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무덤을 파네 (3)
“흐흠. 흐흐흠.”
나학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신재현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카메라를 들고 함께 탈세범을 쫓아 달리기도 하고, 현장을 찍기도 하고, 그가 목표로 하는 곳을 취재해 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나학진이 먼저 연락하는 일조차 없었다.
서로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둘 다 흔히 김영란 법이라 불리는 청탁금지법에 해당되는 직업인 것이다.
신재현이 세무서의 7급일 때, 그리고 나학진이 이름 없는 삼류 인터넷 신문 기자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나쁜 놈 뒤를 쫓아다녔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국세청의 차세대 핵심 인사와 국세청 전문 취재 기자가 한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친한 친구도 서로 환경이 달라지면 연락이 뜸해지는 법이다.
하물며 신재현과 나학진의 관계는 친구가 아니었다.
신재현은 나학진을 좋은 조력자이자 참 언론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학진은 조금 달랐다.
처음 봤을 때부터 탈세범의 집에 쳐들어가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환희를 느꼈다.
그를 쫓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도록 따라다니며 당시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느낀 환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검사며 국세청의 지원을 받은 지금의 신재현이 아니라, 1년 차의 파릇파릇한 신입 공무원이 말이다.
나학진은 그때부터 신재현에게 꽂혔다.
될 놈은 떡잎부터 남다르다고 하던가.
나학진의 눈에 보이는 신재현은 정말 그랬다.
아무리 어려운 상대라도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끝까지 조사해 잡아냈다.
물론 그것이 국세청에서 알게 모르게 지원해 줬기에 가능한 것임을 안다.
그러나 어디 지원만으로 되는 일이던가.
신재현은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점점 그가 손대는 영역은 넓어졌고 의혹에는 실력으로 증명했다.
지금의 나학진은 말하자면 팬에 가까웠다.
막연히 TV 너머의 아이돌처럼 단편적인 모습만 접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취재하고 발자취를 따라다니는 밀접한 팬 말이다.
동경에 나이는 상관없다.
그래서 나학진은 굳이 신재현과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 지금이 딱 맞다고 생각했다.
공무원과 언론인, 서로 정보원으로서의 관계면 족하다.
신재현은 간간이 언론에 풀 정보를 나학진에게 주었다.
신재현으로서는 어차피 판을 유리하게 끌기 위해서 타이밍을 맞추어 갖고 있는 정보를 풀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높으신 분 댁에 쳐들어 갈 때 슬쩍 말을 흘려서 기자들이 모이게 하는 식이다.
카메라를 들이밀고 생방송까지 흘러나가면 평소 공무원에게 심심찮게 삿대질을 하던 사람도 조용해진다.
처음에는 국세청 전문 취재 기자들에게 직접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조사하러 다니기도 바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자들과 연락을 끊었다.
대신 정보 창구를 일원화했다.
바로 나학진이 연락을 받은 후 다른 기자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나학진이 국세청 쪽 정보통으로 꼽히는 이유였다.
기자는 다들 공무원이든 대기업이든 각자 내부의 정보원을 하나둘 가지고 있는 법인데, 그 정보원이 신재현이라니.
이제 기자든 방송사든 나학진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쫓겨났던 한대일보에서마저 나학진에게 도로 돌아와 달라고 매일같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학진은 방송가든 신문사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신재현 때문이었다.
어떤 언론사든 각자의 사상에 따른 기조가 있는 법이다.
유일한 정보 창구인 나학진이 어느 한 언론에 소속되어 버리면, 신재현 역시 싸잡아서 그 언론사의 기조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언론사와 기자, 그리고 정보원인 신재현은 따로 떼어놓고 보겠지만 세상엔 놀랍게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나학진은 신재현에게 절대 피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1년 가까이 서로 문자나 전화만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가끔 안부를 묻긴 하지만 대부분은 공적인 이야기들이다.
그 흔한 기프티콘도 오고 간 적이 없었다.
누가 우연히 핸드폰을 봐도 ‘참 무미건조한 관계네’라고 평할 만한 대화뿐이었다.
그랬던 신재현이 이번에는 웬일로 나학진을 직접 불러냈다.
1년 만에 만난 신재현은 많이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외모에서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진중한 느낌이 났다.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은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운 인사를 나누려던 나학진은 덜컥 멈춰 서고 말았다.
1년도 더 전에 봤던 혈기 넘치고 쉽게 흥분하던 젊은이는 이제 완숙한 관리자의 품격을 띠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나학진에게 신재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기자님, 살이 좀 빠지신 거 아니에요?”
이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재회할 생각은 아니었다.
신재현은 1년 만일지 몰라도 계속 그의 기사를 써온 나학진에게는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다만 신재현은 너무 오랜만에 만난 자리라 어색할 법도 한데 그런 내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오랜 친구를 보는 것처럼 반갑게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만나자고 했을까.
1년간 서로 만나는 걸 피해왔는데 일부러 불러낸 걸 보면 분명히 중요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나학진은 무언가 큰일을 벌이려 한다는 직감을 느꼈다.
“언론 쪽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사를 써달라거나 엠바고 해달라는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니에요. 기자님, 혹시 방송국 쪽에도 아는 사람이 있나요?”
역시나, 첫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이어서 신재현은 자신의 계획을 술술술 풀어놓았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제부터 자신이 그 계획의 한 축을 거든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나학진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그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호언장담한 대로 나학진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가 있는 업계는 사실 방송가와는 조금 달랐다.
큰 틀로 보면 언론이라는 대분류에 묶여 있고, 방송가에도 기자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교류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학진은 해냈다.
신재현이 맡긴 일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겠다는 각오도 있었지만, 사실은 방송가에 나학진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취재 대상은 신재현이다.
그런 신재현의 유일한 창구인 나학진이 이 업계에서 유명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학진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신재현의 부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턱.
나학진은 방음 처리가 된 두터운 문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이 두꺼운 문 사이에는 빼곡히 채워진 흡음재 덕문에 안과 밖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밖의 소음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다.
손잡이도 평범한 사무실의 문과는 달랐다.
가로로 크고 길쭉한 막대기처럼 되어 있어 체중을 실어 아래로 눌러야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수십 개의 모니터와 그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 앞에는 화면과 소리를 조절하는 온갖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화면 너머에는 스튜디오가 보였다.
-대선 예비 후보 제1차 토론회
배경 대신 세워둔 가벽에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앞으로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중년 남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메라 여러 대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면밀히 비췄고, 방청객은 그 무대를 진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방송국의 한 풍경이었다.
“딱 좋을 때 오셨네요.”
방송 준비실에서 토론회 생방송을 총괄하던 피디가 일어서서 나학진을 맞이했다.
화면을 보며 조정하고 있어야 할 직원들도 지금은 기묘한 표정으로 나학진을 보고 있었다.
나학진에 대한 부러움,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어쩌면 최대 시청률을 찍을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
여러 감정이 혼재된 얼굴이었다.
“이쪽입니다. 타이밍은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대신에 미리 신호만 주세요.”
미리 말을 맞춘 대로 나학진은 준비실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스튜디오와 연결되는 쪽문이었다.
문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후보들의 대화가 스튜디오 전체를 꽉 채웠다.
“정 대표님께서는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쉽게 보이십니까?”
“시장님, 저는 결코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쉽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정 대표님이 국회 입성을 너무 쉽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선도 쉬워 보이시는 거겠죠.”
“대체 아까부터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대선을 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뭡니까?”
시장이 정상훈에게 맹공을 펼치고 있었다.
역시나 정치 좀 해본 경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상훈이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지금 몰아세우는 것만 들어보면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방청객들도 지금은 시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의 분위기라는 것도 있어서 거의 시장의 독무대에 가까웠다.
정상훈이 최대한 점잖게 논리적으로 대답해 보려 했지만 말을 꺼낼 때마다 시장에게 말려들었다.
전 국세청장으로서 그 역시 말을 못하는 편이 아닌데도 시장에게는 이기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학진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스태프들 뒤를 빙글 돌아 스튜디오 구석의 문으로 다가가며 혀를 찼다.
“네거티브 맛을 제대로 보시네. 청장님, 여기서는 논리적인 거 필요 없어요.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거지.”
한편으로는 정상훈의 대응도 이해는 갔다.
여기서 마주 소리를 지르거나 남이 네거티브 공세를 한다고 따라하면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건 순식간이다.
보통은 적당한 공세와 그럴듯한 논리 사이에서 줄을 타야 하는데, 정치계에 막 입문한 전 청장에게 TV 토론회는 버거운 자리일 것이다.
그나마 시장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 해도 잘한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할까.
나학진은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애쓰고 있는 정상훈을 한 차례 바라보고는 쪽문을 열었다.
그 너머는 긴 복도가 있었다.
쪽문을 닫자 시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잘린 듯이 사라졌다.
복도의 한쪽에는 일정 간격으로 문이 나 있었다.
모두 대기실이다.
이 스튜디오가 뉴스, 토론회 등으로 쓰이는 일이 많다 보니 패널들을 위한 대기실이 다섯 개 정도 딸려 있었다.
나학진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각각의 대기실에는 오늘 참가하는 게스트의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안에서 세 번째 문에는 정상훈과 황인영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다음으로 안쪽에서 두 번째 문에 적혀 있는 것은 서울시장 진석필의 이름이다.
복도를 걸으며 살펴보니 대기실마다 2명에서 3명 정도가 배치되었고, 서울시장 정도 되는 거물은 대기실을 혼자 쓴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 대기실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심지어 문이 잠겨 있었다.
나학진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문을 두드렸다.
“나학진입니다.”
안에서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이는 황민우였다.
“어서 오세요, 나 기자님.”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대기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파만 해도 3개가 있었고, 아이돌이나 배우가 와도 편히 준비할 수 있도록 벽을 따라 쭉 거울과 화장대, 선반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작은 냉장고와 탈의실도 보였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 안에서 모든 방송 준비를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된 대기실이다.
그리고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TV 화면을 보고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화면에서는 현재 스튜디오의 생방송이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시장님 되게 말 잘하시네요. 네거티브가 심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눈살 찌푸려지게 마련인데 그런 걸 교묘하게 피해 가요.”
나학진은 대기실의 문을 잠근 후 소파로 다가갔다.
지금 스튜디오에 있는 시장과 다른 후보들, 그리고 방청객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람이 앉아서 토론회를 구경하고 있었다.
“부단장님, 언제든 가능하답니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죠. 토론회가 너무 재밌어서요.”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본 신재현은 악동처럼 웃고 있었다.
나학진은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