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무덤을 파네 (4)
서울시장이 착각한 것이 여럿 있었다.
가장 먼저 그가 크게 착각한 것은 정상훈이 대선 주자일 거라 생각했던 점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지지율도 높고 나오면 당선될 거란 예측이 많은데, 상식적인 판단이라면 당연히 대선에 도전해 볼 만하다.
만약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얻은 지지율에 따라 신당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새싹이니 대선에서 10%만 나와줘도 제1야당의 대표이자 유력한 차세대 대선 주자로서 5년을 버틸 수 있다.
다음 대선을 노려볼 수도 있고.
서울시장도, 함께 토론회에 참석한 후보들도, 하물며 방청객과 이 토론회를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정상훈이 대선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 했다.
그 누가 대통령 자리를 마다하겠는가.
“저는 정 대표님의 능력이 의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장은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정상훈이 대선에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히게 되면 밤에 이불을 꽤 많이 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정상훈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이 공격을 받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차피 경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예비 후보에 불과하다.
그런데 진짜 후보랍시고 황인영이 나타나면 마치 신당이 그를 내정하고 밀어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예비 후보라면 아무나 참가해서 토론하는 자유로운 자리여야 했다.
만약 황인영이 눈에 띄면 시장은 옳다구나 하고 그를 공격할 테고,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황인영은 시작도 못 하고 고꾸라질 게 뻔했다.
그러니 신당의 대표로서 정상훈은 진짜 대선 후보인 황인영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 역할을 해줌과 동시에, 시장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크게 반발해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수록 시장이 말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계획이었을 텐데…….
어째 시장의 자기 PR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는 정계에 입문한 후로 수많은 민생 법안을 통과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장으로서 1천만 인구가 사는 이 도시를 맡아 경영해 왔습니다. 제 능력은 이미 서울에 사는 시민분들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시장을 맡은 동안 하천을 정비하고 쉼터를 마련해 삶의 질을 챙기며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 정책을 실행해 왔습니다. 한마디로 검증이 되었다는 뜻이죠.”
정치인은 원래 뻔뻔해야 하는 건가.
시장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당당하게 자기 얼굴에 금칠을 했다.
보고 있는 내가 손발이 간지러웠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석한 다른 후보들도 각자 경력을 어필하는 걸 보니 원래 저렇게 하는 건가 보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것은 정상훈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라는 뜻은 반대로 말하면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는 뜻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대표님은 어떻습니까? 물론 국세청장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건 직원들을 데리고 국세청을 경영했다기보다는 공무원으로서 본분을 다한 것에 가깝죠. 국세청장으로 재임하면서 이룬 업적이 뭐가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정상훈은 그래도 밀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생각보다 과한 공세에도 침착하게 방어했다.
지금만 해도 체납징세과를 신설하여 고액체납자의 체납세액을 징수했다는 성과를 설명하고 있었다.
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실적을 폄하했다.
“정 대표님이 국세청장으로 재직하신 동안 특출나게 징세액이 많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사를 해왔어요. 사실 정 대표님이 임기로 있는 동안에 세법 개정으로 종부세와 소득세, 법인세가 전체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니 징세액이 늘어난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국세청과 세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럴듯했다.
헛소리를 저렇게 논리적으로 하는 것도 참 능력이다.
시장이 하는 말은 이거다.
정상훈이 국세청장으로 부임하고 나서 국세가 더 걷히긴 했는데, 그건 청장이 잘해서가 아니라 세법이 바뀌어서 국민이 세금을 더 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저렇게 말하면 안 된다.
같은 세법이라도 어느 해는 더 걷히고 어느 해는 세수가 줄어들기도 한다.
경제 상황이 매년 바뀔 뿐더러, 저 국세 수입에는 관세도 포함되어 있어 그걸 분리하고 국세청 관할인 국세만 따로 얘기해야 한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려면 ‘작년 경제가 조금 나빠서 납부할 세액 자체는 줄었으나, 체납징세과의 활약으로 고액체납자의 납부세액이 늘면서 전년 대비 몇 퍼센트가 늘었다’라고 해야 한다.
어찌 되었건 체납세액을 받아낸 건 국세청장 시절의 실적이니까.
그런데 과연 서울시장이 몰라서 저렇게 말했을까?
아마 아닐 거다.
알면서도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약간의 사실을 바탕으로 거짓말을 섞으니 저걸 정확하게 바로잡으려면 훨씬 큰 노력이 필요했다.
당장 정상훈이 자세히 설명하고는 있지만, 방청객 표정만 봐도 그 설명이 와닿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정상훈의 설명이 전문적이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다.
너무 세세한 내부 사정이었기 때문에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야, 잘 몰아붙이시네. 시장님, 대단하시네요.”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너무 남의 일처럼 구경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전 청장님이신데.”
황민우가 조금 신경 쓰였나 보다.
답답한 얼굴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동정을 차갑게 일축했다.
“이 정도는 헤치고 나오셔야죠. 명색이 제1야당 대표신데. 그리고 곧 시장님은 나락 가실 것 아닙니까. 제가 그 정도 해드릴 건데 지금 이 순간은 열심히 버텨주셔야죠. 안 그러면 날로 먹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대표의 권위는 본인이 세워야 하는 겁니다.”
나도 시장을 본받아서 조금 아는 척을 해봤다.
황민우가 ‘오’ 하고 놀란 척을 해 줬고 나학진은…….
정말로 놀란 것 같다.
그는 멍하니 화면과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더니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스튜디오의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대기실과 스튜디오가 이어진 쪽문입니다. 원래라면 스튜디오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지만 지금은 카메라와 방청객, 스태프에 가려져 있어서 들어가도 모를 겁니다. 이쪽에 스태프들이 서 있을 거예요. 여기 섞여 계시면 모를 겁니다.”
나중에 필요한 정보다.
나는 눈으로 꼼꼼히 훑어 두었다.
그사이 스튜디오에서는 사회자가 과열된 분위기를 중재하고 있었다.
다른 후보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정상훈과 시장, 둘만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발언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자는 둘의 말싸움을 중간에서 멈추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공약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준비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진짜 대선 후보인 것도 아니고 경선조차 치르지 못한 예비 후보인 데다 아직 이르다.
공약의 체계조차 잡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대부분의 후보들은 ‘민생을 위하겠다, 약자를 보살피겠다’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 댔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 도장이나 찍으러 나온 듯했다.
과연 방청객 중에도 실망과 답답함의 기색이 스쳤다.
반면 서울시장은 미리 준비해 온 게 많았는지 자신만만하게 공약을 술술 풀어냈다.
준비해 온 자료를 보면서 구체적으로 숫자를 들먹이며 예산을 짜서 보여주기도 했다.
역시 선거를 몇 번 겪어본 사람은 달랐다.
그의 논리정연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방청석의 호감도가 시장 쪽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은 황인영의 차례였다.
“토론회까지의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에 전문가의 정확한 자문은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후에 좀 더 보완을 할 예정이니 지금은 방향성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황인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비교적 또박또박하게 운을 떼었다.
저 옆에서 자신의 당 대표와 시장이 어떤 말로 싸우든 신경도 쓰지 않았던 황인영이다.
그는 시장처럼 노련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하게 하나둘 꺼내는 공약에서는 깊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다른 후보들과는 다르게 구체적인 숫자와 예산 조달 방법도 곁들였다.
말로만 하는 공약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증거였다.
다만 그가 말했듯 전문가의 자문은 받지 못한 상태라 군데군데 구멍은 보였다.
시장은 공격할 빌미를 찾았다고 화색이 감돌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저 정도면 훌륭하다.
왜냐하면 주위에 여러 전문가와 보좌진이 붙어 있는 시장과 달리 황인영은 혼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부족한 면은 보였지만 그에게도 조금씩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기다리길 잘했다.
타이밍을 내게 맡긴다고 했을 때부터 나는 황인영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내가 나가 버리면 그 후에는 후보들이 무슨 말을 하든 묻혀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전에 어필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물론 끝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아니었다.
중간에 기회를 잡는 건 황인영 본인이 해야 할 일이다.
시간은 충분히 줬고, 그러고도 어필하지 못한다면 그냥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인영은 자신의 역할을 해 냈다.
“이제 슬슬 가볼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렇다면 이제는 내 차례다.
***
시장은 쾌재를 불렀다.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단연 자신이었다.
대선까지의 레일에서 가장 큰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정상훈은 막상 대결을 해보니 별것 없었다.
‘고위 공무원이라는 게 사실 그렇지.’
국세청에서야 가장 높은 직급이었으니 감히 누가 자신의 말을 막는다는 건 생각도 못 해봤을 것이다.
고공단으로 승진하고 오랜 기간 윗자리에서 일해본 공무원은 특징이 있다.
머리가 딱딱하게 굳는 건 둘째 치고, 주위에 다 부하 직원밖에 없다 보니 이런 난상토론에 익숙하지 않다.
지금까지 고위공무원 일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는 케이스는 몇 번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초반에 이런 네거티브 공격과 돌려 까기를 힘들어 했다.
정상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시장의 공격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막은 적이 없었다.
시장이 조금 틀린 정보를 섞어 ‘그럴듯한 논리’를 펼치면 정상훈은 참지 못하고 정보를 정정하느라 바빴다.
결국 이 자리는 시장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이럴 거면 왜 토론회를 하자고 한 거야?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시장은 여유로운 얼굴로 피식 웃었다.
정상훈의 유능한 이미지는 자신이 거의 다 벗겨놓았다.
대선이야 꽤 많이 남았지만 이제 앞으로 자신의 앞길을 막을 경쟁자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신재현에 대한 것은 이미 걱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를테면 정상훈을 방패로 삼아 신재현의 발목을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같은 편인 전 청장을 공격할 리는 없고, 청장은 건드리지 않은 채 콕 집어 조사할 수는 없다.
‘둘이 편 짜고 정계를 개편해 보려는 속셈인가 본데, 이 판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자기가 먼저 하자고 한 토론회니까 끝까지 가 봅시다.’
이 토론회가 끝나면 둘 중 하나는 아마 무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바로 정상훈이 되겠지.
시장은 쾌재를 부르며 다른 후보들의 공약을 들었다.
역시 다 별 볼 일 없는 허섭쓰레기에 불과했다.
개중에 조금 열심히 준비해서 나온 놈이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 토론회는 내 승리다.’
시장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이었다.
그의 예민한 감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시작은 사회자였다.
사회자가 귀에 꽂고 있던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더니 미세하게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생방송으로 나가지는 않지만 사회자와 스튜디오에 고정해 두고 있는 카메라였다.
그다음으로는 카메라 하나가 스튜디오의 빈 공간으로 향했다.
처음엔 스튜디오 전체를 조망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계속 빈 곳만 찍고 있었다.
‘여기서 뭐가 더 나올 수가 없는데?’
그의 감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으나 이성적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게 없었다.
마침 후보들의 공약 설명이 끝났다.
‘아차, 생방송인데 한눈팔면 큰일 나지.’
다시 찾아온 발언 기회에 시장이 정신을 집중하고 정상훈을 공격하려는 순간이었다.
모여 있는 스태프들을 헤치고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스태프인가?’
이게 녹화방송이라면 잠시 끊어서 갈 수도 있지만, 생방송이다.
스태프가 스튜디오로 다가오는 것 자체가 방송사고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방청객 사이에서 웅성거리며 경악의 비명이 짧게 스치고, 둔감한 다른 후보들도 이상함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명 아래로 그가 나오는 순간, 시장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쟤가 왜 여기서 나와!’
대선 후보 토론회에 국세청 공무원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신재현은 스튜디오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서더니 시장을 향해 말했다.
“정상훈 대표님의 검증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가 도와드릴까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요.”
이게 뭔 개소리야?
시장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힘겹게 억눌렀다.
‘뭐야,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불안함은 점점 더 커져갔다.
신재현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세무조사라는 게 어떤 건지 가볍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뭘 하겠다고?
느닷없이 벌어진 단두대 매치에 시장은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