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11화 (411/500)

411화. 개봉박두, 단두대 매치 (2)

국세청장 오낙현은 사실 얼굴마담이었다.

꼭 올 필요는 없었다.

혼자서 국회도 잘 다녔는데 시장을 상대한다고 내가 눈썹 하나 꿈쩍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상황이다니 민치호가 일부러 붙여주었다.

-미리 말씀드려 놨으니 모시고 가세요. 증거 없이 폭로 같은 거나 하는 사람입니다. 그냥 가면 위계를 빌미로 입을 막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나도 대답했다.

-시장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보다 직급 높다고 봐드릴 생각은 없는데요.

-압니다. 우리 오낙현 청장님이 청장 이름값이라도 하시게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국세청의 수장이 직접 방문하면 시장도 헛소리는 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오낙현 청장님도 할 때는 하잖아요. 지금이 바로 청장님이 나서실 때입니다.

국세청장이다 보니 말은 가려서 했지만 한마디로 이 뜻이었다.

내가 문전박대당하는 걸 막기 위해 민치호가 붙여준 ‘프리패스 통행권’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오낙현은 날 보더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민치호랑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면 나 때문에 일부러 서울까지 행차하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오낙현은 오낙현이었다.

“저, 시장님은 자리에 안 계시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면…….”

“그래요? 댁에 전화드렸을 때는 출근하셨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는데요.”

원래부터 기분이 나빠 보이긴 했지만 비서에게 컷 당하자 더 표정이 구겨졌다.

비서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시장이 시키는 대로 했겠지.

하지만 오낙현은 순순히 예, 하고 돌아갈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가차없이 따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면 시장 업무를 보실 시간이 아닙니까. 아니면 뭡니까? 급한 시정 활동이라도 생겼다는 소리예요? 어딥니까? 지금 여기서 직접 시장님께 전화드리고 일정 확인해 주세요. 계신 곳으로 저희가 찾아갈 테니까.”

“그, 지금 어디 계신지는…….”

청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쳐들어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비서는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시장님이 업무를 내팽개치고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일부러 찌르는 듯 말하는 것도 여전하다.

시장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분명히 시장의 자질을 운운할 테니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서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자 나는 슬쩍 다가가 귀띔했다.

“오늘 돌아간다고 이걸로 끝이겠어요? 얼마나 더 귀찮아질지 상상도 안 가는데요. 시청에서 문전박대당한 국세청장. 기사가 어떻게 날까요?”

나는 바로 뒤에서 밀착 취재 중인 카메라를 가리켰다.

나학진에게 부탁했을 때는 그가 들고 다니던 전문가용 카메라 정도를 생각했는데, 어깨에 메는 카메라를 갖고 올 줄은 몰랐다.

본격적이었다.

그리고 카메라의 위압적인 크기는 비서에게도 효과적이었다.

“안에 계시는 거 다 아니까 그냥 열어주세요.”

고민하는 비서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살 길을 열어주었다.

비서는 못 이기는 척 내선 전화를 눌렀다.

“저, 시장님…….”

역시 안에 있었군.

누군가가 열어주기에 앞서 내가 먼저 문으로 다가갔다.

이젠 아무도 막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시장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았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네가 왜 쳐들어와?’라는 얼굴이다.

그 앞에는 보좌관인지 비서인지 보고서를 앞에 둔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도 뻣뻣하게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장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나, 그 뒤에서 짐짓 여유롭고 근엄하게 들어서는 오낙현.

그리고 대포처럼 거대한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들어오는 카메라맨까지.

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원래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자신만의 성채를 침범받을 때 당혹스러워하는 법이다.

틈을 찌른다고 할까.

청장에 카메라까지.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는 상황에 시장이 아무 말 못하고 굳었다.

“시장님이 저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오늘은 직접 해명을 하러 왔습니다.”

“그럼 대체 청장은 왜…….”

시장이 말을 더듬었다.

“청장님은 저와 다른 볼일입니다. 발표 나지 않았나요? 직접 항의하러 방문하시겠다고 했는데요.”

시장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니야, 대체 왜…….”

어차피 남의 사무실에 쳐들어온 상황이겠다, 나는 그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천천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장을 소파로 안내했다.

“앉으시죠, 청장님.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러죠. 시장님도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와서 나가란 말씀은 안 하시겠죠? 오늘도 안 계신다고 해서 못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뵙기가 어려우니 어쩌겠습니까. 실례인 줄은 알지만 오늘 꼭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와, 잘한다!

듣기만 해도 약이 오른다.

오낙현의 공세에 정신을 못 차리던 시장이 얼떨결에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카메라맨은 절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예 받침대를 세우더니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시장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장에라도 쫓아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 보였다.

이미 국세청장이 기자회견까지 하고 왔기 때문에, 시장 집무실까지 들어온 지금 쫓아내면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아진다.

카메라가 찍고 있으니 자료화면도 충분하고.

그렇게 이미지를 망칠 것이냐, 차라리 용건을 듣고 돌려보낼 것이냐.

갈등이 꽤 많아 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돌려보내는 게 나을 거다.

하지만 오낙현이 가만 놔둘 리가 없지.

시장이 생각을 끝내기 전에 오낙현이 선수를 쳤다.

“시장님,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안에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시다니요. 그렇게 제가 보기 싫으셨습니까?”

대놓고 싸우자는 식이네.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걸 보니 오낙현의 기분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집에 우환이 있나?

하지만 지금은 꽤 도움이 되었다.

국세청장이 작정하고 물어뜯자 시장도 당황했다.

“그럴 리가요. 지금은 외부 접촉을 삼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명색이 폭로자인데 그 당사자를 만나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청장님도 이렇게 찾아오실 일이 아닌데요. 제 식구 감싸기처럼 보일 수 있어요.”

시장은 끈덕졌다.

당황하면서도 어떻게든 받아치는 것이 역시 경력인가 보다.

물론 우리 청장님도 강하다.

“청장이 직원을 감싸지 그럼 누굴 감쌉니까?”

“허어, 그런 태도가 직원의 방종을 부르는 겁니다. 국세청은 국민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직원을 위한다는 뜻이죠?”

몰아가기도 수준급이다.

토론회에서 보긴 했지만 직접 당해보니 더 열받는다.

사람을 살살 긁어서 약 올리고 흥분하게 해서 실수를 유도하는 식이었다.

화가 많은 몇 년 전의 나라면 여기서 말려들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참을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이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보좌관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 것이 보였다.

‘이걸 참네?’라는 눈빛이다.

오낙현도 냉철하게 받아쳤다.

“그럼 시장님은 억울하게 피해 보는 직원을 내치는 사람이신가 봅니다. 그야 시장님의 운영 방침이나 제가 왈가왈부할 바는 아닙니다만 저는 국세청의 직원이 억울한 취급을 받으면 나서서 해명할 거라서요. 청장이 잘잘못을 가려서 빨리 대처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직원의 허물을 알면서도 덮어주시겠다?”

“허물이 있다고요? 하!”

오낙현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누가 그랬습니까? 대체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저희가 공무원이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명예훼손에 무고죄로 당장 고소했을 겁니다. 저희는 공무원이고 시장님은 선출직이시니 참는 것뿐입니다.”

시장만 아니었으면 뒈졌을 거라는 살벌한 경고였다.

시장이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오낙현은 말도 꺼내지 못하게 막았다.

“아, 기다리세요. 저는 지금 할 말이 매우 많거든요. 허물이라 하셨죠? 대체 무슨 허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이미 저희 국세청 쪽에서는 자체적으로 조사가 끝났습니다.”

“……뭐가 벌써 끝나요? 대충 하신 것 아닙니까. 면죄부 주려고.”

“국세청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세요? 제가 직접 국세청과 제 이름을 걸고 나왔습니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이번엔 시장이 욱했다.

“그럼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저 역시 시장으로서 이름과 명예를 걸고 한 기자회견입니다!”

“저는 진실만 말하고 있으니 시장님이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거겠군요.”

“이보세요, 청장님!”

“그럼 마침 잘됐습니다. 여기 카메라도 있고 하니,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밝혀보죠. 괜찮으시죠?”

드디어 판을 깔았다!

뒤늦게 오낙현의 의도대로 끌려간 것임을 눈치챈 시장이 아차 했다.

시장의 등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이 아아, 하고 탄식했고 오낙현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어디 증거를 말씀해 보시죠. 증인이라도 괜찮습니다.”

“익명의 제보입니다. 제보자는 절 믿고 사실을 말한 겁니다. 저는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국세청에서 시장인 제게도 이렇게 압력을 행사하시는데 제보자 개인이 나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허허, 압력이요? 제가 보기엔 시장님께서 저희 국세청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래, 제보자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방송국에 검증을 맡기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에게는 신원을 밝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송국도 제보자 취재 많이 하잖습니까. 정보원을 보호하는 건 일도 아니죠. 어때요, 감독님?”

오낙현이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감독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아주 객관적으로 잘 취재해 주실 것 같은데요.”

거절할 테면 해봐라.

오낙현은 서서히 시장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가 우물거리는 사이 오낙현은 쉴 틈도 없이 공세를 퍼부었다.

“그래서 오늘은 미리 저희가 확보한 증거를 보여 드릴까 합니다. 시장님의 단순 오해라면 사과만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자, 감독님. 갖고 계신 거 보여주시죠.”

감독은 카메라를 그대로 둔 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영상을 틀었다.

-아, 신재현 잘 알죠. 아니, 유명해지기 전부터 잘 알았다고요. 저 같은 반이었고 걔 앞자리 앉았었어요. 신재현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그 반마다 있는 조용히 공부하는 애 있잖아요. 학폭이요? 푸흐흡. 대체 왜 그런 말이 나왔지?

내 앞자리? 아, 걔구나.

별로 친하지 않아서 졸업하고 한 번도 못 봤는데 인터뷰를 했네.

어떻게 변했는지 나중에 영상 한 번 봐야겠다.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멈추고 이번엔 다른 친구의 목소리가 나왔다.

-시장님이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누가 나쁘다고 말했는지는 알 것 같아요. 다른 친구 괴롭히다가 재현이한테 혼쭐 난 놈이 있었거든요. 걔가 앙심 품고 한 것 같은데요. 아, 걔도 이 영상 보려나? 뭐, 어때. 이제 다들 어른인데.

영상이 끊겼다.

카메라 감독은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정중하게 말했다.

“해당 학교의 졸업앨범을 입수해서 졸업자들을 찾아 일일이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현재 16명 인터뷰 성공했고 일주일 내에 50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시장이 카메라 감독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언론이 한쪽의 편을 드는 겁니까?”

평소라면 방송국에서 한쪽의 누명을 적극적으로 벗겨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걸로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카메라 감독은 당당하게 말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저희 언론의 사명이자 역할입니다. 취재하는 게 문제라는 말씀이십니까?”

감독도 꽤 하네.

원래 불리한 판이긴 했지만 시장이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카메라 감독은 도로 카메라 뒤로 돌아갔고 오낙현은 말을 이었다.

“나머지 두 의혹도 저희 쪽에서는 검증이 끝났습니다. 이미 양다리인가 뭔가 하는 건 용산 세무서 다녔던 직원이 먼저 나섰던 걸로 아는데요.”

“그건 저한테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폭로한 게 아니니까요.”

아, 명목상은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그렇다고 치자.

“그래요? 그럼 이제 시장님의 사과를 받을 일만 남았네요.”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합니까!”

오낙현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학폭 폭로하신 건 시장님이니까요.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무작정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국세청, 그리고 당사자에게 사과 정도는 해주셔야죠. 아, 방송국에서 제보자 검증을 한 후에 하실 겁니까? 그럼 기자회견 기다리겠습니다. 국세청장인 제게 국세 가족의 명예와 국민의 신뢰는 중요하니까요. 그럼 제 볼일은 됐고.”

오낙현이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기가 할 만큼 해줬으니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런 눈빛이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때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문 한 장을 꺼냈다.

“뭡니까?”

시장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청장님도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모시고 같이 오긴 했습니다만 원래 제 용건은 이겁니다. 2주 전에 세무조사 통지서 받으셨죠? 오늘부터 본격적인 조사 시작일이라서요.”

어, 설마? 하는 얼굴로 시장이 굳었다.

카메라에 나, 그리고 세무조사.

어디선가 본 광경이 아닌가.

나도 2주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기억나는데 시장은 과연 어떨까?

[1,087,683,210]

습관적으로 시선을 올렸다 내린 나는 전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온 김에 여쭐 것이 있어서요. 막상 들으시면 별거 없을 겁니다.”

생방송에서 정상훈을 쥐 잡듯 잡기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자, 시장이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남을 죽이려고 할 때는 본인도 죽을 생각을 하셔야지.

나는 오늘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청장은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리를 꼬고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서류 가방을 열고 종이 뭉치를 꺼냈다.

너 죽고 나 살자,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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