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31화 (431/500)

431화. 기선제압에는 기선제압 (2)

나와 고송철 사이에는 말없이 불꽃만 튀었다.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진다는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둘 중 누구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좀 유치하지만 눈싸움이라면 지지 않지.

할 말이 없어서 하는 짓이 이거라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

말싸움보다 편하니까.

우리가 마주 보고 앉아 서로 눈만 노려보고 있자, 회의실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건 권새호도 마찬가지였다.

첫 현장부터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휘말린 느낌일까.

권새호는 본인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갈피도 못 잡는 것 같았다.

서울청 시절부터 함께해 온 팀이라면 여기서 날 말리거나 회의에 참석 중인 다른 회계사들을 정리하거나 했겠지만, 권새호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오늘은 권새호에게 우리 조사단이 얼마나 예측 불허의 사건을 몰고 다니는지 알려주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고.

내가 여기서 권새호가 느꼈으면 하는 건 하나다.

물러나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

그걸 구분하는 것.

나는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마음에 품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납세자는 절대 적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경우를 꽤 많이 본다.

공무원 일 하다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는 사람도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밑바닥에 아예 ‘저들은 적이다. 어떻게든 탈세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비난하기는 어려운 것이, 정말 잘못 걸리면 사람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

그렇게 1년, 2년 지나다 보면 모든 납세자가 적으로 보이게 되는데 그러면 정말 끝인 것이다.

본인부터가 견디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납세자가 올바르게 세금을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납세자가 5월에 세금 잘 몰라서 세무서로 찾아왔을 때, 우리가 계산해서 알려주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냐며 따지곤 한다.

그때는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줘야 하지.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탈세하셨으면 일단 나랑 싸울 각오는 하셔야지.

특히나 회계사나 되는 사람이면 아주 전문가다.

어느 게 세법에 맞고 틀린지 다 알고서 탈세했다는 뜻이다.

소송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나면 안 되는 순간이라는 거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긴 침묵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고송철은 대답 대신 회의실에 앉아 있는 다른 회계사들에게 명령했다.

“뭘 멍하니 보고 있습니까? 지금 회의할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모두 나가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 참석자들이 주섬주섬 자료를 들고 일어서려 하자 내가 막았다.

“왜 나갑니까? 안 좋은 모습이라도 보여줄 것 같아서요? 다 같이 들으시죠. 다른 회계사님들도 해당되는 얘기니. 이 안에 파트너 회계사님 몇 분 계시죠? 그러면 저도 여쭐 게 있으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일어서서 나가려던 회계사들이 나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 앞에 섰다.

고송철의 얼굴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보였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다짜고짜 회의실에 들어와서 훼방을 놓질 않나. 시비를 걸지 않나. 얘기만 하자고 해서 따로 시간을 빼 드린 겁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오, 놀랍습니다! 그게 무례인 건 아시는군요!”

“뭐라고요? 지금 놀리는 겁니까?”

“전 또 무례가 뭔지 모르시는 줄 알고 그냥 들어왔지 뭡니까.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기선제압인 거 다 안다고. 회계사님, 지금까지 제가 상대해 온 사람 중에 이런 식으로 기 싸움 걸어왔던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까?”

고송철의 눈에 아차 하는 빛이 지나갔다.

“이건 회계사님이 더 잘 아셔야 할 것 같은데. 아, 세무조사를 대리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시나? 대기업만 맡아오셔서 지저분한 말싸움을 못 보셨나요? 대기업도 파고 들어가면 만만치 않게 지저분할 텐데.”

내가 피식 웃으며 약 올렸다.

고송철은 이를 뿌득 갈고 있었다.

“회계사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체납자가 문을 안 열어준 적도 있었고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집 앞에서 잠복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고송철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괜히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 꼬투리 잡힐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생방송으로 아마 나왔을 텐데, 하동문 의원님 댁 들어갈 땐 담 넘어서 문 땄습니다. 오피스텔에서는 장비 가져와서 문 땄고요, 어디 있는지 모르는 체납자 찾을 땐 추운 겨울날에 전봇대 뒤에 서서 결국 잡아냈어요.”

이건 삼성세무서의 체납징세과에 있을 때의 얘기다.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은 재산인지라 무작정 쳐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체납자가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걸 보고서야 들어가서 털어왔지.

“그거랑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엉거주춤 서 있던 나이 지긋한 회계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고송철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걸로 봐서는 파트너인 것 같았다.

회계법인이든 세무법인이든 대표는 한 사람이 맡지만, 그가 모든 걸 결정하는 건 아니다.

유능한 사람을 영입해 주식 지분을 주고 그에 합당한 직책을 주는데 그게 바로 파트너였다.

회계법인의 규모를 생각해 봤을 때 여기 있는 사람은 대부분 파트너일 것이다.

또는 그에 준하는 영향력과 능력을 가진 회계사겠지.

나는 확인차 물었다.

“회계사님 맞으시죠?”

“네. 파트넙니다.”

역시 생각이 맞았다.

“말씀 잘 해주셨습니다, 회계사님. 제가 굳이 무용담 늘어놓자고 한 건 아니고요. 왜 그런 말씀을 드렸냐? 지금이랑 별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파트너 회계사님. 오늘 회의의 주제가 뭐였습니까?”

고송철이 눈짓으로 말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고 남자는 그걸 잽싸게 알아들었다.

“회사 내부 정보입니다. 긴급회의 내용까지 알려 드려야 합니까?”

“아, 사실 저도 내용 자체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반드시 지금 해야 하는 회의였냐는 거죠. 어때요, 꼭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안건이었습니까? 아,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얼굴만 봐도 알겠으니까.”

회계사들이 뜨끔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당혹감과 머쓱함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굳이 자세한 사정은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뜨끔해하고 있으니까.

“회계사님들 평소에 어떻게 하시는지 생각하면서 들어보세요. 보통은 말입니다. 거래처에서 손님이 오기로 미리 약속을 했으면 그 시간은 비워놓는단 말입니다. 물론 급한 일이 있을 수 있죠. 이렇게 다른 파트너님들까지 모을 정도로 급한, 예를 들어 회사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왔다든가 하는 문제 말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건 다들 알고 있잖아요. 알면서도 그냥 지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제가 전달받은 건 이거였습니다. 급한 회의가 있어서 만날 수 없으니 1층에서 잠시 기다려달 라고. 이게 무슨 뜻인지 제가 모를 것 같았어요? 아니면 알면서도 아무 말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다들 뻔히 아는 건데 시간 낭비 그만 좀 합시다. 벌써 별것도 아닌 말싸움 갖고 10분이나 흘렀네.”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고송철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별것도 아닌 말싸움이라고요? 그럴 거면 왜 따진 겁니까.”

“그럼 멍청하게 기 싸움 거는 거 알면서 당하고 있습니까? 싸울 땐 싸우더라도 안 통한다는 건 알려 드려야지.”

“아니, 그…… 허참.”

내가 한 건 한 대 치고 빠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공무원에게 회계법인 대표가 기 싸움, 갑질했다는 건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들러붙어서 싸울 수도 없고.

고송철이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고송철을 거들었던 파트너 회계사도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옆 사람이 말리는 바람에 혀를 차며 주저앉았다.

현명하신 판단이네.

내가 조금 물러났다고 치고 들어왔으면 바로 또 2차전 시작했을 텐데.

내가 아쉬운 눈길로 파트너를 바라보자 옆에서 말리던 여자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남자에게 뭐라 뭐라 귓속말을 했다.

뭐라고 했는지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쪽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고, 이제 고송철에게 원래 목적을 물어볼 차례다.

“고송철 회계사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제가 왜 왔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기 싸움 이런 건 사실 회계사님이 먼저 하신 거지 제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기 싸움이 아니라……!”

“네. 그렇다고 해둘게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뭘 들었는지가 궁금하신 거 아닌가요?”

“크흠…….”

그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화제가 나오자 고송철이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협약식 때도 지금도 내가 뭘 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궁금해 미칠 것이다.

그러니 괜히 되도 않는 기선제압을 걸어온 거겠지.

내가 뭘 쥐고 있는지 모르면서 섣불리 얘기를 꺼냈다가 자진납세 하는 꼴이 되는 건 피하고 싶을 것이다.

덕분에 고송철은 아직 분위기만 살피느라 조용했다.

그래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내가 별거 아닌 걸로 온 거라면 당장에 물어뜯을 모양새다.

“제가 협약식에서 말했듯이 오해를 풀고 회계사님의 해명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래도 거기서는 보는 눈도 있으니 회계사님이 난감하시지 않겠습니까.”

탈세범의 입장 따위를 생각할 턱이 있나.

저건 그냥 핑계고 원래 목적은 회계법인에 들어와 동태를 살피는 것이다.

겸사겸사 다른 회계사들 탈세액이 얼마쯤 되는지도 좀 보고.

내가 회계법인에 나오기 전 따로 우리 팀 직원들에게 부탁한 것이 있었다.

바로 회계법인이 맡은 회사들의 자료다.

사무실에서 이 회계법인의 세금계산서와 매출처별 합계표 기준으로 거래처를 훑어봤을 때, 확실히 공기업이 많았다.

회계사회장이 말했던 대로 공기업 전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직원들이 가져온 재무제표를 모두 훑어봤을 때, 놀랍게도 공기업 몇 군데에서 선명한 탈세액이 보였다.

이제 관건은 하나다.

그 공기업들이 자기가 알아서 탈세한 건지, 아니면 고송철이 도운 건지.

설마 감사하면서 탈세도 몰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한번 떠보려고 온 것이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고 있는 고송철에게 내가 넌지시 운을 뗐다.

“공항공사, 농어촌공사, 철도시설공단. 공통점이 뭐일 것 같으세요?”

“그, 글쎄요.”

“고송철 회계사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 아닙니까?”

“그야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관리하는 게 죄는 아니지요.”

고송철의 관자놀이에 땀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다.

약간의 동요라.

“농어촌공사 전 사장님의 따님이 이 법인에서 일하고 있죠?”

“그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관계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건 아무런 흠도 안 됩니다.”

“아, 괜찮습니다.”

문맥에 맞지 않는 대답 때문인지 고송철이 의아한 낯을 했다.

괜찮다는 말은 그의 말대로 흠이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변명해 봤자 소용없다는 말이었지.

“그 판단은 조사단에서 할 겁니다. 아시죠? 저희는 검찰, 경찰, 금융감독원 등이 모두 모인 드림팀입니다.”

“어…….”

그가 어안이 벙벙한 사이에 나는 자리에 모인 회계사들을 둘러보며 대답도 듣지 않고 툭툭 말을 던졌다.

“2년 전 이 법인에 들어온 이거정 회계사님, 2년 반 전에 아드님께서 모 공항공사에 인턴 하셨죠? 그리고 그 공항공사가 감사법인을 유명 회계법인에서 여기로 바꿨고요.”

“그, 그거는 제가 들어오기 전이라 상관없는 이야깁니다!”

“걱정 마세요. 상관있는지 없는지는 검찰에서 정할 겁니다. 저한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저는 아시다시피 국세청 직원이니까.”

“아니, 그 무슨…….”

그 후로도 내게 이름을 불린 회계사 몇몇이 펄쩍 뛰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깡그리 무시했다.

굳이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너희를 조사할 거라고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다 알고 있다.

이걸 말하고 싶어서였지.

“그래서 아까 제가 한 질문의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공항공사, 농어촌공사, 철도시설공단. 이 셋의 공통점은 바로 장부 조작으로 인한 탈세입니다. 어때요, 쉽죠?”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아까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제가 모르고 왔을 것 같습니까? 이래서 원래 대표 회계사님과 둘이서만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겁니다. 회계사님의 돌발 행동으로 이렇게 되긴 했지만.”

고송철이 쓸데없이 기 싸움만 안 했으면 둘이 얘기한 후 적당히 떠보고 세무조사 계획을 잡았을 것이다.

둘이 보나 이렇게 회의실에서 다 같이 보나 세무조사 들어오고 탈세범 엿 되는 건 똑같지만, 아마 직원들이 고송철을 보는 눈은 달라지지 않을까.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제가 최종적으로 알고 싶었던 건 이겁니다. 공기업의 회계감사를 하셨잖아요. 그러면 알고 탈세를 도운 건지, 모르고 넘어간 건지. 그 해명을 듣고 싶었던 건데…….”

나는 말끝을 흐리고 회계사들을 스윽 훑었다.

고송철을 뺀 다른 회계사들은 내 시선을 피하더니 고송철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그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정과는 좀 다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해명을 들을 필요도 없어 보이네요.”

살살 구슬려 가면서 감사 얘기 좀 캐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조사단 현장이라는 게 이렇다.

당초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이 너무 많다.

이렇게 된 이상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런저런 정보 캐내는 건 물 건너갔고, 돌아가기 전에 할 만한 건 경고뿐이다.

“그럼 다음에 뵙죠. 세무조사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땐 긴급회의가 없었으면 좋겠군요.”

상큼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낭패라는 분위기가 곳곳에 흘렀다.

그것이 내게는 확신이 되었다.

회계법인에 공기업 여러 곳이라.

다음에 올 때는 오랜만에 조사단이 총출동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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