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각자 다른 생각들 (3)
신재현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훑었다.
딱히 누군가를 찾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별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그의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맴돌았다.
먼저 테이블.
새하얀 테이블보가 씌워진 원탁에는 식기와 냅킨이 세팅되어 있고, 각 자리마다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종이로 대충 삼각형을 접어 만든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투명판에 인쇄한 종이를 끼워 넣은 것이었다.
이런 행사가 꽤 자주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종이를 뽑아 일회용으로 쓰는 게 훨씬 싸지만 행사를 자주 하는 거라면 아예 이름표 틀을 만들어 두는 게 편하다.
더불어서 플라스틱 이름표는 여기가 격식을 차린 자리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그를 뒷받침하듯이 앉아 있는 이곳은 천장이 높게 올라 있는 대형 홀이었다.
돌잔치나 결혼식을 해도 부족함이 없을 법한 곳이다.
그러나 결혼식을 위해 대관하는 그런 장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여기가 청와대 영빈관이라는 것이었다.
벽에도 세세한 장식이 붙어 있고 머리 위에는 샹들리에를 닮은 자그마한 전등이 있었다.
신재현이 앉은 것은 그중 가장 앞의 중앙 자리였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자그마한 꽃병에 이름 모를 꽃이 꽂혀 있고, 그 사이에 삐죽 솟은 팻말에는 테이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신재현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떡하니 1번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고 정면에는 단상이 보였다.
왼쪽에는 태극기, 오른쪽에는 청와대의 푸른 무궁화기가 깃대에 꽂혀 있다.
테이블이 동그랗기 때문에 단상을 등지고 앉은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뒤를 돌아야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재현이 앉은 자리는 귀빈 중의 귀빈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지현석이 앉아 마찬가지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멍한 얼굴의 신재현과는 달리 지현석은 굉장히 흥미가 넘쳐 보였다.
“저거 벽지일까요, 아니면 양각일까요?”
지현석은 벽의 문양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가 봐도 신난 표정이다.
“궁금하면 만져보고 오세요.”
“에이, 부끄럽게 어떻게 그래요. 카메라도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카메라 다섯 대가 각각 다른 각도로 홀 안을 찍고 있었다.
여기 들어오고 싶어 하는 기자는 많았지만 출입 기자는 엄격하게 가려 받았다.
덕분에 평소 같은 취재 경쟁이나 우악스러운 질문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신재현이 앉아 있는데 다가서지도 않았다.
“다들 많이 신나 보이네요. 저는 그냥 우리끼리 회식할까 했는데 초대해 주셔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신재현은 다른 테이블에 가득 들어찬 직원들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족히 100명은 넘는 조사단 직원 전부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지정된 것은 신재현과 지현석뿐이라 나머지 테이블에는 원하는 대로 앉았다.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끼리, 같은 부서 사람끼리 뭉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어색함은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아는 사람끼리 함께 가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회식이야 당연히 좋지만 무려 청와대 초대 아닙니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초청받아서 대통령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영광인데요.”
같은 1번 테이블에 앉아 있던 팀장 하나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테이블보를 쓸었다.
나이가 꽤 있는 사람이다 보니 지금 여기 들어와 있는 것 자체에 감격하는 것 같았다.
1번 테이블은 가장 앞에 있는 주연의 자리다.
때문에 비워둘 수가 없는지 노동부나 관세청, 식약처 등 이번 일에 활약한 부처의 팀장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부처 직원들과 떨어져 있어서인지 이들은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그럼요. 공무원으로서는 엄청난 영예죠. 회사로 따지면 그거잖아요. 회장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축하하며 팀원들 불러서 밥 먹이고 격려하는 그거요.”
“견학도 안 해봤는데 이런 식으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조사단에 들어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사실 저희 노동부에서는 저 말고 과장님이 파견 오기로 하셨거든요. 근데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마지막에 고사하셔서 제가 대신 오게 됐습니다. 아마 그 과장님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분 입장도 이해는 합니다. 우리 모두 옷 벗을 각오하고 모인 거잖아요. 다들 오기 전에 윗분들한테서 각서 비스무리한 거 받으셨죠?”
신재현으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각서요? 그런 것도 쓰셨어요?”
“어, 부단장님은 안 쓰셨어요? 하긴, 국세청 전부가 사활을 걸었으니까 쓸 필요가 없나?”
노동부의 팀장이 앞에 놓인 물잔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파견 후 무슨 일이 있든 원청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요. 구두로 약속한 것도 있었는데 제 경우엔 조사단의 귀책 사유로 사건이 일어날 경우 징계를 감수한다는 거였어요.”
신재현이 입을 떡하니 벌리며 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조사단에 파견 나온 게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걸고 선택한 것이다.
“다들 그렇습니까? 7급, 8급, 9급 직원들도요?”
“네. 미리 언질 듣고 자기 선택으로 온 거예요. 국세청의 서울청장님하고 검찰의 서부지검장님이 그걸 최우선 조건으로 걸었다고 들었어요. 등 떠밀려서, 멋모르고 속아서 온 사람은 이쪽에서 사양한다고요. 그래서 겨우 100명밖에 안 모인 거라고 들었는데요. 원래는 더 뽑으실 생각이었다는 것 같던데…….”
신재현은 앞에 놓인 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억지로 등 떠밀려 온 사람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국회의원을 조사하겠는가.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또한 만약의 경우에 조사단이 실패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괜히 위에서 시키는 대로 왔다가 함께 가라앉는 신세가 되고 말 테니까.
적어도 위험성을 본인이 인지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말은 민치호가 이 조사단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함께 일할 사람들을 붙여주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져 오자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민치호와 송대희는 자그마한 것까지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재현이 말없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함께 앉아 있던 팀장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아이고, 괜한 소리를 했나 보네. 부단장님. 저희는 다 이게 맞다고 생각해서 온 거예요. 미안한 마음, 부담감 이런 거 저희한테 절대 가질 필요가 없어요.”
“그럼요! 저희는 이런 날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진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라서 잘못되면 치킨집이나 차리려고 했…… 악!”
누군가가 발을 밟았는지 팀장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시선이 꽂히자 그는 아픈 발을 부여잡으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옆에 있던 노동부 팀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관세청 팀장님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셨네. 신경 쓰지 말아요. 여기 팀장님도 총선날 감격해서 술 자셨다고 하니까.”
“소주 2병을 말끔하게 비웠습니다. 치킨집 안 차려도 되니 얼마나 좋아요.”
“여기서 그런 말을 왜 해요! 거참!”
타박하는 팀장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지현석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신재현도 참지 못하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다 잘됐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우리가 또 열심히 받쳐 드릴라니까.”
나이 지긋한 팀장 하나가 나지막하게 격려를 건넸다.
신재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사단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니, 조사단의 실적 자체가 그렇죠. 저 혼자서라면 도저히 못 했을 일입니다. 이번 총선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건 모두 애써주신 덕분이에요. 함께 일하면서 지켜봤기 때문에 느끼고 있습니다.”
“애썼다기보다는 야근을 뒤지게 했…… 아, 그만 때려요!”
자꾸만 솔직하게 말을 내뱉는 팀장의 입을 막으려는 손길이 이어졌다.
신재현은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앞으로 야근이 없을 거라는 말은 양심상 찔려서 못 하겠습니다. 대신에 칠 놈은 확실하게 치고! 외압으로 조사단을 건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말 잘한다!”
“바로 그거지!”
신재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1테이블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지 후보의 연설을 들은 유권자 같은 표정이었다.
회장 안의 시선이 다시 쏠렸지만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유도 모른 채 따라서 박수를 치기도 했다.
다들 신나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괜히 보내오는 박수 소리에 머쓱해하던 신재현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2테이블에 앉아 있던 원래 팀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황민우, 장세훈, 강혜원, 안길진 네 명과 국세청 지부의 반장 두 명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특히 장세훈은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놀리는 거다.
“근데 회식을 이걸로 해도 되나요? 나중에 다시 하긴 해야겠죠?”
이렇게 큰 규모의 단체를 관리하다 보면 고려할 것이 많았다.
특히 한자리에 모이기 어렵다 보니 회식 한 번 하는 것도 힘들었다.
때문에 총선이 끝나고 큰 건이 일단락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회식을 못 하고 있었다.
마침 경험 많은 팀장들과 함께 앉아 있으니 물어볼 기회다.
“날을 하루 따로 잡을까요?”
신재현의 질문에 팀장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 모이려면 웬만한 식당 통째로 예약해도 부족하잖아요. 부처도 서울, 세종시 각각 나뉘어 있고.”
지현석이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에 특검에서 회식 한 번 잘못했다가 공직자 기강 해이라고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괜히 공격할 빌미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요?”
지현석 나름대로 정치적인 생각을 해본 결과였다.
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맞아요. 근데 그 이상으로 팀원들 사기도 중요한 거거든요. 일반 회사 같으면 특별 수당이나 상여 같은 거 돌릴 타이밍인데 우리는 그것도 못하니까요. 명예만 갖고 하기엔 일이 너무 힘들잖아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이 지긋한 팀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조사단에 들어올 생각 자체를 안 했을걸요. 다들 이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청와대에 초청받아서 밥까지 얻어먹게 되었잖아요. 이게 곧 보상입니다.”
“그래도 제가 감사해서 그렇습니다.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정 그러면 예산 집행해서 카드 주시면 되죠. 각자 부처끼리 점심에 맛있는 거 한 끼 사 먹고 오겠습니다.”
노동부의 팀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1테이블의 팀장들이 뭐가 웃긴지 소리 내어 웃었다.
가을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 나이대처럼, 무슨 말 한마디만 하면 바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이 지긋한 팀장은 이 제안이 솔깃한지 앞으로 상체를 쭉 내밀었다.
“그럼 2만 원짜리 보리굴비 한정식 먹어도 됩니까? 우리 옆 과가 그거 먹고 와서 자랑하길래 부러웠는데.”
다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재현 역시 하도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예산 집행 알아보겠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김밥과 컵라면으로 때우며 야근하신 걸 제가 아는데 맛있는 밥 한 끼는 당연히 드실 수 있게 해드려야죠.”
“아주 좋구만!”
팀장들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했다.
한층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 즈음, 문이 열리며 대통령이 들어왔다.
바로 뒤에는 임현승 경제수석이 따라오고 있었다.
신재현은 습관적으로 둘의 머리 위를 훑었다가 시선을 내렸다.
눈이 마주친 임현승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신재현은 가만히 시선을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1테이블에는 딱 2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바로 신재현의 옆자리였다.
‘아차!’
순간 1테이블에 앉은 팀장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사진이 떠올랐다.
한 이등병이 한국과 미국 대통령 사이에 끼어 밥을 먹는 사진이었다.
팀장들이 웃는 낯 그대로 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