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외나무다리 (1)
협약식은 혼돈 속에 끝났다.
회계사회장은 식순이 끝나자마자 날 데리고 문제의 회계사 고송철에게 갔다.
마른 체격에 꽤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던 고송철은 내가 다가오자 일단 눈썹을 위로 올리며 경계했다.
그러나 내 예상대로 회장이 직접 소개를 하자 그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해명을 요구하자 또 표정이 바뀌었다.
머리 굴리는 게 투명하게 다 보였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뭘 들으셨길래 부단장님이 일부러 이렇게 저를 찾으셨을까요?”
“저도 오해였다고 믿고 싶습니다. 남의 사례를 말씀하신 거겠죠. 근데 또 제가 듣고 나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습니까. 회계사님 사무실에 방문해 보고 싶네요.”
“방문까지요? 어떤 건지 말씀을 해주시면 제가 상세하게 해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뭐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지금 좋은 자리에서 큰소리 낼 수는 없어서 회계사님 사무실에 따로 방문하겠다고 청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회계사님. 제가 여기서 들은 얘기를 낱낱이 말해 버리면 공식적으로 ‘아는 게’ 됩니다. 제 입장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돼요. 회계사님이야 먼지 나올 게 없다 해도, 공개적으로 세무조사 가는 게 소문 나 버리는 것보다는 제가 그냥 따로 방문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회계사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도록 술술 내뱉었다.
고송철 뒤에서 청장과 세무사회장이 ‘오, 그럴듯한데’ 하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고 옆에서 듣고 있던 회계사회장 역시 뭔가 이상한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송철은 얼떨결에 승낙을 해버렸다.
내가 조사단 들어오고 나서 배운 방법이었다.
상대의 등 뒤에 절벽을 깔아 버려서 선택지를 하나만 남겨두고 없애 버리는 것.
아마 집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럼 뭐 해, 이미 나는 승낙을 들었는데.
“그럼 조만간 곧 찾아뵙겠습니다.”
“예? 예에…….”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고송철을 뒤로하고 우리는 잽싸게 국세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희희낙락 신나게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의외의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세상에 그런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아니! 진짜라니까요! 저도 가보고 너무 놀라가지고 헐레벌떡 튀어온 거예요!”
직원들이 한 명을 둘러싸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심각해 보이기도 했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믿지 않는다고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었다.
한창 일할 시간인데 대체 뭐지?
물론 나는 업무 시간에 무조건 일만 하라고 강제하는 사람은 아니다.
직원들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니까.
잠시 쉬면서 잡담도 하고 커피 한 잔도 마시고 그러는 법이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고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지금 하는 건 그냥 잡담 같지가 않았다.
특히 열 명도 넘는 직원들이 박원형 한 사람을 둘러싸고 추궁하는 건 뭔가 이상했다.
설마 나 없는 동안 사무실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채유림이 하루 정도는 커버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외근 다녀오라고 말하기도 했고, 다들 경력직이니 이정도 자리를 비운 것 가지고 사건이 발생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시 내 빈자리가 그렇게 컸던 건가?
잠시 어깨를 으쓱했다가 내가 봐도 참 쓸데없는 생각이다 싶어서 얼른 그 가정을 지웠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엄배홍의 빈자리였다.
2반 반장 하나 빠졌다고 사무실이 이렇게 심각해질 정도였나?
물론 난다 긴다 하는 능력자들을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이 조사단에서 반장으로 있을 정도면 유능하단 뜻이긴 하다.
그래도 엄배홍이 그렇게 일을 잘했나?
직원들은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대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라는 뜻인데.
“그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요. 누가 짠 것도 아니고서 어떻게 거기서 만나.”
“저도 미치겠어요!”
“팀장님이 심부름시킨 거 있다면서요. 그럼 그것도 아직 해결 못 했겠네요?”
“네. 돌겠어요, 진짜. 그쪽도 저 기억하고 있을 텐데 뭐라고 해야 되지?”
“뭐가 꿀린다고 조사관님이 도망치듯 나와요? 박 조사관님은 이제 조사단 식구라고요. 당당하게 얼굴 철판 깔고! 딱! 나 박원형이다! 따학!”
기묘한 감탄사를 내뱉는 장세훈 뒤로 돌아 들어간 내가 바로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당당하게 뜨흐…… 아악!”
박원형 근처에 모여 있던 조사관들은 인간을 본 참새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으아악! 놀랐잖아요!”
“인기척 좀 내고 다니세요.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네.”
“아, 혹시 그래서 별명이 저승사자인 건가?”
아주 나 놀리는 데는 도가 텄다.
몇 달 전에 처음 만났을 땐 불편해하더니 이제는 다른 직원들도 장세훈과 죽이 잘 맞아서 날 놀린다.
아니면 하도 장세훈이 놀리는 걸 봐서 배운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무슨 얘기예요? 오늘은 박원형 조사관님이 주인공인가 보네요.”
다들 직접 얘기하라는 듯 박원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조금 어색한지 목을 긁적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거는 아닌데요.”
“에이, 뭐가 별거 아니에요. 아주 흥미로웠는데. 뒷얘기 너무 궁금한데. 후기가 필요한데!”
“네. 장세훈 조사관님은 잠시 조용히해 보시고. 박원형 조사관님이 얘기를 못 하잖아요.”
답답함을 싫어하는 장세훈이 음소거로 몸부림쳤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서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내 말없는 재촉에 박원형이 드디어 사건 얘기를 풀어냈다.
“제가 왜 지방 세무서로 가게 됐는지 그 이유는 알고 계시죠?”
조사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단원들의 이력사항은 보고서로 보았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박원형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난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고, 그를 조사단으로 데려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그 사건 때문이었으니까.
“네. 여당 국회의원 아들 건드렸다가 지방으로 발령됐다고 했죠.”
공무원에게는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일이다.
우리 국세청은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거다.
다른 기관은 장관 눈밖에 나면 업무를 몰아줘서 자진 사직하도록 괴롭히는 일도 허다하다고 들었다.
“근데 그 국회의원은 다 같이 나락가지 않았어요?”
예전부터 박원형의 사정이 신경 쓰였다.
그가 본청으로 왔다고는 하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응어리는 원인을 해결해야만 풀리는 법이다.
즉, 그를 날려 보냈던 국회의원과 아들놈에게 세법의 철퇴를 먹여줘야 진정한 한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건 이미 했다.
우리는 국회의원 전부를 조사했으니까.
내가 직접 아는 척하며 챙기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조사한 국회의원이나 그 가족 중에 박원형의 원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얘기가 나오다니.
이미 끝난 일이 아니었던가?
“제 인사고과를 손대서 지방으로 가게 만든 원흉이 사실 국세청에 계시거든요.”
“아!”
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조사단이 국회의원을 치기 전, 그러니까 국회가 성역이던 시절의 얘기다.
국회의원이 외압을 넣어봤자 사실 밖에서의 일이다.
안에서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불이익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왕따를 시키든 힘든 일을 시키든 지방으로 보내든 그건 다 내부의 공무원이 손을 대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의 명령을 받고 박원형에게 불이익을 준 사람이 있다는 소리다.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가만 놔뒀던 것은 세상 모든 공무원이 나처럼 행동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위에서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여당의 국회의원이 자식 문제로 길길이 날뛰며 외압을 줬다면 무작정 반항하라고 할 수도 없다.
그 공무원이 정말 글러먹었다면 박원형이 내게 말했을 것이다.
그 공무원도 평범한 사람이라 한 번의 실수를 한 거라면. 우리가 국회에 세무조사를 들어간 걸 보고 외압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느꼈겠지.
그래서 뒷전으로 미뤄둔 감도 있었다.
나는 거기서 아까 직원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하필 거기서 만났다고?
“설마 법령해석과에 그 상사분이 있는 거예요? 예전에 인사고과 잘못 줬다던?”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정답이었다.
“네. 법령해석과라기보다는 그 위에 계시더라고요. 국장님이셨어요.”
법령해석과가 어디 소속이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징세법무국 밑에 4개의 과가 있는데 징세과, 법무과, 법령해석과, 세정홍보과였지.
“지금 여기 징세법무국에 국장님으로 있다고요?”
“네. 팀장님 심부름 갔다가 딱 만났습니다. 저도 엄청 놀랐어요.”
내가 박원형에게 심부름을 보내긴 했다.
근데 징세법무국장에게 보낸 게 아니라 법령해석과 가서 권새호에 대해 알아오라고 한 거였는데.
권새호와 동기라고 하기도 했고, 그가 박원형을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내가 가는 것보다 일반 직원이면서도 그들과 안면 있는 박원형이 좀 더 친숙하지 않겠나.
아니, 근데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거기 국장님이 왜 있어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법령해석과도 소속 과니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르신 거 아닐까요? 부끄럽게도 뭘 알아보기도 전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 나왔거든요. 팀장님 심부름은 시작도 못하고 왔네요. 죄송합니다…….”
박원형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예 테이블에서 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까 왜 장세훈이 후기를 듣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뒷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진짜 신기하네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식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딱 어울리는 말이 그것밖에 없네요.”
“그쵸? 저 지금 할 거 있는데 일이 손에 안 잡힌다니까요.”
채유림도 의자를 끌고 옆에 붙었다.
아니, 반장님. 일은 해야죠, 라고 하려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얘길 들으면서 일을 하는 저 몇 명의 사람들이 대단한 거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모니터를 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직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너무 기대하시는 것 같아서 죄송한데 이게 끝이에요. 그대로 도망 온 거라서 후기 같은 건 없거든요.”
과한 관심에 박원형이 멋쩍어했다.
그리고 장세훈이 소리쳤다.
“아니지! 왜 후기가 없어요! 심부름하러 간다면서요. 그럼 다시 갈 거 아니에요?”
“어, 네. 그렇죠? 그래도 맡겨주신 일은 해야 하니까. 제가 하기 싫다고 남한테 미룰 수도 없고요. 그런 건 제가 제일 싫어하는 거거든요.”
박원형은 각오한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원수를 만난 거나 다름없는 심정일 것이다.
힘없이 떨려 나는 건 정말 원통한 일이니까.
그런데 박원형에게는 미안하게도 지켜보는 우리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했다.
장세훈이 다시 갈 거냐고 물어보는 이유가 있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면 안 됩니까? 저 말싸움 잘하는 거 아시죠? 저 데려가면 든든하실 겁니다.”
장세훈이 자신의 전투력을 어필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다짜고짜 가서 싸우고 오시게요? 그럼 더더욱 보내 드릴 수 없는데.”
장세훈이 시무룩해지자 뒤이어 다른 직원들이 학교 발표 시간처럼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조용히 구경만 하고 올게요!”
“저요! 팀장님, 제가 박원형 조사관님과 친합니다!”
박원형은 자신을 보내 버린 당사자와 만날 생각에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정작 동료라는 작자들은 구경 갈 생각 만만이라니!
물론 박원형이 당할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으니 저렇게 즐거워하는 거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그들을 타일렀다.
“박원형 조사관님이 당황하시잖습니까. 도와드릴 수 있는 사람이 가야죠.”
나는 자신 있게 나를 가리켜 보였다.
“제가 조사관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에이…….”
손을 들었던 직원들이 실망한 얼굴로 손을 내리는 가운데, 박원형 혼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대신 일거리 드리고 갈게요. 회계 법인인데…….”
“에이……!”
직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팀장님도 구경하러 갈 생각이시면서!”
“2명 갈 거면 3명 가도 되잖아요! 저도 갈래요!”
나는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시간 끌 거 없어요. 지금 해치워 버립시다!”
“네, 팀장님!”
씩씩하게 대답하며 일어서는 박원형과 함께 나는 법령해석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