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무덤을 파네 (1)
서울시장에 몇 년을 공들여 왔다.
대통령을 향한 징검다리, 서울시장을 무려 두 번째 해먹으면서 지지율도 많이 올렸다.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하동문과 차주혁이 국회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시절에는, 서울시장을 한 번 더 해먹은 후 5년 후의 대선을 노릴 생각도 했다.
그만큼 하동문은 강한 상대였다.
그런 지금,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졌다.
바로 신재현이 치워줬기 때문이다.
“이걸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라고 하지.”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고 날아보라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이 치워지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신당 대표 정상훈?
그런 놈은 자신에게 감히 댈 수도 없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
지금이야 지지율 좀 높다지만 금방 꺼질 거품이다.
당연히 대선에 나오겠지만 누가 정치 경력 하나 없는 개살구나 다름없는 초선을 그 중요한 대통령 자리에 앉혀 주겠는가.
더군다나 대통령은 절대 혼자 하는 직책이 아니다.
나라는 유능한 독재자 한 명이 경영하는 것이 아니니까.
얼마나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 사람을 부리는가, 즉 용인술도 중요하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캠프에 뛰어난 학자나 전문가를 영입하려 혈안이 되는 것이다.
서울시장의 경우에는 꽤 오랫동안 정치권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에 쓸 만한 인재가 많았다.
당장 서울시에서만 해도 눈에 띄는 사람이 많다.
곧바로 보좌진을 구성한다 해도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그에 반해 정상훈은 어떤가?
“신재현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는 건 인정해. 그런데 그건 자기 사람이 아니지.”
서울시장은 정상훈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흔히들 정상훈에게는 신재현이 있으니 든든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신재현은 공무원이라 정치에는 입도 뻥끗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신재현이 정상훈을 지지한다거나 조금이라도 연관 있는 티를 내면 서울시장에게는 유리했다.
신재현마저 한꺼번에 나락으로 보내 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막상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신재현을 설치게 놔두는 건 불안하단 말이지.”
발밑에 가시가 박혀 있는 기분이다.
지금 당장 목숨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자꾸만 간질거리고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내버려 두면 곪는 것 아닐까 걱정이 드는 수준의 자그마한 가시 말이다.
그래서 서울시장은 강수를 뒀다.
“지금쯤 죽상을 하고 있으려나? 정상훈, 신재현 둘 다.”
서울시장은 히죽 웃었다.
TV를 끈 상태인데도 리모컨을 소파에 툭툭 내리찍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는 자신의 패가 아니어도 유리하게 끌어오는 방법을 알았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8시의 라디오 출연 같은 것 말이다.
-국회의원을 검증하는 절차가 마련된 것 같아서 저 역시 아주 기쁩니다. 이번 총선은 국민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개표 결과를 보면서 이 나라에는 아직 정의가 살아 있구나, 국민의 의식이 이렇게 깨어 있구나. 감동에 울컥하더라고요.
지금은 불과 스무 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여당 의원들이 들으면 뒷목을 잡고 넘어갈 만한 소리다.
서울시장도 여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한물간 여당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곧 정권 교체가 될 게 분명한데.
그런 여당은 잽싸게 버리고 깨어 있는 척을 하는 게 유리하다.
내내 타이밍을 벼르고 있던 서울시장이 왜 하필 오늘 강수를 던졌는가.
요즘 신재현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하긴 그동안 몰아친 걸 생각하면 이제는 쉴 때도 되었다.
휴가도 좀 갔으면 좋겠는데, 국세청에는 일 중독자밖에 없는지 좀처럼 쉰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신재현이 좀 더 국민의 관심 속에서 사라진 후에 나서고 싶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매주 계산하듯 새로운 떡밥을 던지던 걸 보면 분명 지금도 무언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폭풍전야일 수도 있다.
나중을 기약하다가 또 신재현의 독무대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완벽한 타이밍이란 건 없으니까. 이 정도면 훌륭한 패지.’
이 자리까지 온 서울시장의 감은 귀신같았다.
조사단이 적당히 조용할 때 선수를 친 것이다.
-전 국회의 의원님들은 전부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와 검증을 받았습니다. 이런 과정이 아주 투명하고 건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하려면 자고로 이런 검증을 거쳐야죠. 신성으로 화려하게 데뷔하신 현 국회의 초선 의원님들도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앵커가 화들짝 놀라며 ‘그 말씀은 현재 국회의 떠오르는 신성, 제1야당 대표이신 정상훈 의원님을 겨냥하신 걸까요?’라고 물었을 때 서울시장은 대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디오인지라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시청자에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 전달됐을 것이다.
이걸로 얻는 이득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승승장구하며 국회를 다 먹을 기세인 제1야당의 힘을 견제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신재현을 견제하는 것이다.
“현명한 놈이라면 지금 날 공격할 생각은 못 하겠지.”
서울시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거리는 조사단이었다.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는 조사단이 다음 타깃으로 대선 후보를 잡는다면?
급한 건은 얼른 숨겨뒀지만 검찰과 국세청이 작정하고 들춰보면 분명 들킨다.
그렇다면 아예 조사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밖에 없었다.
총선 전에는 하동문 같은 거물에게 시선이 쏠려서 ‘서울시장 쟤도 검증해야 하지 않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화살이 쏠리지 않도록 겨냥만 다른 쪽으로 바꿔주면 된다.
“조사해도 좋고. 그때는 국회의원과 공무원의 유착관계를 대대적으로 터뜨려 버리면 되니까.”
장기로 보자면 외통수다.
조사하지 않으면 서울시장이 무난히 당선될 것이고, 조사하면 신재현이 정치 개입으로 엮이게 된다.
서울시장으로서는 최선의 수였다.
그는 오히려 정상훈과 신재현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 잘난 놈들이 제 손으로 무덤을 파게 생겼구만! 나는 놈이 떨어지는 광경은 아주 재밌는 구경거리지.”
둘 중 누가 떨어질지는 그 둘의 선택에 달렸다.
서울시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내리 눌렀다.
***
“자기 무덤을 파네요.”
토요일 오후 3시.
나는 민치호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나는 TV 화면에 흘러나오는 서울시장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런다고 시장만 조사 빼줄 건 아니잖아. 그렇지?”
민치호가 땅콩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러다 목이 막히는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던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캔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론 내 손에도 시원한 캔 맥주가 들려 있었다.
내가 민치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캔 맥주를 꺼내 올려놓았다.
대낮부터 웬 술이냐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이건 술이 아니다.
속이 시원해지는 보리 음료다.
“살다 보면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왜 청장님은 우리 시장님을 멍청이 취급하십니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이선균이 툭 던졌다.
내용이 지리멸렬한 걸 보니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내뱉은 것 같았다.
민치호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선균은 지쳤는지 축 늘어져 있다가 고개만 들어 TV를 보고는 다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항상 빈틈을 보이지 않는 이선균치고는 상당히 늘어진 모습이었다.
그만큼 우리끼리는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장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 괜히 오신 것 아닙니까?”
다크서클이 잔뜩 낀 것이 누우면 바로 코를 골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만 해도 오전에 출근했다가 1시에 퇴근해 바로 여기로 온 참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주일 내내 11시에 퇴근했다고 한다.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는 뻔한 일이라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선균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이쿠, 벌써부터 늙은이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청장님과 중상모략을 하는 자리에 제가 끼지 않으면 섭섭하지요. 청장님은 아직도 제가 없으면 출장지에서 아침을 거르신단 말입니다.”
“어허, 이 사람아! 요즘엔 챙겨 먹어!”
“어, 그래요? 많이 발전하셨네요.”
두 상사가 실없이 웃고 있길래 나는 조용히 이선균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들어 보았다.
아직 반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벌써 취했나?
피곤해서 술이 빨리 듣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납득하며 캔을 기울였다.
톡 쏘는 탄산이 강하게 느껴졌다.
곡물 맛?
그건 솔직히 모르겠다.
맛으로 따지자면 캔 맥주가 제일 부족한 것 같은데, 자꾸 손이 가는 건 병이 아니라 이 캔이다.
왜 먹는지 모르겠는데 먹게 된다.
쏴아, 하는 효과음이라도 날 것처럼 목을 타고 탄산이 내려가는 느낌이 났다.
배 속이 알싸해지자 나는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양념이 되어 있는 감자칩이다.
누가 산 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번에 올 때는 미리 연락했더니 민치호가 아주 신신당부를 했다.
-빈손으로 와! 어허, 부하 직원한테 얻어먹으면 욕먹어.
내가 가볍게 간식거리 사 간다고 했더니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처음엔 과자 사 오고 술 몇 병씩 사오다가 나중엔 장을 봐오게 되는 거야. 그러다 넥타이 핀이니 만년필이니 이런 비싸고 쓰잘머리 없는 걸 사 오게 되는 거라고. 내가 다 해봐서 알아.
그래도 예의상 거절해 보았더니 혼났다.
-아, 필요한 거 있으면 들어와서 배달시켜! 빈손으로 안 오면 쫓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나이 50 넘은 아저씨 입에서 배달하면 된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리 어머니도 장은 직접 봐야 된다며 배달은 잘 안 시키는데.
그래도 아저씨 둘이 뭘 얼마나 사놨을까 조금 걱정하며 와보니 웬걸, 알아서 다 챙겨 놨다.
당장 테이블 위에 널린 것만 해도 그랬다.
술 좀 많이 먹어본 아저씨들이라 그런지 과자도 딱 맥주에 맞는 견과류나 바삭한 종류로 펼쳐놓았다.
TV에서는 여전히 서울시장의 행보에 대한 분석과 언제쯤 대선 출마 선언을 할 것인가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지만, 거실 분위기는 느긋했다.
조금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제가 위원회 실무를 맡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서울청 분위기가 어떤지만 전달해 드릴게요.”
이선균이 흐느적거리며 넥타이를 풀어 소파 등에 걸치더니 캔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쪽이 무슨 짓을 한 건지 파악한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다들 다음 조사는 누구냐며 수군거리는 정도지요. 개중에 권현아 조사관 정도만 지금 국세청이 난감한 상황인 거냐고 묻더군요. 참 생각할수록 국세청장님께는 아까운 인재예요.”
권현아는 남들이 다 아는 국세청장 오낙현의 사람이었다.
지금은 비록 서울청 조사 1국에 있지만 아마 곧 본청으로 오지 않을까 싶다.
민치호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다 같은 국세청 직원인데 내 인재, 네 인재가 어디 있어. 청장님 은퇴하시면 권 조사관도 같이 은퇴하는 거 아니잖아. 이 과장이 좀 눈여겨보면서 잘 가르쳐 놔요. 괜히 오낙현 청장님한테 이상한 거 배우지 않게.”
“네. 같은 서울청이라 다행이네요.”
이변이 없는 이상 민치호가 차기 국세청장이 되는지라, 지금은 파벌이 그다지 의미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국세청이 된 것이다.
“권 팀장님이 많이 걱정하시던가요? 뭐라고 하셨어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이선균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걱정한 것 같진 않던데요.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앞에 단서를 붙이고 물었으니까요. 뭐,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해줬습니다.”
별일 아닌 건 사실이다.
이걸로 신경 쓰면 오히려 내가 미안한데 이선균이 잘 말해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서울시장 조사하긴 할 거지?”
민치호가 가볍게 물었다.
마침 TV에서는 패널들이 정상훈과 서울시장의 승부 결과를 점치고 있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 안 하고 넘어가면 조사단의 의미가 있습니까. 이럴 땐 정공법이죠.”
-진석필 서울시장의 대선 출마 선언이 약 2주 후로 예상되는 상황입니다. 정상훈 대표도 대선에 나오겠죠? 그전에 기선 제압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아마 이번 선거는 꽤 치열할 것 같은데요.
치열하긴, 곧 유력한 후보 한 분이 무덤으로 들어가실 텐데.
나는 패널의 분석을 들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둘 다 조사할 겁니다. 아니, 대선주자 전부 다요. 어디 정치질 해볼 테면 해보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