했었지?”
뒤집어씌울 사람을 떠올린 고송철이 눈을 반짝였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조사단을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내 말씀
작중 공사명은 '대한공항공사, 대한농어촌공사, 대한철도공사'로 모두 픽션이며, 현실의 공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또한 작중에 나오는 모든 사건은 창작입니다.
작품 감상에 참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