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무덤을 파네 (2)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원숙해진다는 말이 있던가.
벼는 몰라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틀렸다.
물론 인생의 굴곡과 애환을 겪으며 원숙해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많다.
손에 쥔 것이 많고 그것을 놓기 싫을수록 사람은 더욱 악독해지고 편협해진다.
정치인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었다.
뉴스에서 나이깨나 먹은 국회의원들이 서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욕을 퍼붓는 꼴을 보고 있자면, 저 사람들은 배운 사람들이 왜 저러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국회의원끼리 논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논쟁이 격화하면 막말이 나오기 쉬운 법이지만 쓰는 단어는 품위 있어야 한다.
국회법 제25조로 의원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전, 그리고 그 이전의 국회에서는 이런 말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어린것이 어디서 배워먹은 말본새야!
-양아치들이 하는 짓거리를 의원이라는 작자가 하고 있어!
서울시장은 바로 그 시절, 싸움 잘 하던 국회 출신이었다.
지금이야 시장 직에 있으니 국회의 사건에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모양새였지만, 그의 입담이 매섭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런 그는 입담만큼이나 행보도 날카로웠다.
제23대 국회의 임시회를 개최하는데 뜬금없이 서울시장이 참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흘끔.
이제는 제1야당이 된 신당의 의원들은 내빈석에 앉은 서울시장을 연신 곁눈질했다.
그는 분명 손님인데도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가장 이 자리의 주인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가 축하를 보내는 대상은 바로 국회의원들이다.
지금 이 자리는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배지를 받고 처음으로 출석해 국민에게 인사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주인공은 분명히 국회의원인데도 모든 관심도는 서울시장이 확 채가 버렸다.
국회방송의 카메라 역시 아예 한 대는 서울시장을 고정적으로 찍고 있었다.
보통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면 눈에 띄게 마련인데,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장은 아주 타이밍을 잘 골랐다.
새로운 국회가 축하와 함께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 버렸으니 말이다.
아직 정치 감각이 없는 초선 의원들은 마냥 신나서 금배지를 만지작 리고 국회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으나,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들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서울시장을 살폈다.
‘저 작자는 대체 왜 온 거야?’
그것은 정상훈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인 그는 초선임에도 맨 앞자리에 앉는 영광을 누렸는데, 덕분에 방해물 하나 없이 서울시장과 마주 볼 수 있었다.
안면 근육이 무사한가 싶을 정도로 그는 일관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계속 웃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는 정상훈으로서는 욕이 절로 나왔다.
‘저저저 미친놈! 웃는 얼굴이나 보여주려고 온 거야? 뭘 처먹었는지 인상은 드럽게 좋네. 아니, 애초에 서울시장이 올 수가 있는 건가?’
정상훈 역시 국회는 처음이었기에 이게 맞는 건지 감이 서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인지 신당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오혜라 의원도 당혹스러워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경제수석, 또는 장관 같은 행정부 사람들이 국회에 질답하기 위해 출석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행정부에서 뭔가 일이 터진 경우, 때로는 국회에서 행정부에 출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울시장이 국회에 출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본회의장이 아니라 국정감사 자리에 질의 대상으로 출석한 것이었지 이렇게 내빈으로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불법만 아니면 되는 거지.’
어차피 내쫓을 수도 없다.
혼란스러운 와중 무사히 출범한 23대 국회를 축하하고 건승을 기원하기 위해 왔다는데, 뭐라고 말하며 쫓을 것인가.
어서옵쇼, 하고 대접을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까짓거 관심은 뺏기더라도 괜찮다.
지금 중요한 건 저놈의 속내였다.
‘그래서 왜 왔냐고!’
언제 저 음흉한 속셈을 드러낼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정상훈은 임시회가 끝날 때쯤엔 녹초가 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원내 대표인 오혜라, 그리고 다른 의원들과 함께 위원회도 구성하고 일정도 잡아야 하는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회의가 끝나도록 아무 낌새도 없이 조용히 일어서서 나가는 서울시장을 보며 정상훈은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냥 정찰만 하러 온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대표님, 얼른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진석필 시장님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한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 아니, 일단 가봅시다.”
역시 그냥 온 게 아니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고 얻어맞는 심경이었다.
정상훈이 신당의 다른 의원들을 이끌고 기자회견장에 도착했을 때 서울시장은 일부러 단상 앞에 서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정상훈이 입구로 들어서자 그제야 마이크 앞에 섰다.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봐도 그가 정상훈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탄발언을 예상한 기자들이 급하게 준비한 카메라가 눈을 번뜩이는 가운데, 정상훈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입구 옆에 섰다.
서울시장은 연설문도 준비하지 않은 채 자신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오늘 첫발을 내디딘 자랑스러운 23대 국회의원 여러분. 이 경사스러운 날, 저 또한 새로운 도전을 말씀드리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새로운 도전?
정상훈은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저 미친놈이 여기서!’
설마는 항상 들어맞게 마련이다.
정상훈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주목을 받고 있는 서울시장을 노려보았다.
서울시장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여 또렷하게 한 문장을 그려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합니다.”
정상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옆에서 오혜라의 ‘아…….’ 하는 탄식 어린 목소리도 들려왔다.
‘뭐야, 출마 선언을 왜 오늘 여기에서 해?’ 하고 의문을 갖는 목소리.
그건 모르겠고 특종이라며 질문을 쏟아내는 흥분한 목소리.
갖가지 목소리를 들으며 정상훈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 방 먹었다.
23대 국회의 시작에 초를 치는 건 둘째 치고 출마 선언의 장소는 원래 상징적인 곳을 고르는 법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하는 사람, 골목상권을 대변하겠답시고 전통 시장에서 하는 사람, 광장에서 하는 사람 등 이유도 장소도 다양했다.
그런 서울시장이 국회에서 선언하는 이유는 당연히 나름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저는 과거 국민의 대표로서 이 국회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천만 서울 시민의 대표를 맡고 있지만, 앞으로 5천만 국민 전부를 대표해야 하는 대통령의 자리에 도전하겠다는 제 각오와 마음가짐의 표시로서, 그리고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와 발을 맞추겠다는 뜻으로서 국회의 회견장을 빌렸습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의원이던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렇게 붙인 이유는 다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정상훈은 서울시장이 왜 장소를 여기로 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국회를 얕보는구만. 날 견제할 생각이고.’
초장부터 기선 제압하는 것치고는 건방지다.
정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정치적일까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확 들이받아 버려?’ 하는 고민이었다.
신재현은 판을 보고 짜는 법을 민치호에게서 보고 배웠다.
그렇다면 민치호는 어디서 배웠겠는가.
바로 전 상사인 정상훈에게서다.
그리고 그는 신중한 편인 민치호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시장님! 국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느껴지는 아주 감동적인 출마 선언이었습니다.”
바로 정상훈이 한 성깔 한다는 것이다.
그는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일단 냅다 들이받았다.
어차피 고민해 봤자 답은 안 나온다.
그렇다면 확 저질렀을 때 활로가 뚫리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일전 국세청장 재임 시절에 체납징세과를 신설하거나 세무서를 개편한 것만 봐도, 그의 행동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총선 끝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벌써 대선 준비라니 부지런도 하십니다. 시장님이 이렇게 시원시원하신 분이셨군요.”
빈틈을 노리다니 얍삽한 놈, 정상훈은 그런 심정을 담아 비꼬아 말했다.
물론 시장은 알아들었으면서도 능글능글하게 받아쳤다.
“대표님께서 축하해 주시니 더욱 힘이 납니다. 어떠십니까, 제 일 처리가 마음에 드신다면 연설 한 번 해주심이 어떨런지요.”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와 지지 연설을 해달라는 소리였다.
물론 어림도 없는 얘기다.
정상훈은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차게 웃으며 시장의 손을 꾸욱 눌러 잡았다.
악수한 손등에 실핏줄이 서고 카메라가 둘의 손을 집중해서 찍었다.
“유력한 대선 주자들이 사라진 상황이라 국회도 중구난방 혼란스럽습니다. 여당도 규모가 많이 줄었고요. 시장님은 여당분이시니 여당에서 경선을 치르실 게 아닙니까?”
지금 여당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니 그랬다간 당연히 시장이 압도적인 표차로 경선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 꼴은 못 보겠다는 심정의 정상훈은 깽판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여당의 경선은 유명무실해 보이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초당적인 차원에서 후보 토론회 한 번 가시죠. 대선 전에 검증하는 의미로다가.”
서울시장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경선은 당에서 대표할 주자를 뽑기 위한 겁니다. 당원을 위한 자리예요. 어차피 경선이 끝나면 대선 후보들끼리 토론회를 할 텐데 굳이…….”
“제가 일반 시민이던 시절에 후보 토론회 챙겨보면서 항상 아쉬웠거든요. 저 후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토론회는 겨우 3번에서 5번밖에 안 하고, 그마저도 1시간 반에서 2시간이라 그것만 갖고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 대표가 됐으니 아쉬웠던 점은 보완을 해볼까 해서요. 지금부터 서로 경쟁력을 보여주면 더 좋지 않습니까?”
명분 싸움이라면 정상훈도 말을 잘했다.
서울시장은 악수한 손에 힘을 주었다.
호기롭게 출마 선언을 한 것이 바로 5분 전이다.
여기서 경쟁자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몸을 사린다고 안 좋은 이미지가 박힐 게 분명했다.
‘이놈 봐라……?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왔어? 신재현이라는 괴물 놈이 혼자 큰 게 아니라 이건가? 국세청은 대체 뭐 하는 집단이야?’
서울시장은 애써 웃음을 띠었다.
어차피 경선도 하기 전의 토론회다.
서로 변변한 공약도 없을 것이고 캠프도 제대로 꾸리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준비되어 있는 서울시장이 유리한 건 당연한 일이다.
아니,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아 당당하게 정상훈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위기는 기회인 법이지. 어떻게 이놈을 공격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예 무대 위로 올라오겠다니 잘됐어.’
서울시장은 포용력 있고 통 크게 보이도록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출사표를 던지신 다른 예비 후보도 계시면 함께 자리를 마련해 보죠. 국민께 어필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서울시장이 딴생각을 하듯, 정상훈 역시 나름의 계획은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가장 먼저 신재현을 떠올렸다.
‘타이밍 보고 있다고 했지? 내가 아주 기깔난 무대 하나 만들어줬다. 우리 후배님, 어디 한번 날뛰어 봐라.’
서로 정반대의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누군가는 무덤으로 들어가게 될 단두대 매치가 성사되었다.
물론 누가 무덤의 주인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신재현은 쾌재를 불렀다.
“역시 우리 전 청장님! 먹기 좋으라고 밥상을 차려 주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