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25화 (425/500)

425화. 업무 협약식 (3)

나와 청장은 서로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청장의 표정은 점점 음흉해졌다.

“크흐흡.”

“흐흐흐흡.”

우리 둘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자 세무사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 두 분께서 잊어버리신 것 같은데 저 아직 옆에 있습니다. 중요한 걸 들은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그는 눈에 띄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 관리는 놀라웠다.

분명히 눈썹과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는데도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딱히 아셔도 상관없는 얘기라서요. 세무사회장님이 이런 탈세하고는 상관없으실 거 아닙니까.”

“물론이죠. 저는 깨끗하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세무대리 한 기업체도 다 성실하게 신고했고요. 설마 세무사 업계 들어 엎으실 생각은 아니죠?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저도 미리 좀 알려주시면…… 하핫, 장난입니다.”

“어휴, 저도 장난인지 구분 정도는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멋쩍어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세무조사라는 게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회계연도가 끝나면 이미 장부든 계좌든 다 마감되어 버리는데 자료 열어보면 다 나오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부에 손대는 종류의 탈세가 가장 어리석고 추잡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심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마음이 잘 맞았다.

이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말씀 정말 잘하셨습니다. ‘안 걸리면 장땡이지!’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소득세 조사는 5년이 최대니까 5년 만 넘어가면 된다고. 그런 분들 보면 안타깝다니까요. 나중에 가산세만 본세의 30%를 내는데.”

“맞습니다! 재수 없으면 걸린다고 암암리에 말이 퍼져 있는데 5년간 언제 세무조사 나올지 몰라서 벌벌 떠는 게 얼마나 심장 떨리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밤에 잠도 편히 못 잔다니까요?”

“어째 겪어보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혹시……?”

“제가 세무사니까 곁에서 그런 분들을 많이 봤지 않겠습니까. 저야 정직하게 내시라고 권하는데, 싫다면서 세무사를 옮기지 뭡니까. 그래놓고 몇 년 후에 와서 세무조사 통지서 왔다고 저한테 하소연을 하는데 간이 쫄려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세무조사 통지서 받고 나서는 더 겁먹었겠네요?”

“네. 이미 나온 이상 어떻게 무를 수도 없잖아요. 그냥 돈 다 물어낸다고 생각하시라고 했더니 아주 졸도를 하십디다. 그런 거 보면 아예 처음에 상담할 때부터 그렇게 말을 해요.”

“오, 가끔 보면 적극적으로 탈세 돕는 세무사님도 계시던데…….”

“그야 어느 업계든 이상한 사람은 있게 마련 아니겠어요? 그 뭐라더라. 또라이 보존의 법칙? 그런 말도 있던데요. 으허헛!”

“그럼요. 공무원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는데요, 뭐. 그럴 수 있죠. 회장님께서 탈세하지 않도록 잘 장려해 주실 테니 저는 걱정 안 하겠습니다.”

내가 순진한 척 배시시 웃자 세무사회장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이번만은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꽤 하는데?’ 하는 눈빛이다.

“그렇죠? 믿고만 있겠습니다.”

나는 모른 척 되물었고 회장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청장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덕분에 단상 위에서 연설하던 회계사회장이 말을 뚝 멈추고 이쪽을 쏘아보았다.

이건 좀 예의가 아니긴 하지.

나는 단상을 향해 꾸벅 목례를 했고 머지않아 회계사회장의 연설이 다 끝났다.

그가 내려와 청장의 왼쪽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청장이 연설할 차례였다.

청장이 올라가자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때 내 귓가에 자그마한 잡담이 흘러 들어왔다.

“청장이 연설할 때도 잡담하나 보자.”

회계사회장의 목소리였다.

옆자리의 회계사회 임원에게 하는 얘기였는데 충분히 들리도록 어중간한 목소리로 말한 걸 봐서는 일부러 들으라고 한 것 같다.

근데 어쩌지.

청장님은 이미 잡담해도 된다고 허락하고 올라가셨는데.

-어차피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니까 연설 들을 시간에 여기 사람들한테 정보나 캐. 그게 효율적이지.

그래서 예의상 첫 마디, ‘오늘 우리는 투명하고 정직한 세정을 향한 한 걸음을 떼었습니다’라는 문장만 듣고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근데 아까 그거 말입니다.”

왼쪽에서 ‘진짜로 잡담하네’라는 말이 들려왔다.

좀 이따가 회계사회장과도 대화해볼 생각이었는데 너무 비호감을 샀나?

일단은 세무사회장 쪽이 먼저다.

“제가 어딜 칠지 들으셨다고 해서 소문내고 다니실 건 아니잖아요. 세무조사라는 게 원래 사전 통지하는 만큼 대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긴 하지만 그거랑 일부러 소문내는 건 다르죠.”

“어허허, 어허허헛! 그렇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부단장님께서는 제 정직함을 믿고 흘리신 것뿐인데 제가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릴 수는 없죠.”

세무사회장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내 말을 거의 협박으로 알아먹은 것 같았다.

사실 협박까지는 아니고 회장이라는 사람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 경고를 알아먹고 입을 다무는지, 아니면 업계의 세무사들을 생각해서 미리 귀띔을 해줄지.

업계에 도는 소문을 내가 알아내긴 어려우니 나중에 허승원 전 서장님을 통해 전해 들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회장의 표정을 보니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는 내게서 세무사 업계를 엎어버리겠다는 으름장이라도 들은 것처럼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우리가 맨 앞에 있다 보니 그들 눈에 떡하니 보였기 때문이다.

세무사회장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그들도 보기 드문 장면이었나 보다.

회계사회장이 앞으로 고개를 쑥 내밀더니 이쪽을 보고 뭔가 하는 표정을 했다.

-저희 국세청은 날이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조사단을 선례로 오로지 세법에 의거한 과세만 있을 뿐 그 외의 어떤 외부적 요인도 국세청과 세무조사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더불어 조사단을 통해 국세청의 권한이 강해진 만큼 견제할 수단 또한 마련해 두었습니다. 감사실이 확대되어 전 국세 공무원을 대상으로 물샐틈없이 감사할 예정입니다.

방금 뭔가 중요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감사실을 강화한다고?

조사단의 이름이 세지긴 했나 보다.

누가 압력을 넣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아마 외부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미리 견제책을 마련해 두려고 한 결정일 것이다.

나중에 ‘조사단 너무 큰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때 ‘견제책 있습니다’라고 받아치려면 지금부터 만드는 게 맞지.

나는 한쪽 귀로는 계속 청장의 연설을 주워들으며 한 자리 옆으로 옮겼다.

바로 회계사회장의 옆자리였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나누고 싶었는데 아까는 기회가 안 되어서 몇 마디 못하고 넘어갔네요.”

내가 말을 걸자 회계사회장은 질겁했다.

그는 나와 청장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되물었다.

“청장님 연설하시지 않습니까. 부단장님 국세청 소속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청장님도 다 알고 계세요. 바로 코앞에 있는데요, 뭐.”

“아니, 그래도…….”

“그보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회장님께서는 혹시 회계법인 고송이라고 아십니까. 오늘 거기 대표 회계사님도 참가하신 걸로 아는데.”

이쪽은 세무사회장과 반응이 확 달랐다.

대번에 경계하더니 상체를 뒤로 뺐다.

태도가 너무 솔직하게 보여주는 거 아닌가?

“왜 고송에 관심을 가지시죠? 부단장님하고는 상관없는 곳 아닙니까?”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너무 경계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내가 그 잠깐 사이에 비호감을 많이 쌓았나?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조금 부드럽게 나가보기로 했다.

“아까 들어오면서 고송의 회계사라는 분이 대화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조금 마음에 걸려서요.”

그놈 머리에 탈세액이 떠 있더라, 는 말 대신 조금 꼬아보았다.

어차피 그런 비스무리한 얘기는 했을 것이다.

저렇게 탈세 좀 해본 놈이면 뻔하지.

어떤 신박한 방법으로 탈세했는지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하는 사람들이다.

지나가다 들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회계사회장도 납득했는지 경계심이 조금 줄어들었다.

“한 20대 회계법인 안에 들어가는 이름 있는 회사입니다. 고송이요. 뭘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부단장님이 의심하시는 그런 게 아닐 겁니다.”

“그럼 제가 직접 만나보고 오해를 풀고 싶은데 주선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직접 찾아가면 너무 놀라실 것 같고, 그렇다고 제가 무작정 회사로 찾아가도 무슨 일인가 놀라실 것 같아서요. 서로 대화로 풀 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회장을 살살 구슬렸다.

그 회계사 본인과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내가 다짜고짜 가면 일단 경계부터 하지 않을까.

회장에게 소개받으면 조금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을 테고.

회장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다가 결국 승낙을 했다.

“이따 식순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얘기할 테니 일단 기다려 주세요. 꼭 저 먼저 얘기하고 오셔야 합니다.”

신신당부하는 회장에게 내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의심을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연설을 마친 청장이 단상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채로 날 지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 국세청의 자랑이자 차세대 국세청 공무원이라 불리는 우리 조사단의 신재현 부단장을 소개하겠습니다.

“……예?”

-이왕 왔으니 한마디 해. 다들 궁금해하시잖아.

“……청장님?”

이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죠?

내가 억울한 눈빛을 가득 담아 쏘아 보냈지만 청장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내밀며 나를 재촉했다.

“얼른. 다들 기다리잖아.”

나는 이번에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연설하실 때 잡담했다고 벌 주시는 거 아니죠?”

“신 팀장 하고 싶은 말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준 건데. 안 할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안 합니까. 그냥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멘트를 준비해 왔을 거다, 이 말이죠. 저 다음 조사 나가기 전에 미리 보고 안 드려도 돼요?”

“그건 안 되지. 알았어, 미안해.”

청장이 내밀었던 마이크를 도로 거두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 앞에 보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대로 청장이 그냥 내려오면 국세청 면이 안 서는데.

“아닙니다. 청장님께서 주신 기회, 열심히 뛰겠습니다.”

“그래. 그 자세야.”

청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를 내밀었다.

단상 위로 올라서자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날 보고 있었다.

개중엔 호의적인 표정도 있고 날 선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운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국세청의 조사관 신재현입니다. 식순에는 없지만 이 자리에 서서 여러 전문가님들을 모시고 한 말씀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길게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다음 순서도 있으니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만 얘기하고 내려가겠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마이크를 꾹 잡았다.

저들 사이에 때때로 두더지 게임처럼 뿅, 하고 숫자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평온하다가도 저런 것만 보면 열불이 난다.

잘 아는 사람들이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아니까 더 해먹는 건가?

나는 마이크가 부서질 듯 붙잡고 말했다.

“저는 공무원 오래오래 할 겁니다. 공무원으로 은퇴할 거거든요. 이 말씀을 왜 드리냐? 제가 계속 국세청에 있는 한 국세청은 탈세에 대해 관용, 자비, 한 번만 봐드리겠습니다 이런 거 절대 없을 거거든요. 여기 계신 전문가님들이 꼭 좀 납세자분들을 좋은 방향으로 설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참고로 내 연설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받침대에 마이크를 꽂고 내려가자 싸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걸 깬 것은 청장이었다.

“크하하하! 따로 준비할 필요도 없었네!”

청장은 시원하게 박수를 쳤다.

곧이어 저 뒤쪽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봤더니 허승원이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공무원 출신 세무사들이 히죽 웃으며 따라서 박수를 쳤고, 정적만 가득하던 행사장 안에 이내 마지못해 치는 박수 소리가 들어찼다.

“청장님, 제발 미리 말씀해 주세요.”

“이제 내 심정을 좀 알겠어?”

“네. 잘 알겠습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두 명의 협회장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신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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