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98화 (398/500)

398화. 각자 다른 생각들 (4)

대통령의 인사는 시종일관 칭찬과 격려로 점철되었다.

“바쁘신데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몇 번이고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아서 다행입니다. 조사단 여러분께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애써주신 것, 대통령으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청렴하고 정의로운 공무원이 많다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모두가 저의 영웅입니다.”

원래 정치인이라는 것이 속마음을 숨기고 감격한 척을 잘하는 족속이라지만, 지금 대통령은 정말 감동한 것 같았다.

한쪽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혹여라도 개입처럼 보일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홀로 조사 결과 발표, 그리고 총선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게 제가 꿈꾸던 나라라는 것을. 저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깨끗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법과 정의, 원칙 위에 권력이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성역을 타파할 길을 뚫어주셨습니다.”

급기야 대통령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앞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무원들이 놀란 듯 웅성거리다가 곧이어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저게 진짜든 가짜든 지금 상황에서는 효과 만점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신재현뿐인 듯했다.

대통령 또한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으니 조사단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신재현이 의심을 품은 것은 다행인 점이고, 공무원들이 순수함을 잃지 않은 것은 다행이면서도 불행인 점이었다.

옆을 보니 팀장들은 물론이고 지현석마저도 감명 깊은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가 요즘 너무 정치인하고 많이 엮였나?’

비록 대통령의 눈물이 가짜라고 해도 조사단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다.

총선 전까지 여야가 힘을 합쳐 대통령을 공격했고 실제로 여당마저 갈려 나갔기 때문이다.

욕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예 조사단 설립 자체를 반대했을 테니 완전히 글러먹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신재현이 의심한 것은 직접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인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는 경계할 필요가 없겠지.’

그동안 너무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며 살아온 모양이다.

지금 대통령이 같은 편인 건 확실하지 않은가.

신재현은 슬며시 의심을 내려놓고 지금 이 자리를 순수하게 즐기기로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끝나고 카메라가 장내를 쭈욱 잡았다.

사기 진작을 위한 대통령의 연설이 이제 끝나겠구나, 밥은 뭘 주려나.

신재현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느닷없이 카메라 5대가 모두 그를 향했다.

물잔을 들어 올리던 신재현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

정면의 단상 위에 있던 대통령과 경제수석이 그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모든 분들의 노고가 크시지만 여기서는 두 분께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제 사심이 들어간 거지만 이해해 주실 거죠?”

장난스러운 대통령의 말과 함께 그가 신재현에게 손을 뻗었다.

누가 봐도 나오라는 뜻이다.

경제수석 임현승은 지현석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지현석은 단숨에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는 것까진 생각했어도 불러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의아한 시선이 꽂히기 전에 신재현이 먼저 일어났다.

그가 지현석을 일으켜 세우고 끌고 나가다시피 하며 앞으로 나가자, 대통령이 덥석 신재현의 어깨를 잡았다.

잔뜩 긴장한 지현석과 임현승까지 껴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악수를 나눈 지현석이 먼저 뻣뻣한 자세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신재현은 함께 돌아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임현승이 그를 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수석님……?”

“잠시만요.”

대통령이 슬쩍 신재현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툭툭 두드렸다.

눈에서 호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신재현을 특별히 아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차별이나 편애한다고 생각하는 공무원은 없었다.

지금 이 자리가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면 가장 주목받아야 할 것은 신재현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직책으로는 두 명의 부단장 중 하나지만, 대내외적으로 구심점은 단연코 신재현이었다.

외압을 해결한 것도 그였고, 조사단의 일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국회고 뭐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도 그였다.

신재현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며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는 함께 일한 공무원들이 가장 잘 알았다.

“사진 한 번만 찍읍시다.”

“예? 방금 찍은 건…….”

“아뇨, 둘만요. 나중에 자랑하게. 우리 와이프도 신재현 부단장님 팬이거든요.”

임현승이 잽싸게 핸드폰을 들고 둘을 찍었다.

딱 봐도 사적인 목적이었다.

머쓱하게 웃은 신재현이 돌아서려는데, 대통령이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앞에 있는 신재현과 임현승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민 청장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판을 깐 이유가 있었군요. 도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재현이 멈칫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통령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미동도 없는 웃는 낯이었다.

“어차피 저는 임기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제 스스로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여당을 버렸고요. 그러니 민 청장이 그랬듯, 저 역시 부단장님에게 제 남은 정치 인생을 모두 걸겠습니다. 청와대 쪽은 걱정하지 말고 해요. 적어도 제가 있는 동안 조사단을 해산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까 지현석이 그랬던 것처럼 신재현도 말없이 굳었다.

전폭적인 지지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재현이 애써 정신을 추스르는 동안 대통령은 웃으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아이고, 제 말이 너무 길었네요. 밥 먹기 전에 서론을 길게 하면 안 되는 건데. 제가 너무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이제 그만 괴롭힐 테니 편히 앉아 계시면 됩니다.”

가벼운 농담과 웃음이 지나가고 1테이블에 모든 사람이 채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빈자리는 대통령과 임현승의 것이었다.

명색이 단장인 임현승은 실제로 사무실에서 본 적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대통령이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팀장들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음식이 하나둘 들어오고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다행히 1인당 대여섯 가지의 반찬으로 구성된 한식이었는데 떡갈비와 전복냉채 같은, 손이 많이 갈 듯한 음식들이었다.

다른 테이블은 신나서 수저를 드는데 반대로 여기만 분위기가 딱딱했다.

아무도 숟가락을 들 생각조차 못 하고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제일 먼저 나서서 이것 좀 먹어봐라 권했을 노동부 팀장도,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금감원 팀장도 눈동자만 굴렸다.

나이 지긋한 국토부 팀장은 아예 물잔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젊은 공무원이라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생 공무원의 위계질서를 몸소 체험해 온 팀장급들이라 긴장감이 더했다.

대통령과 임현승이 서로 난감한 시선을 주고받을 때, 신재현이 이 테이블에서는 처음으로 숟가락을 집었다.

“신경 많이 쓰신 것 같네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메뉴기도 하고. 그렇게 값나가는 재료도 없고.”

조금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분석이었다.

무려 대통령의 오찬 메뉴를 품평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덕분에 말문이 트였다.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다들 공무원 아닙니까. 분명히 내일 신문에 오늘 오찬 얘기 나올 텐데 책잡힐 일을 만들 수는 없지요. 돕진 못할망정 방해할 수는 없잖습니까.”

과한 메뉴는 내올 수 없었다는 얘기다.

양해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정치인 특유의 돌려 말하기 화법이라 팀장들은 이해하지 못할 게 뻔했다.

때문에 신재현은 조금 풀어서 말해주기로 했다.

아까 대통령이 보여준 호의에 대한 보답인지도 모른다.

“전 대통령 때 랍스터랑 캐비어 올렸다가 난리 난 적이 있었죠. 우리나라 밥은 굳이 그런 재료 안 써도 맛있는 거 많은데 말이에요.”

신재현은 밥상을 차려놓고 고사 지내듯 바라만 보는 걸 싫어했다.

그는 먼저 떡갈비를 베어 물고는 하던 말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우, 이거 진짜 맛있네. 얼른 드세요. 떡갈비 최고다.”

이건 진심이었다.

신재현이 얼른 먹어보라며 팀장과 지현석에게 권하자 그들이 엉겁결에 수저를 들었다.

한입씩 먹어본 뒤 감탄하는 건 덤이다.

임현승이 신재현에게 슬쩍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 맛있네. 소고기예요?”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떡갈비 중에서 제일 맛있어요.”

“우와, 튀김도 드셔보세요. 이거 대체 뭐지? 생선인가?”

역시 먹을 것만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없다.

일단 뭔가 하나씩 맛보고 나니 언제 긴장했냐는 듯 표정이 풀려 있었다.

대통령이 어깨를 으쓱하며 메뉴를 설명했다.

“떡갈비는 직접 소고기를 다져서 빚은 겁니다. 튀김은 복어예요. 살이 아주 부드럽죠. 냉채는 전복하고 야채, 그리고 두부면이 들어갔습니다. 이게 좀 독특하죠?”

대통령이 하나하나 메뉴를 설명할 때마다 팀장들이 정신없이 젓가락을 가져갔다.

“사실 아까 신재현 부단장님이 말씀하셨듯 더 좋은 걸 대접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요. 최대한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걸로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 오늘 테이블에 놓인 꽃도 신경 써서 준비한 거예요. 꽃말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음식만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테이블 중앙에 놓인 꽃병으로 향했다.

붉은 동백꽃과 흰 동백꽃이 어우러져 꽂혀 있었다.

동백꽃이 지금 필 시기가 지난 건 둘째 치고 흰색 꽃이 동백치고는 좀 이상했다.

“붉은 건 동백이고 꽃말은 신중함, 청렴입니다. 흰색은 진짜 동백은 아니고 노각나무라는 나무의 꽃이에요. 동백과 닮아서 하동백이라고도 불리죠. 꽃말은 견고, 정의입니다. 제가 음식은 못하고 뭐라도 하나 해보고 싶어서 직접 골랐습니다. 여러분께 정말 잘 어울리는 꽃이죠.”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대통령은 신나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직접 골랐다는 부분을 힘주어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같았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 자랑하는 아저씨 말이다.

머나먼 회장님 같았던 이미지가 친근하게 바뀌자 팀장들의 표정도 한결 편해졌다.

이젠 정말 밥 먹는 일만 남았다.

“제가 궁금한 게 참 많습니다. 일하기엔 어떠십니까? 불편한 점이나 개선사항 있으십니까?”

“일적으로는 바빠서 그런 거 생각할 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다, 일만 딱 집중할 수 있게 해주시니까 오히려 낫다고 해야 하나?”

대통령이 질문하고 주로 팀장들이 대답했다.

“불편한 점은 그거죠. 야근을 너무 많이 해요!”

신재현과 지현석이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물론 반쯤은 장난이었다.

갑질이나 부당한 업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을 뿐더러, 부단장 둘이 제일 열심히 한 것도 알고 있었다.

“크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각자 부처별로 점심밥 한 끼는 맛있는 거 드시라고 하고 싶은데. 예산 기안 올려도 될까요?”

일단 조직도상 청와대 직속이다.

최종 결정권자는 단장인 경제수석 임현승이었지만 예산은 청와대에서 나왔다.

“그럼요. 어디 부단장님 두 분이 얼마나 기깔나게 예산안 올리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확답받은 거나 다름없다.

신재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팀장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팀장들은 한참이나 어린 부단장의 장난을 귀엽게 받아주었다.

“역시 부단장님이다!”

“크으, 그렇게 나와야지!”

“우리 부단장님 잘한다!”

왁자지껄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식사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후식은 아이스크림에 수정과였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가자 대통령과 임현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연회의 주최자가 내빈과 인사를 나누듯, 둘은 일일이 모든 공무원과 악수하고 잡담을 했다.

어찌저찌 오찬이 끝나고, 대통령이 직접 영빈관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밖에는 대절해 온 버스와 승합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멋진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초대할 테니 귀찮아 마시고 꼭 찾아주세요.”

대통령의 인사를 끝으로, 공무원들은 손을 흔들며 각자 차에 올라탔다.

이제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오늘 하루는 공가 취급을 해준다는 것이다.

국세청 직원들을 태운 버스가 도로를 달려 세종시로 들어섰다.

국세청 앞에서 내린 직원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내일도 출근이었기 때문이다.

신재현은 밀린 자료도 훑어볼 겸 본청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강혜원이었다.

“오늘도 일하시게요?”

“점점 볼 게 많아져서요. 미리 자료 좀 읽어두려고요.”

서울청에서부터 따라온 원래 팀원 4명이 그를 둘러쌌다.

안길진이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2차 가시죠.”

“아니, 대낮부터 무슨 2차예요?”

장세훈이 퇴로를 막고 강혜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노래방 가자, 노래방! 너 국세청 단합대회 때 술 먹고 춤췄다며! 이번엔 노래 부르러 가자!”

“가요, 팀장님! 제가 돌고래 초음파를 들려 드릴 테니까!”

제일 신난 건 고음 좀 지를 줄 안다고 자랑하던 강혜원이었다.

앗, 하고 잠시 당황한 사이, 어느새 4명에게 이끌려 국세청의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힘을 이겨내지 못한 신재현이 시내를 향해 걸으면서도 정색했다.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요? 잊어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잊긴 뭘 잊어요. 우울할 때마다 영상 한 번씩 꺼내보면 얼마나 재밌게요?”

“뭐라고요! 영상이라니!”

“일단 가시면 보여 드릴게요. 자, 팀장님. 갑시다!”

“잠깐만! 영상이라니! 영상이 왜 있어요! 영상은 대체 무슨 말이야!”

“가자, 가자! 노래방 가자!”

“아니,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건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오랜만에 뭉치는 신재현 팀 5명이 내지르는 소리가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졌다.

국세청 앞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직원들이 돌아보고는 풋, 하고 웃었다.

조사단이 생기고 나서 다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가로운 한때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