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각자 다른 생각들 (2)
민치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파렴치할 수가 있는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턱 얹어서 공을 가로채 보겠다는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이었다.
“크흠, 정 청장님이 그새를 못 참고 그걸 민 청장에게 말했나 봅니다. 뭘 어떻게 전달했는지 모르겠지만 민 청장이 오해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하군요.”
오낙현은 정상훈을 탓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뜻이었다.
민치호는 한탄했다.
눈앞에 있는 이 양반은 소심하고 자기 보신이 최우선이었지만 그 성정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때문에 차갑게 사람을 쓰고 버리는 손경진이 아니라 오낙현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본인의 야망을 위해 부하 직원을 갈아 버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야욕에 눈이 멀어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판단력이 흐려진 것처럼 보였다.
“오낙현 청장님께서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상훈 대표님은 이제 청장이 아닙니다. 정치인이고 150명의 의원을 거느린 제1야당의 대표예요. 과거 우리 셋이 국세청에서 회의하던 시절처럼 대하시면 안 됩니다. 오낙현 청장님의 행동 하나에 국세청이 책잡힐 수가 있어요.”
“그만둔 지 6개월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국세청 덕분에 승승장구하고 계시니 제게 더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업계, 하다못해 사법부는 먼저 은퇴해서 국회로 간 선배들이 현역들을 이끌어주지 않습니까. 저는 항상 그들의 끈끈한 커넥션이 부러웠거든요. 우리도 정 청장님이 끌어주고 우리가 밀어주면서 국세청의 끈을 만들어둘 시점입니다.”
오낙현도 나름 생각을 많이 해본 모양이었다.
방향이 틀렸지만 말이다.
국회 내에 커넥션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생각에 기가 막혔지만 민치호의 귀에 확 와서 꽂힌 것은 다른 것이었다.
활약한 건 신재현과 국세청 직원들인데 ‘저에게’라고 말한다.
오낙현이 여기 청장실에서 혼자 얼마나 김칫국을 들이켜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친절하게 이러면 안 된다고 설명하려던 민치호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청장님, 지금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꿈 깨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감히 상사에게 꿈 깨라고 말하다니.
첫 번째는 오해였구나 싶어서 자신의 멋들어진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참기 어려웠다.
오낙현 역시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무슨 망발입니까! 아무리 민 청장이라도 해도 될 말이 있고 하면 안 될 말이 있어요!”
“청장님, 지금 대선 나가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게 헛꿈이 아니면 뭡니까? 누가 당선이나 시켜준답니까?”
“전 청장인 정상훈 대표님이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어 제1야당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살려야 해요. 제가 먼저 나가서 길을 닦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세청은 사법부처럼 막강한 권한을 쥘 수 있어요.”
두 눈을 반짝이는 오낙현을 보면서 민치호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겁니까? 나는 지금 국세청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러니까 지금 국회에 행정부의 파벌을 만들겠다는 것 아닙니까! 사법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나쁜 일 하는 것 같네요. 사법부는 해도 되고 우리는 하면 안 됩니까? 그놈들은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법을 뜯어고치잖습니까. 판검사, 변호사 출신 의원이 워낙에 많으니까 그쪽 특수집단 이익을 대변하고 있어도 아무도 막질 못잖아요.”
“지금 청장님 입으로 왜 안 되는지 이유를 설명하셨네요. 지금 그 끈을 끊어내려고 후배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안 보이십니까? 간신히 물갈이해서 파벌이고 당이고 산산조각 내놨는데 그걸 도로 이어놓겠다고요? 청장님! 당신 욕심에 눈이 멀었어요!”
민치호의 일갈에 오낙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정상훈 청장님도 하고 있잖아요.”
“그분은 더 이상 청장님이 아닙니다. 국세청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아요! 다만 전문 분야가 세법과 재무일 뿐입니다. 그 전문 지식을 이용해서 국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라고요. 오 청장님이 하시려는 일과 정 대표님의 일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민 청장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나와 정 청장님이 다른 게 대체 뭡니까? 그분도 국세청장을 하다 국회로 나갔잖아요. 저도 여기서 끝내지 않고 뭔가 해보겠다는 겁니다.”
민치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틀어져도 너무 틀어졌다.
좋게 말할 생각은 진작 사라졌다.
“청장님이 뭘 하셨습니까?”
“지금 시비 거는 겁니까?”
“시비 걸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말했겠죠. 청장 자리도 혼자 힘으로 앉지 못한 분이 무슨 자격으로 국회의원과 대통령 자리를 넘봅니까? 감히,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들어요?”
“아, 아닛. 민 청장!”
시비 걸 생각이었다면, 이라는 전제로 한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수위가 높은 막말에 오낙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잖아요. 오 청장님이 혼자서 뭘 하셨습니까? 그 자리도 손경진 원장님이 올라갔을 수도 있는 거였습니다.”
“민 청장이 도운 건 인정해. 그렇다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야!”
“저는 지금 청장님을 막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왔습니다. 더한 말을 해서라도 지금 청장님의 야욕을 꺾어야 하니까요.”
“야욕이라니! 정 청장님은 되고 나는 안 된다 이거야? 아니, 민 청장은 되고 나는 안 돼?”
“예. 지금 오 청장님이 하시려는 일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민 청장이 왜 나를 막냐고!”
참지 못한 오낙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반대로 민치호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청장님께서는 이번 판에서 뭘 하셨습니까? 처음에 조사단이 생길 적에도 가장 먼저 발을 빼려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부탁드렸잖습니까. 청장님께 위험한 일은 없게 할 테니 우산이 되어달라고. 열심히 일하는 국세청 직원들에게 튀는 불똥만 막아달라고. 그래서 뭔가 일이 있긴 했습니까?”
“민 청장이 막아줬겠지. 내가 한 일이 없다고 지금 삐진 건가? 허 참, 어린애도 아니고. 이번 판은 민 청장이 독자적으로 벌린 판이에요. 민 청장 선에서 막는 게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최대한 막아드렸죠. 그러니 숟가락 얹지 말라는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허허, 대선이요? 듣자마자 웃음이 나오더군요. 저희가 조용히 모든 일을 처리해 드렸더니 우리 청장님께서 너무 쉽게 보셨군요.”
오낙현이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민 청장이 대단한 건 인정해. 하지만 나도 가능한 거 아닌가? 막말로 지금 대통령 할 사람이 누가 있지요? 정 청장님은 대선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확고하게 뜻을 밝히셨으니 내가 나가도 무방한 것 아닙니까! 승산이 있다고 보는데요.”
민치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승산 없습니다. 오 청장님께서 본인의 위치를 파악하셔야 한다는 게 바로 그런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민치호의 말은 조금 돌려 말하긴 했어도 분수를 파악하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낙현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민치호가 말을 가로챘다.
“정 청장님은 국회에서 조사단에 날아오는 돌을 쳐내시고 지원을 하셨습니다. 신재현 부단장이 국회를 조사하는 데 발맞춰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를 도왔죠. 지금은 신재현 부단장의 경고대로 국회의 혼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잠깐. 그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국회에서 뭘 어째요? 아니, 내가 국세청장인데 보고가 왜 안 올라온 겁니까?”
“조사단의 보고 체계는 국세청장님이 아니라 더 위로 올라가니 그런 것 아닙니까. VIP의 직속 기관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래도 내가 국세청장인데 이제 와서 그런 소식을 들었다는 건…….”
“그러니 청장님 스스로 한 번 돌아보십시오. 무엇을 하셨습니까? 조사단이 활동하기 쉽도록 장애물을 치워주셨습니까, 돌을 막아주셨습니까? 청장 자리조차 홀로 올라가지 못한 분께서 아무것도 안 한 채로 뭘 내세우실 생각입니까? 설마 국세청장이라는 이유로 신재현의 이름을 팔아 당선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시겠죠?”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하긴 정상훈이나 민치호처럼 이렇다 할 활약이나 이력이 없는 오낙현으로서는 지금 기댈 것이 국세청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뿐이었다.
“정 청장님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재현 부단장과 민 청장 역시 아주 훌륭합니다만, 그런 인재가 나온 것 역시 국세청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겁니다. 아랫사람이 잘못하면 청장이 옷을 벗듯이, 국세청에서 나온 성과는 제 임기의 실적 아닙니까?”
“그래서 정 청장님은 신재현 부단장을 도우려고 지금도 밤잠을 줄여가며 뛰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하지 않는 자,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낙현 청장님께서 그 이름 앞에 내세울 것이 국세청과 신재현밖에 없다면, 제 모든 걸 걸고 거기에 기대지 못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국세청과 신재현의 이름값에 기대어 정계로 나갈 생각을 접으라는 뜻이다.
오낙현은 반박할 말을 생각해 보았지만, 민치호의 말대로 그가 내세울 것은 국세청장으로서의 이름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에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너무 달콤했다.
빈집털이가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민 청장이 얼마나 잘났든 간에 지금은 내가 국세청장이에요. 민 청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면 나중에 이 자리 앉고 나서 하세요. 지금은 내가 이 국세청의 방향을 결정하니까.”
그래 봤자 넌 내 밑이다.
그런 선언이었지만 민치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국세청장님도 저도 똑같은 공무원입니다. 저 위에 계신 분의 말 한마디에 잘려 나갈 수 있는 공무원이요.”
민치호가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가 누굴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정말로 그 자리마저 잃고 싶으세요? 아직 대통령님은 임기가 꽤 남으셨는데.”
이번에야말로 오낙현의 입이 틀어막혔다.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민치호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이건 제 경고입니다. 신재현을 이용할 생각은 아예 버리세요. 안 그러면 청장님은 저를 적으로 돌리셔야 할 겁니다.”
민치호의 무서움은 이미 몇 년간 느껴보았다.
저놈은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여기서 오기를 부려 대선 출마 선언이라도 하는 날에는 민치호와 신재현의 칼끝이 그를 향할지도 몰랐다.
손경진이 끽소리도 못 하고 제주도로 밀려난 걸 지금도 기억한다.
제주도 원장실에서 패배를 인정하던 전 라이벌의 축 처진 모습도.
그래도 내가 더 높지, 하고 덤벼보기에는 손경진의 말로가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랐다.
결국 오낙현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도전하기보다는 살아남는 걸 택하는 사람이었다.
민치호는 흘끗 오낙현을 곁눈질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청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오낙현이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청장실은 차분한 분위기를 되찾았지만, 정작 오낙현의 마음속은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처참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런 모욕을 들었으면서도 오낙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청장직에서 은퇴할 때까지는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없다.
숨 막힐 듯한 침묵만이 내려앉은 가운데, 멀어져 가는 민치호의 구둣발 소리만 울렸다.
그리고 민치호가 오낙현을 향해 살벌한 경고를 날리던 그 시각.
대화의 중심인 신재현은 청와대에 내빈으로 초대되어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