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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422화 (422/500)

422화. 썩기 전에 도려낸다 (2)

나는 복도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섰다.

사실 조금 서둘러서 나온 이유가 있었다.

아까 복도로 쫓겨나자 소리를 지르며 난리치던 엄배홍 반장 때문이었다.

억지로 끌려 나간 것이다 보니 혹시라도 문 앞을 가로막고 난동을 부릴까 봐서였다.

괜히 왔다 갔다 하던 팀원들 붙잡고 난리치면 안 되니까.

그런데 막상 나가 보니 복도는 조용했고 엄배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고함지르던 게 사무실 안에서도 들렸는데?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 다른 과 사무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복도에서 큰 소리가 울리자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듯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옆 과 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우리 팀 사무실이 꽤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문은 또 복도 끝에 있어서 여기서는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여왔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아, 네. 안녕하세요. 혹시 문 앞에서 소리치던 분 못 보셨습니까?”

“어…… 거기 반장님 말씀이시죠? 뭔가 씩씩대면서 가만 안 놔두겠다면서 엘리베이터 타고 어디론가 가던데요.”

뭘 어쩌려는 걸까.

이상한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근데 팀장님,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옆 과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 봐도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호기심은 그 부담감을 이기나 보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 넵.”

직원들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나도 우리 팀에서 있었던 일을 쉬쉬하며 덮을 생각은 없었다.

엄배홍이 다른 과에 헛소리하고 다닌 덕분에 이미 본청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엄배홍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똑같은 짓을 벌이는 놈들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기도 했고, 혹시라도 더 있을지 모르는 피해자들에게 ‘저놈 사기꾼이다’라고 알려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팀 치부라고 해서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내 방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일단 엄배홍이 뭔가 칼을 갈고 있는 것 같으니 나는 그 전에 국세청장을 만나서 해결을 봐야 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국세청장실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에 내려 국세청장실의 육중한 문으로 다가가자마자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목소리라기보다는 고함인데.

아까 들었던 그 잔뜩 분노한 목소리가 이제는 청장실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비서실에서 핏대를 올린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엄배홍이 보였다.

***

조사단 사무실에는 긴장되고 당황한 분위기가 흘렀다.

“잠깐, 이게 무슨 일이에요?”

팀장이 자리를 비우고 2반 반장까지 쫓겨난 이상 유일하게 남은 책임자는 채유림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나섰다.

지금 채유림의 생각에 가장 급선무인 것은 상황 파악이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황민우가 나서서 무미건조한 어투로 설명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무실에는 차가운 분노가 내려앉았다.

“반장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차던 사람도 있었고.

“다 같이 고생했잖아요. 근데 사람이 왜 그렇게 변한 거래요?”

“사람은 잘 안 변해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사정이 조금 나아지니까 욕심이 든 거고.”

함께 야근하며 고생한 사이다 보니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채유림은 차갑게 딱 잘라 말했다.

“아뇨. 이건 팀장님을 얕본 거예요.”

“에이, 누가 팀장님을 얕봐요. 팀장님이 세무서 다니던 시절이면 몰라도 지금은 국장님들도 신 팀장님 만나면 알은척할걸요?”

“능력이나 직위 같은 면에서 얕봤다는 게 아니라 대처능력을 얕본 거라는 뜻이에요. 아까 팀장님도 얘기하셨지만 이렇게 중대한 일을 왜 팀장님한테 보고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진행해요? 우리가 평소 안 하던 짓 할 때 보고 없이 제멋대로 한 적이 있던가요?”

공직 사회에서 직원들 권한 외의 일을 할 때는 무조건 허락을 받고 진행했다.

절차 문제로 크게 사달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건은 절차고 뭐고가 없는 일이지만 보고와 허락이 몸에 배인 공무원이, 특히 반장씩이나 돼서 그랬다는 것은 신재현의 상사로서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가 세력을 불리면 뭘 어쩔 건데요? 파벌을 새로 만드나요? 진짜 순수하게 세력 만들어서 그대로 팀장님한테 바친다고 생각해도 이건 무시한 게 맞아요. 내가 데려왔으니까 너는 무조건 받아야 된다, 이거잖아요.”

채유림은 단숨에 분위기를 정리했다.

쫓겨 나간 반장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긴장이 바짝 들었다.

“사실 우리를 무시한 처사기도 하죠. 그렇게 다 같이 열심히 했으면서 우리 결과물 팔아가지고 한자리 해보겠다고 욕심낸 건데. 세력을 왜 만들었겠어요? 목에 힘 좀 주고 싶었던 거지.”

그렇게 말한 것은 일전에 외압으로 부모님 식당이 문을 닫을 뻔했던 직원이었다.

신재현이 외압 건을 빠르게 해결한 이후로 조사단 내에서 신재현의 편을 드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채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목을 모았다.

“자자, 우리 모두 원래 여기 들어오면서 다들 각오하고 들어온 거였잖아요.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위험할 거 알고 온 거죠? 지금 조사단이 잘나간다고 사실 우리가 잘난 건 아니거든요. 앞으로도 우린 윗분들 심기를 건드릴 테고 또 언제 위기가 올지 몰라요.”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원형은 채유림이 빠르게 수습하고 분위기를 다독이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신재현은 청장실로 올라가면서 내심 걱정했지만, 사실 사무실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견고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항상 초심 잃지 맙시다. 어디든 그래요. 초심을 잃는 순간 끝장인 거예요.”

채유림의 단호한 말에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엄배홍은 내가 비서실 문을 연 것도 모르고 비서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무실에서 쫓겨났다니까요! 이건 부당합니다. 제가 청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너무 흥분하신 상태셔서 안 됩니다. 일단 용건 남겨주시면 청장님께 전달해 드릴게요.”

“당연히 흥분하죠! 비서 선생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겠어요? 이건 팀장의 월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청장님과 만나실 수 없고요, 용건을 남겨주세요.”

“안에 계시는데 왜 못 만난단 말입니까. 제가 청장님한테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아요? 얘기만 하겠다니까요. 청장님이 직접 들으셔야 해요.”

“진정하세요. 더 소리 지르시면 보안요원 부르겠습니다.”

“아이고, 미치겠네!”

한사코 청장실로 들어가겠다는 엄배홍과 앞을 가로막은 비서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비서가 대놓고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려면 비서를 밀쳐내야 한다.

그래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싸움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엄배홍 조사관님!”

내가 소리를 지르자 둘의 말싸움이 순식간에 멎었다.

엄배홍이 돌아보고는 기겁했다.

“어, 어떻게 알고 벌써 온 거야!”

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오기 전에 끝낼 생각이었나 보다.

나는 성큼성큼 청장실 문 앞으로 다가가 비서에게 말했다.

“뭐 하러 고민하십니까. 바로 보안 부르세요.”

“네? 아, 네.”

살았다는 표정의 비서가 후다닥 달려가 전화기를 들었다.

엄배홍은 다급해졌다.

“청장님! 잠깐이면 됩니다.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보안요원이 올라오기 전에 결론을 내려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청장님을 잘 모르시는군요. 차라리 그냥 조용히 돌아가는 게 나았을 텐데.”

“무슨 소립니까!”

엄배홍이 울컥하던 순간, 내 등 뒤에 있던 청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오낙현이 걸어 나왔다.

근엄한 얼굴로 양 문을 열어젖힌 그는 뒷짐을 지고서 비서실 안의 난장판을 스윽 훑었다.

“청장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신재현 팀장이 그 지위를 이용해 멋대로 인사권을 휘두르고……!”

“보안팀은 멀었습니까?”

청장은 엄배홍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배홍이 하던 말도 까먹고 멍하니 되물었다.

“예……?”

이런다니까.

오낙현이 이런 민원을 받아줄 리가 없지.

그는 서울청에 있을 때부터 자신에게 불똥 튈 만한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다.

조사단은 국세청에 설치되어 있지만 엄연히 청와대 직속인데 오낙현이 끼어들 리가 없다.

이윽고, 보안요원이 청장실로 달려 들어와서 엄배홍을 붙잡았다.

엄배홍은 힘을 주며 바닥에 드러누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까 장세훈과 황민우가 데리고 나갈 땐 꽤 힘들어했었는데, 지금은 보안팀에서 번쩍 들어 올려 땅에 발이 끌릴 일도 없었다.

엄배홍이 끌려 나가는 동안 청장은 그때까지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나온 것도 내가 와서 보안팀을 부르라고 하니까 얼굴을 비춘 것 같은데.

아까부터 비서실에서 소리치는 게 다 들렸을 텐데 가만히 있다가 지금 나온 것부터가 수상하다.

그래도 청장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어쩌겠는가.

저번에 함께 시장실 같이 가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청장은 난동이 정리되자 내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방금 나간 저 직원은 조사단 국세청 지부 반장입니다. 징계위원회를 요청하고 싶어서요.”

“……그렇게 해.”

이건 좀 의외였다.

오낙현은 자세한 사정을 묻지도 않고 오케이했다.

이건 날 믿는다는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데.

내가 기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오낙현이 툴툴거렸다.

“어차피 조사단 인원 구성은 전적으로 단장과 부단장 책임이야. 이유가 있으니 징계위를 신청했겠지. 그리고 청와대에서 직통 전화가 왔거든.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청장님께도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감사 인사보다는 민 청장한테 말이나 잘 좀 해줘. 으르렁거리고 지켜보니까 무서워서 못살겠네.”

민치호가 따로 뒤에서 오낙현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둔 모양이다.

그래도 민치호가 웬만하면 가만 놔두는 편인데, 따로 무슨 대화가 있었다는 것은 오낙현이 이상한 짓을 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저번에 시장실 갈 때 전의로 불타올랐던 건가?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설명했다.

자세한 사정까지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청장인데 얘기는 해야지.

“방금 그 직원은 조사단의 후광을 이용해 국세청 내에 세력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꽤 체계적인 조직을요.”

“그 정도는 물밑에서만 한다면 눈감아줘도 되는데. 아, 신 팀장에게 반대한다는 얘긴 아니야.”

……청장님이 왜 이렇게 약하게 나오지?

민치호에게 얼마나 까였길래.

그보다 그 역시 파벌로 싸움질 좀 해본 사람이라 파벌 자체에는 그다지 반감이 없는 듯했다.

그야 사실 파벌이라는 게 아예 없애기는 어렵다.

적당히 눈감아주고 통제하는 게 청장 입장에서는 가장 편할 테니까.

“직계니 뭐니 등급까지 만들어둔 걸 보면 견고한 사조직이라도 만들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 책임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놔둘 수는 없죠.”

“흠, 신 팀장이 철저하게 관리해 주는 거라면 나야 좋지. 그럼 상세 보고서 올려. 바로 징계위 열 테니.”

민치호는 누군가를 시험할 때 그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힘을 쥐여준다고 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의 밑바닥이 이렇게 보이는구나.

조사단의 후광이라고 해봤자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날뛰는 꼴이라니.

“아, 그리고 마침 잘 왔네. 조만간 부르려고 했는데.”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대단한 건 아니고.”

오낙현은 청장실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공문 하나를 가져왔다.

[회계사회 및 세무사회와의 국세청 업무협약식 계획서]

공공기관도 업무협약식을 하는구나.

그러다 문득 이걸 왜 내게 가져오는지 궁금해졌다.

설마……?

“청장님, 저더러 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왜 아니겠어. 갔다 와.”

“……저 혼자요?”

“아니, 나랑 같이 가야지.”

재밌겠다는 표정으로 청장이 씨익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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