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외나무다리 (2)
법령해석과의 분위기는 사뭇 혼란스러웠다.
원래 이곳은 조용하게 앉아서 국세법령시스템이나 실무서, 세법해석서 등을 뒤적거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몇 명은 집중을 못 하는 것이 딱 보였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잘 집중되지 않는 상태 같았다.
애써 커피를 들이켜며 모니터와 실무서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눈동자가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는 걸 보니 역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권새호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지난주에 있었던 일 때문에 두근거려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무원 생활이란 솔직히 지루함의 극치다.
어느 직장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항상 하는 일의 반복이었으며, 특히 외부인과 잘 마주치지 않는 법령해석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었다.
거기서 박원형, 신재현을 만난 것은 엄청난 자극이었다.
그야말로 같은 세상, 같은 청의 공무원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신재현이 같은 국세 공무원이라는 것은 물론 머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국세청이 내세운 간판 같은 머나먼 느낌에서 지금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일하는 동료 직원이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신재현이 뒷사정을 설명해 준 날, 그는 바로 약속을 지켰다.
국세청은 크지만 폐쇄적인 곳이다.
어제 누가 새벽 3시까지 야근했다더라, 하는 것이 오늘 아침 소문으로 들리는 곳이었다.
거기에 신재현과 관련된 소문이라면 다들 귀를 쫑긋거리며 들을 판이었다.
그날 로비에서 있었던 실랑이는 이미 그날 저녁에 거의 모든 과로 퍼졌다.
그야 그건 이해가 간다.
‘점심시간이었고 보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신재현과 법령해석과의 싸움이라니.
어떤 뒷얘기가 있는지 매우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직후, 국세청 내부에 있던 직원 모두가 기겁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조사단이 있는 복도에서 웬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같은 층에 있는 사무실의 직원들이 가장 먼저 내다보았다.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조사단 멤버는 국세청 내에서도 화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2명밖에 없는 반장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문 밖으로 질질 끌려나와 쫓겨나듯 팽개쳐진 2반 반장이 복도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지르는 모습이라니.
공무원 생활 수십 년을 한 사람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기도 전에, 이번엔 국세청장실에서 보안 팀 손에 끌려 나가는 2반 반장의 모습이 목격되었다.
이번엔 아예 국세청 밖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직접 본 사람이 매우 많았다.
‘김선희, 저 사람도 참 무서운 사람이야.’
그동안 조용해서 몰랐는데 김선희는 강단 있고 철저한 성격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까진 아니더라도 확실한 결말을 원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조사단의 2반 반장 엄배홍이 국세청장실에서 쫓겨나는 날, 먼저 그가 복도에서 소란을 피웠을 때 김선희는 급히 하던 일을 끝마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조사단 앞 복도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엄배홍이 자리를 떠난 후.
기대한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김선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무실에 들러 관련 이야기를 듣던 도중, 온 국세청에 울려 퍼지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바로 엄배홍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끌려 내려오며 외치는 사자후였다.
덕분에 국세청 모든 사람들이 엄배홍의 비명 아닌 비명을 들었다.
김선희는 서둘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미리 로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여유롭게 한 모금 머금으며, 보안팀이 엄배홍을 데리고 로비를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인 남자가 발버둥 치며 버티자 보안팀도 생각만큼 엄배홍을 빨리 끌고 나가지 못했다.
덕분에 김선희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자신에게 사기를 친 남자의 마지막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싱그럽게 웃으며 한 손을 흔들기도 했다.
당시 구경을 나온 것은 김선희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일화도 국세청 내부에 다 퍼졌다.
따라서 지금 권새호가 아는 김선희의 일화는 타 과에서 주워들은 것이었다.
-타다다다닥!
조용한 가운데, 혼자서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는 이는 바로 김선희였다.
그녀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후련한 표정으로 경쾌하게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김선희가 보고 있는 것은 어제 들어온 질의다.
대충 해외법인에 대한 것이었는데 저 어려운 걸 금방 찾아서 회신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마음의 짐을 던 덕분일까.
요 일주일간 김선희의 처리 능률은 법령해석과에서도 최상을 달리고 있었다.
국세청 콜 상담센터 쪽에서 요청한 법령해석 건도 몇 개 있었는데 요즘엔 김선희가 알아서 가져다 해치우고 있었다.
국세청 콜센터에 있는 공무원들도 나름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직원들이라 웬만한 사례를 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직원들이 법령 해석을 의뢰해왔다면 꽤 어려운 사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간혹 콜센터 쪽에서 넘어오는 건은 다들 기피하기 일쑤였는데 과장이 배정하기도 전에 김선희가 자진해서 갖고 가곤 했다.
거의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앞으로는 까불지 말아야지.’
권새호가 내심 굳게 결심했다.
다른 직원들도 한동안 그 충격적인 광경을 쉽사리 잊지 못했다.
엄배홍이 쫓겨난 이유는 이미 다 퍼졌다.
신재현이 작정하고 퍼뜨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본청 직원들은 투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사단이라는 게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버티는 것도 힘든 곳이구나.
그리고 신재현은 가차 없구나.
자르는 게 당연하다고 해도, 막상 함께 일하던 동료를 내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걸 올해 스물아홉인 젊은이가 해냈다고?
본보기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사단의 이름으로 조금이라도 허튼 마음을 품으면 이렇게 된다.
신재현은 자신의 냉정함과 판단력을 단번에 보여준 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 후 며칠간은 법령해석과도 웅성웅성했다.
아마 다른 과도 거의 그랬겠지만 직접 만나서 실랑이도 해본 법령해석과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근데 그건 그거고, 분위기 진짜 살벌하다.’
권새호는 흘끔 눈치를 봤다.
사실 아까부터 이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의자에 앉아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바로 징세법무국의 국장이었다.
국장실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소속 과에 와서 저러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냥 불안한 마음에 숨죽이며 모니터에 고개를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김선희 혼자만 꿋꿋하게 업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왜 온 거야?’
권새호는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직원들도 눈이 마주치자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어 왔다.
‘나도 죽겠어요!’
‘왜 안 가!’
‘가시방석이네, 진짜.’
가장 좌불안석인 것은 바로 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려 했지만 국장이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더니 과장 책상 옆에 빈 의자 하나를 끌어놓고 그 옆에 쌓인 결재 서류며 보고서를 훑어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대체 왜……?’
과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불안함에 몸서리를 쳤다.
도저히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소속 과에 들른 건 그래, 지나가다가 궁금해서 들렀을 수도 있다.
실제로 아까 국장은 사무실 문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웃는 낯이었다.
불편한 점이나 건의사항을 물어보며 평범한 국장처럼 행동을 했다.
그러던 사람이 지금은 뭔가 심기도 불편해 보인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리고 하나 더.
아까 박원형은 왜 왔다가 그냥 갔을까.
박원형은 어쩐 일인지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안의 분위기를 살피더니, 갑자기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가워서 권새호가 인사나 할까 한 순간, 박원형은 그대로 문을 닫고 줄행랑을 쳤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국장은 과장에게 사무실 문 쪽을 가리키더니 눈빛으로 물었다.
“누군데 들어오려다 말아? 법령해석과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낯이 익단 말이야.”
국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억나지 않는지 과장에게 물었다.
법령해석과 과장이 박원형을 알 리가 있나.
김선희와 권새호가 불려갔던 날, 두 사람을 잠시 빌리겠다는 전언을 갖고 온 이는 장세훈과 강혜원이었다.
과장은 박원형의 얼굴조차 몰랐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권새호는 가만히 있었지만, 때마침 눈에 띄고 싶었는지 최서웅이 잽싸게 끼어들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신재현이랑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친구입니다. 예전에 잘못 걸려 가지고 좌천됐는데 이번 정기 발령 때 본청 들어와서…….”
그때부터였다.
국장의 행동이 이상해진 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업무에 신경 쓰세요.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요.”
최서웅은 당연히 그 당사자가 눈앞의 국장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뜨끔한 국장은 듣기 싫은 건지 누가 알아보는 게 무서운 건지 최서웅의 설명을 중간에 막았다.
덕분에 정작 중요한 얘기를 듣지 못한 국장은 눈을 부라리며 최서웅을 향해 호통을 쳤다.
이건 권새호가 보기에도 이상했다.
끼어들었다가 한소리 들은 최서웅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국장은 그대로 뒤돌아 나갈 것처럼 하더니, 뭔가 못마땅한지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안 가시는 거야?’
오늘따라 모든 게 이상했다.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까의 반응을 보면 박원형과 국장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
내막은 모르겠지만 도망친 박원형도, 지금 국장도 태도가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불편한 침묵이 한참 이어진 후, 그 의문을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
-똑똑.
“저, 안녕하세요.”
숫기 없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사무실 문을 연 것은 아까 부리나케 도망갔던 박원형이었다.
분위기가 얼마나 칼날 같았는지 박원형의 등장에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아까 있었던 볼일을 마저 끝내러 온 모양이다.
박원형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더니 과장의 옆자리에 앉은 국장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매우 투명하게도 ‘올 게 왔다’는 표정이어서 의외였다.
‘진짜 아는 사이인가 보네?’
박원형은 당장에라도 나가고 싶은 것처럼 뒤로 돌려는 다리를 애써 고정시킨 후, 한 걸음 더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까 궁금한 게 있어서 왔었는데요, 국장님까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도 모르겠어요, 하는 얼굴의 직원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권새호는 그냥 잡담하려고 왔다가 국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있으니 부담스러웠던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박원형 조사관님이 왜 그랬는지는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데.’
정작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국장의 반응이었다.
국장이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소리를 질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내가 그때 말했지? 두 번 다시 수도권에는 발도 들일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이러려고 일부러 기다렸나 싶었다.
박원형을 만나고 싶은 거였으면 차라리 최서웅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그러나 아까 직접 자기가 설명을 못하게 입을 막았는데, 이제 와 물어보자니 체면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박원형이 누구인지 안 시점에서 뒤늦게 쫓아 나가자니 그것도 모양새가 안 좋아 보이고.
결국 박원형 하나 만나자고 다른 사람들 일도 못 하게 뚱한 표정을 한 채 법령해석과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나자마자 한다는 짓이 잘 걸렸다며 대뜸 힐난하는 거였고 말이다.
다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굳어 있었다.
제3자인 그들도 놀랐는데 당사자인 박원형은 어떻겠는가.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움찔거리며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지탱하고 있었다.
박원형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티고 있자 국장이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경고가 말 같지 않아서 이렇게 기어들어 온 거야? 또 저기 바닷가로 날려 보내주랴?”
박원형이 견디지 못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박원형이 열어둔 사무실 문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가장 어린 그 청년은 박원형의 옆에 서더니 국장과 마주했다.
“제 직원을 누가 마음대로 보내고 말고 합니까? 아무리 국장님이어도 월권이신데요.”
“내가 보내겠다면 보내는 거지, 누군데 끼어들…… 허억?”
국장이 삿대질을 하려고 어깨까지 들어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국세청 본청에서 신재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에게 삿대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게 직급이든 나이든 경력이든 한참 높은 국장이라 할지라도.
“제 직원입니다. 이견이 있으시면 책임자인 저에게 말씀하시죠. 누가 누굴 보내겠다고요?”
“끄응.”
국장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신재현과 박원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재현이 재차 물었다.
“왜요? 남의 팀 공무원을 날리겠다고 하셨을 때는 마땅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책임자로서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신재현을 보며 국장이 끙끙댔다.
딱 보아하니 골치 아픈 놈에게 걸렸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