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일복이 터졌다고 합니다 (2)
다음 날 아침 9시.
시간에 딱 맞게 출근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사무실에는 빈자리가 한 명도 없었다.
야근에 주말 출근을 거의 한 달 가까이 했는데도 다들 눈이 초롱초롱했다.
원래 처음 시작할 때도 의욕이 넘쳤던 것 같은데 지금은 더했다.
그들의 시선에 피부가 뚫릴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인지 얼른 말하라고 하는 듯한 강렬한 눈빛에, 나는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사실 살짝 걱정하긴 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새로 뭔가 업무를 주거나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기에는 부적절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만 일하면 주말인데 누가 새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하겠는가.
어쩌면 야근해야 할 수도 있는데.
차라리 월요일에 주면 몰라도.
그런데 의외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아서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혹시 이 회의가 회식이나 조사단 인원 보충에 관한 안건이라고 생각한 걸까?
저렇게들 기대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오히려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전달할 안건이 기쁜 소식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 실망하려나?
어제는 좋은 생각인 줄 알았는데 자고 일어나서 출근해 보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다.
어찌 되었건 이미 운을 떼어놨으니 전달은 해야 한다.
나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게 중대한 건은 아닌데 조사관님들이 기대하신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음, 간략히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조사단의 방향에 대해 함께 의논해 볼까 합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웅성거림이 커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시다시피 조사단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에 손을 대보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요.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누굴 공략해 볼까, 생각을 했는데 놀랍게도 칠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나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22대 현직 국회의원들을 치면서는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워낙에 바빴고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건 조사단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기도 했다.
그래서 누굴 우선적으로 쳐야 하나,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아가며 떠올려 봤더니 양손을 다 쓰고도 부족했다.
5천만밖에 안 되는 인구에서 뭐 이렇게 성역이 많은지 모르겠다.
“자, 잠시만요. 조사단의 방향을 같이 정해요? 경제수석…… 아니, 단장님이랑 부단장님 두 분이 회의해서 결정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궁금해서 수군거렸나 보다.
위아래 위계질서가 꽉 잡혀 있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면 이렇게 된다.
좋게 말하면 질서가 몸에 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 갇히게 된다.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곳에 포인트가 간 것이 그 증거다.
“그건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단장님은 경제수석이시다 보니 입장상 조사단에는 참여를 안 합니다. 실질적으로 부단장 둘이 회의해서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아시다시피 조사단의 주도권은 저희 국세청에 있어요. 가장 많은 인원을 차출하기도 했고, 조사단의 정식 명칭부터가 조세범 처벌 특별조사단 아닙니까. 주된 조사 방향은 제가 정하고 있습니다.”
내 눈에 탈세액이 보이기 때문에 조금 강력하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있었다.
지현석은 타당성이 있는지 없는지만 검토했기 때문에 대부분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팀장님이 조사단 전체의 키를 쥐셨다고요?”
2반의 반장이 입을 떡 벌리더니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되물었다.
이게 그렇게 의아한 일인가?
“네. 부단장이 둘밖에 없는데 조세범 조사니 제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본론입니다. 이제 국회의원 조사는 다 끝나가잖습니까. 다음 대상은 23대 국회의원과 지자체, 공기업, 각 정부부처 고공단. 이렇게 생각해 봤는데 여러분은 누굴 먼저 조사하고 싶으신가 해서요.”
원래 내 생각은 총선이 끝나자마자 23대 국회의원 전부를 조사해서 검증하는 것이었다.
22대도 검증했으니 23대만 빼놓는 건 그들도 서운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당선된 사람들의 신고서를 불러와서 쭈욱 살펴본 결과, 놀랍게도 탈세범은 많지 않았다.
이들 전부를 조사해서 검증하는 과정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리 급할 건 없겠다 싶었다.
탈세액이 보이는 몇몇 사람과 중책을 맡은 사람들 위주로 조사하면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세상에 조사할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23대를 지금 파고드는 건 살짝 인력 낭비 아닌가.
그렇다고 누구는 조사하고 누구는 빼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마침 반도 2개로 나뉘었겠다, 한쪽에는 23대 국회의원들을 맡기고 한쪽에는 슬금슬금 다른 대상을 쳐볼까 생각하던 참이다.
내가 골라서 지시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조사단이 금방 해산할 것 같지도 않고, 본인들이 회의를 거쳐 선정한다면 업무 효율도 올라가지 않을까.
어제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면 조사관님들이 직접 자료 보시면서 이상하다든가, 이런 건 나중에라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특이 업종 없었습니까?”
뭐가 이상한지는 자료를 보는 본인들이 가장 잘 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랬다.
눈에 보이는 탈세액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보이는 것이 달라지듯이, 처음엔 몰랐던 재무제표가 이제는 눈에 꽤 익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재고자산이 3배로 늘었네. 주석 보니까 상품이 전자제품인데? 창고는 늘렸나?
이렇게 창고와 임차료 항목을 점검한다.
3년 경력의 내가 이러는데 이 팀의 노련한 조사관들은 어떻겠는가.
그동안 일하면서 손대지 못했던 것들, ‘아, 이건 수상한데’ 싶었던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난번 국회의원 조사 때 검사들이 묵혀둔 사건 하나씩 들고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그…… 부단장님이 주력이자 조사단의 상징인 건 알고 있었는데, 100명이나 되는 조사단의 방향까지 직접 잡고 계셨을 줄은…… 청와대 직속이라 VIP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줄 알았죠.”
2반의 반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흐렸다.
하긴 조사단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청와대는 일부러 조사단과 거리를 멀리 두진 않았다.
조사단의 첫 목표가 현직 국회의원이었으니, 대통령의 특별 지시를 받았다고 생각할 만하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조사단에 지시를 내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청와대에서도 알아서 하라고 놔버린 수준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조사가 가능한 거 아닐까요? 사실 저 같으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국회의원 치라는 말은 못할 것 같거든요.”
내가 히죽 웃자 2반 반장이 뭔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정말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고, 결사적으로 부인한다 해도 못 믿는 사람은 못 믿을 것이다.
그러니 2반 반장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는 내버려 두고 나는 의견을 재촉했다.
“혹시 조사해 보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세요.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릅니다.”
나는 지하철에서 호객 행위 하는 잡상인처럼 말하며 눈을 찡긋했다.
그러고도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말이 없다거나 불쾌한 얼굴들이라기보다는 좀 더 다른 감정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할까, 당황과 의문 같은 감정이 혼재되어 휘몰아쳤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 조사할지 회의하는 것은 조사국 같은 곳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내가 의견을 구한 것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된 것 같지는 않은데.
뭘까, 역시 조사단의 구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재촉하기보다는 조금 기다려 보자.
나는 서울청에서부터 함께했던 원래 팀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미동도 없이 온화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럼 역시 별일 아닌 게 맞군.
다음으로 사무실 분위기를 훑다가 채유림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냅다 지목했다.
“누구든 상관없나요?”
“네. 그럼요.”
“오, 그래요?”
얼마나 거물이길래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현직 국회의원까지 싹 털었는데 그 이상의 거물이 남았나?
그런데 채유림은 도발하듯 미소를 지으며 폭탄을 던졌다.
“대통령 조사해도 되나요?”
안 그래도 조용했던 사무실에 무거운 무언가가 내려앉은 느낌이 났다.
옆 사람과 수군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경악한 직원들이 입을 떡 벌리고 채유림을 바라보았다.
2반 반장의 경우에는 표정과 행동으로 지금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손이 갈 곳 없이 허공을 휘젓는 걸 보아하니 저건 ‘제정신인가? 미쳤나?’라는 뜻이 분명하다.
채유림이 대통령을 언급한 의도가 무엇인가.
나는 지그시 채유림을 바라보았다.
날 엿 먹일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그러다 채유림의 얼굴에 스치는 장난기를 보고서 나는 깨달았다.
이건 오히려 나는 돕는 것이다.
나는 마주 보며 큼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되죠.”
‘예? 뭐라고요?’ 하고 곳곳에서 의문이 터져 나왔다.
특히 2반 반장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는 채유림을 향해 손을 젓던 그대로, 동상처럼 멈춘 채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렸다.
상당히 기괴한 모습이었다.
“되, 된다고요? 대통령을? 당장 어제 같이 밥 먹었는데…….”
제대로 논리가 맞지 않는 말이 나온 것은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일 것이다.
밥 같이 먹었다고 조사 못할 것 같으면 밥 게이트가 이미 수십 개는 터지지 않을까.
하긴, 밥 한 끼에서 시작하는 스폰서라든가 유착관계를 생각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통령 직속 기관인 우리 조사단이 그 최고봉인 대통령을 조사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재밌겠네요. 국가 최고 수반을 조사한다라. 그야말로 우리 앞에 성역은 없다, 누구든 조사한다는 취지에 걸맞는 것 같습니다. 상징성도 있고.”
채유림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던지는 대로 잘 받았네요, 라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대통령도 사실 내 눈에는 탈세액이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 나온 이상 상징적으로 한번 파고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의견이 그렇게 모이면 정말 할 생각이었다.
비록 우리 편이라고 해도 검증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당장 현재 제1야당으로 등극한 신당의 대표인 정상훈도 내가 검증할 거라고 미리 말해두지 않았는가.
“그럼 어느 반에서 맡으실래요?”
채유림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 꺼낸 저희가 하고는 싶은데 팀장님이 맡겨주신 일이 좀 쌓여서…… 당장 착수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2반에서 하실래요, 반장님?”
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쏠리자 2반 반장이 뛸 듯이 놀랐다.
“아, 아뇨……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급한 대상 먼저 하고 해도 늦지 않…….”
“걱정 마세요. 만약 하더라도 저희 1반에서 할 생각이니까. 설마 제가 먼저 말 꺼낸 폭탄을 남에게 떠넘기겠어요?”
채유림이 장난스럽게 웃자, 2반 반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았다.
사고방식이라는 게 한순간에 바뀌기가 힘든 것인데, 아무리 우리가 그동안 급하게 달려왔다고 해도 대통령을 치자는 말에 덥석 달려드는 채유림이 희한한 것이다.
당장 지금 다른 직원들만 해도 뒤로 넘어갈 듯한 얼굴로 눈동자만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더 놀렸다간 정말 기절할 것 같으니 이쯤 해야겠다.
“채 반장님. 나중에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업무 분장해 드릴게요.”
“네에.”
다른 사람은 하나도 웃지 않는, 우리만 재밌었던 농담이 끝났다.
대통령 치자는 얘기까지 나왔으니 우리 조사단의 독립성은 증명된 거나 다름없고, 그보다 더한 성역은 없을 테니 이제 편히 말할 법도 한데.
내가 사무실을 쓱 훑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강혜원이 손을 들었다.
“네, 강혜원 조사관님.”
“상속받아서 운영되는 재벌들은 한번쯤 전수조사 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전문경영인 있는 곳은 나중에 한다 쳐도요.”
“괜찮은 의견이네요.”
채유림이 처음 막힌 혈을 뚫어주고 강혜원이 선두를 자처하자, 곳곳에서 너도나도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말하기 시작했다.
“무역 업계도 부실기업이랑 밀수가 꽤 있어서 한 번쯤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저번에 컨테이너 분실한 것처럼 하고 밀수한 걸 봤거든요. 관세청이랑 협조하고 있으니까 꽤 괜찮은 기회인 것 같은데요.”
“공기업이 제일 급하다고 봅니다. 몇 년 전에 모 카지노에서 신입사원 채용한 인원 모두가 청탁이었던 게 밝혀졌잖아요. 공기업이 꽤 폐쇄적이고 자치 성향이 강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폐단이 있을 겁니다.”
“글로벌 기업이요! 우리나라에서 세금 안 내고 조세 피난처에다 이익 빼돌리는 다국적 기업 상당해요!”
경력깨나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단순히 증여세다, 소득세다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썩기 쉬운 고인 부분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었다.
직원들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겼다.
-일이 또 많아지겠네. 우리는 왜 무덤을 파고 있는가?
체념과 해탈의 얼굴도 보였고.
-일이 너무 커지는 것 아닌가?
우려 섞인 시선도 보였고.
-재밌겠다!
순수한 의욕도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검찰들이 묵혀둔 사건 하나씩은 있는 것처럼 이들도 마음의 짐처럼 얹어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 그게 나와야지!
국세청에는 얼마나 해묵은 것들이 쌓여 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업무 분장을 어떻게 할까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