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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418화 (418/500)

418화. 꿀에는 벌레가 꼬인다 (5)

눈앞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남자의 말에 김선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놓고 소개를 해달라니.

그에 대한 호감도가 점점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니에요? 자기도 소개해 달라니, 그쪽이 누군지 알고요? 전 오늘 그쪽 처음 봤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번호를 달라고 해도 웃긴 상황에서 뜬금없이 파벌에 넣어달라뇨.”

김선희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김선희의 입장에서 그녀는 이미 스스로 신재현의 파벌에 속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아직 신재현과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지만 말이다.

신재현을 좋게 생각하든 아니면 그냥 대세에 타고 싶은 속물적인 목적 때문이든 이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재현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박원형은 누가 봐도 권력을 탐하는 속물적인 공무원처럼 보였다.

이런 작자가 본청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에 통탄하는 한편, 쉽사리 알려주고 싶지가 않았다.

김선희가 박원형을 보는 눈빛이 점점 경멸을 띠어가자 최서웅은 비웃음을 지었다.

“이야, 국세청 꼬라지 잘 돌아간다. 권력싸움을 벌써부터 하네. 이런 놈들이 들러붙는데 뭐? 신재현이 일을 잘하고 국세청의 미래야? 이런 거 하나도 정리 못 하면서?”

이 말에는 김선희뿐 아니라 박원형 역시 욱했다.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권새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박원형은 깊은숨을 내쉬며 참아냈고 김선희는 도로 따지고 들었다.

“아직 어리고 세력도 다듬어지기 전이잖아요. 원래 처음에는 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거라고요. 과도기에 혼란이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때만 지나면 국세청은 더 안정적인 시기가 올 텐데.”

“제가 보기엔 더 혼란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요? 이게 정말 신재현이 원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점점 더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하네요.”

“최 조사관님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이죠? 이미 판은 그렇게 짜이고 있는데.”

“상대가 없잖아요, 상대가. 지금 청장님 세대를 예로 들어 봅시다. 세 명이 서로를 상대하기 위해 점점 세를 부풀리다 보니 파벌이 생긴 거죠? 그래서 국세청장 자리를 두고 서로 싸운 것 아닙니까. 근데 지금 신재현은 누구랑 싸우는데요. 국세청에 지금 그를 상대할 사람이 있긴 해요? 김 조사관님 말대로 이미 대세인데.”

“외부의 적이 있나 보죠! 우리는 그다지 정보가 없잖아요. 윗선이랑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니까 나름 뭔가 정보를 얻지 않았겠어요? 우리가 섣불리 판단할 필요가 없단 뜻이에요.”

박원형을 내버려 두고 다시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이성을 되찾았는지 분위기가 잔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시간도 끝나가는지라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히 다른 직원들도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을 따라 카페를 나섰다.

“최 조사관님 말도 이상해요. 이런 거 하나 정리 못 하다뇨.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신재현이 뭐, 빅 브라더에요? 국세청 모든 직원 감시하다가 글러먹었다 싶으면 인사 불이익 주나?”

“아니, 그렇게 받아들이니까 제가 진짜 이상한 사람 된 것 같네요. 어찌 되었건 신재현 때문에 지금 안 일어나도 되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건 맞잖아요. 저런 놈도 잘났다고 나서는데.”

앞서 가던 두 남녀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김선희와 최서웅 둘 다 입장은 반대였지만 단 한 가지에 대해서만은 같은 의견인 듯했다.

‘저런 놈은 절대 파벌에 들어가면 안 돼!’

‘저놈 받아들이면 진짜 나는 신재현 안티로 돌아선다. 없는 파벌이 생기는 거야.’

저 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원형은 깊은 고민에 빠져 둘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 박원형을 관찰하던 권새호가 은근슬쩍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한번 지방 가더니 사람이 바뀌어서 온 것 같아요. 정말로 권력에 물든 겁니까?”

그런 사건이 있었으니 사람이 회까닥할 만도 하다.

어쩌면 ‘이 세상은 역시 권력이 있어야 한다’며 사고방식을 바꿨을 수도 있다.

거물집 도련님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지방 발령이 난 건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만한 사건을 겪었으니 눈에는 눈, 권력에는 권력.

상대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그만한 힘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환경 아닌가.

그리고 정말 그런 이유로 자신의 동기가 힘을 추구하게 된 거라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비록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 번쯤은 말려도 되지 않을까.

권새호가 말을 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기는 움찔하며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마치 숨겼던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어? 진짜예요? 반응이 너무 수상한데.”

동기가 당황한 기색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자 권새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락없이 정곡을 찔린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마요.”

권새호는 우러나온 진심으로 동기를 말렸다.

“어떤 심정이신지는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권력이 해답인 건 아니에요. 가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본청으로 돌아오신 걸 보면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으신 건데 여기서 선택을 그르치면 안 돼요.”

권새호는 아직도 동기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대충 통칭으로 불렀다.

직책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세무공무원이 불리는 통칭은 보통 조사관이다.

“조사관님이 몇 년 전 하신 일 때문에 어리석다고 비웃는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어요. 저만 해도…….”

권새호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랬다.

현실이 그런 걸 누굴 붙잡고 원망하겠는가.

“조사관님의 행동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동기라서가 아니고, 국세 공무원으로서 타당하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건 안타까웠지만 신재현보다 오히려 조사관님이 더 제게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아까 카페에서 조사관님이 누군지 알았을 때는 기뻤어요. 역시 하늘은 정의를 버리지 않는구나. 본청으로 승진하셨구나. 근데 지금 하시는 행동은 실망입니다.”

권새호의 말이 이어질수록 동기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슨 잔소리인가 얼른 김선희를 붙잡아야 하는데, 하는 다급한 표정이었는데.

동기라는 언급이 나오자 이제야 알아챈 듯 권새호를 주의 깊게 뜯어보다가 혼자서 아, 하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지금은 김선희보다 권새호가 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제 동기세요?”

박원형이 되묻자 권새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응원하던 입장이었고, 동기라서 오지랖 좀 부려보는 겁니다. 뭘 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떳떳하지 않은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마세요. 예전 일 때문이라면 차라리 조사단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진심이 담긴 충고였다.

박원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권새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박원형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알아내야 합니다.”

“뭘요?”

“김선희 조사관님을 파벌로 끌어들인 사람이요. 분명히 조사단 사람일거예요.”

박원형으로서는 권새호의 진심에 못 이겨 솔직히 말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은 직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앞서가던 김선희와 대화를 나누던 최서웅도 기묘한 눈빛을 보냈다.

“얼척이 없구만. 이렇게 뻔뻔한 놈은 또 처음일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꼭 파벌에 들어가고 싶다는 겁니까? 당신 대체 어느 과예요? 거기 과장님이 당신 이러고 다니는 거 알고는 있어요?”

스스로 신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박원형이 어물거리자 그를 향한 경계의 눈빛이 강해졌다.

최서웅이 그를 다그쳤다.

“목적은 말 안 해도 됩니다. 그런 저급한 얘기는 내 알 바도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근데 이건 말해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디 과예요? 개인납세국? 법인납세국? 설마 조사국은 아니죠?”

“어, 저는…….”

“국세청 직원은 맞죠?”

박원형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권새호가 말렸다.

어쩌면 과거 좋게 봤던 동기에 대한 마지막 정일지도 모른다.

“직원 맞으니까 본청에 있었겠죠. 어느 과인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어? 권새호 조사관님이 편을 드시네.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까진 아닙니다. 소문만 들었던…….”

“소문이요? 대체 무슨 소문?”

김선희의 재촉에 박원형이 당황하며 말리려 했지만 권새호가 그보다 빨랐다.

“몇 년 전에 서울권 어디 세무서에서 좀 높으신 분 아들을 세무조사 했다가 지방으로 발령 난 사람 있잖습니까.”

최서웅이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그 공무원? 젊다고 들었는데 설마……!”

김선희도 놀란 얼굴을 했다.

아까의 경멸 어린 눈빛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어머! 요즘 세상에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이 사람이라고요?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김선희의 눈초리가 다시 가늘어졌다.

“그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고요……?”

직원들의 의심 가득한 표정과 함께 어느새 국세청 앞에 도착했다.

입구를 통과하려면 각자 공무원증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원형이 주섬주섬 공무원증을 꺼내자마자 최서웅이 공무원증을 냅다 낚아챘다.

“조사관님, 이건 아니죠. 돌려주세요.”

“어디 보자. 성함이 박원형 조사관님?”

공무원증에는 이름과 사진, 그리고 발행청인 국세청이 적혀 있었다.

최서웅은 취조하듯 박원형을 몰아세웠다.

“당신 진짜 뭡니까? 뭐 하는 사람이에요?”

박원형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본청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그 이상 뭘 알고 싶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권새호가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혹시 감사실이에요? 요즘 국세청 혼란스러우니까 조사해 오라고?”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나가요?”

“그야 원칙대로 하다가 불이익당했던 곧은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보다는 그게 더 가능성 있으니까 하는 얘기죠.”

“에이, 그건 아니에요. 사람이 복수에 눈이 뒤집히면 완전 나쁘게 변할 수도 있다고요.”

여럿이 개찰구 근처에 서서 한 사람을 추궁하기 시작하자 로비에 오가는 직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더군다나 지금은 점심시간 막바지였다.

밖에 있는 식당이나 카페에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은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티격태격하자 뭐하는 짓인가 불쾌한 눈빛을 보냈다.

“말씀하셔야 들어갑니다, 조사관님.”

“뭘 말하라는 겁니까.”

“어느 과인지 말씀하시라고요. 왜 말을 못 하시지? 제가 거기 과장님한테 인사고과 얘기할까 봐 그렇습니까?”

“아이고, 미치겠네. 공무원증 그냥 돌려주세요. 애들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데 민망하지 않아요?”

“저는 낯짝이 두꺼워서 괜찮은데요? 조사관님이 민망하시면 얼른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최 조사관님, 지금 진짜로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거든요. 얼른 주세요. 저 진짜 팀장님한테 혼나요.”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 다급해진 것은 박원형이었다.

그의 난감한 얼굴을 본 김선희와 권새호가 최서웅을 말렸다.

“장난 그만치시고 돌려주세요. 다들 쳐다보잖아요. 우리도 들어가야 하는데. 궁금한 거 있으시면 이따 퇴근하고 만나서 물어보시든가 하세요.”

“그것도 어느 과인지 알아야 물어보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과만 말하면 되는데!”

“과가 뭐가 중요해요. 같은 청에서 근무하니까 언젠가는 만나겠지.”

박원형이 급히 제안했다.

“이따 6시 10분에 여기서 보시죠. 김선희 조사관님이랑 최서웅 조사관님이 나와주시면 이따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왜 자꾸 저를 끌어들여요?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개 안 시켜 드릴 거예요. 저쪽 파벌에서도 박 조사관님은 안 받아줄 것 같은데요.”

김선희는 끝까지 사양했지만 박원형은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 나오시면 제가 어느 과인지,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두 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라니까요?”

최서웅이 미심쩍게 물었고 박원형은 주위를 가리켜 보였다.

길을 막고 있을 수 없어 옆으로 비켜 서 있었지만 이미 수많은 직원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아이고,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요? 그냥 이따 셋이서 조용히 보시죠. 다들 들으라고 떠벌리기엔 좀 부끄러운 이유라서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의심 가네요. 이젠 이유가 정말 궁금해지는데.”

박원형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최서웅이 한 팔을 잡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박원형 조사관님!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공무원증 잃어버리셨나? 그거 잃어버리면 사유서 써야 되는데. 임시증이라도 발급받…….”

가까이 다가오던 30대 남자가 분위기를 보더니 멈칫했다.

뭔가 사건이 터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어, 어어?”

남자를 본 법령해석과의 직원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신재현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본청의 직원들이라면 다들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 장세훈 조사관님이 왜……?”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장세훈이 박원형에게 눈짓했다.

박원형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뒤이어 권새호가 로비 너머를 보더니 숨을 들이켰다.

“조사단이다……!”

막 국세청의 정문을 열고 들어오던 한 무리의 직원들은 바로 신재현과 그의 측근이라 평가받는 서울청 시절 옛 팀원들이었다.

신재현은 개찰구 쪽에 모여 있는 직원들을 훑다가 박원형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근데 뭐 하세요? 우리 슬슬 들어가야 하는데.”

해맑게 인사하는 신재현을 보며 박원형은 이마를 짚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로 하고 몰래 김선희만 불러다 물어보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는 사이예요?”

최서웅과 김선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권새호가 조심스럽게 동기, 박원형에게 말을 걸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신재현이었다.

“우리 단원인데요. 박원형 조사관님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럼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로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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