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각자 다른 생각들 (1)
서울 시장은 진지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리모콘을 턱에 대었다가, 소파에 꾹꾹 눌렀다가 건전지를 뺐다 끼우기도 하면서 손을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깊은 고민에 빠지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총선이 끝났습니다. 이번 총선은 국민의 심판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선거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젊고 파릇한 국회입니다. 좀 나쁘게 보자면 경험이 부족한 국회이죠. 한편으로는 우려가 있었는데요, 당분간은 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오늘 오전, 제1야당이 분당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22대 국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당의 원로 역할을 맡고 있는 재야의 정치인들이 있거든요. 그들이 이번 23대 국회에 당선되면서 당의 주도권을 쥐었는데 이제 개혁을 부르짖는 초선 의원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죠.
서울 시장은 혀를 찼다.
“쯧쯧. 저기서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척이라도 해야지.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나? 눈앞의 떡에 혈안이 되어서 결국 당을 쪼개는구만.”
어차피 남의 일이라 쉽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장 서울 시장 본인만 해도 저 상황에서는 당의 주도권을 내려놓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제1야당은 무주공산이기 때문이다.
중진 의원이 깡그리 갈려 나간 이때에 당을 휘어잡을 수 있는 기회를 순순히 내려놓기엔 아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초선 의원들의 거센 항의다.
당의 대다수를 차지한 데다 혈기가 넘치는 그들은 개혁을 부르짖으며 쪼개져 나갔다.
소속 의원의 숫자로 야당에 번호를 매기는 상황에서, 제1야당은 1이라는 숫자를 유지하지 못했다.
제1야당의 초선 의원끼리 모인 당은 제2야당이 되었고, 오히려 기존의 제1야당은 제5야당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원내교섭단체조차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원들이 탈당했다.
현 대통령을 배출한 당인지라 여당의 이름을 달고 있긴 하지만,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당에서 떨어져 나간 초선 의원들이 만든 당은 제3야당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1야당은 누구인가.
-신당에 아주 많은 의원들이 몰렸죠. 하지만 정상훈 대표는 그들을 다 받지 않았어요. 따지고 걸러서 받았단 말입니다. 오늘로 딱 몇 명이죠?
-150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1명만 더 입당하면 과반수가 되는 아주 의미 깊은 숫자입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제1야당이 되었죠?
-정상훈 신당에 입당 의사를 표시한 사람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들을 다 받으면 200명이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150명에서 멈췄단 말이에요. 이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전문가들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박사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사람은 정상훈 대표의 결정을 어리석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가 보기엔 아주 교묘하게 계산된 행동이라고 봅니다. 당의 몸집이 커지면 원하는 법안을 밀어붙일 수 있지만 그게 자칫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요. 국회를 장악하고 혼자서 독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항상 소수는 존재합니다. 그 소수가 외면받기 시작하면 신당을 반대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정상훈 대표가 초선이기 때문에 너무 큰 당은 감당하기 힘들 수 있어요. 본인이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거둬들인 거죠.
서울 시장은 리모컨의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네. 저 말이 맞지. 정상훈, 저 사람은 욕심을 접을 줄 아는구만. 당 대표 해먹겠다고 욕심내다가 당 쪼개먹은 영감들보다 훨씬 나아.”
서울 시장은 정세를 분석한 뉴스를 보며 깊이 침음했다.
공무원 출신이라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정치도 꽤 할 줄 알았다.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 대선에서 맞붙게 된다면 힘들 것 같았다.
국회에서 어떤 난리통이 벌어지든 그건 강 건너 불구경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대선 출마 선언을 위한 타이밍이었다.
이번 대선은 지금 국회만큼이나 무주공산이다.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튀어나올 게 분명한데 그중에서도 자신은 이력이 화려했다.
서울 시장은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라고도 불리는 자리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닌데…… 신재현한테 묻힐 게 뻔하단 말이지.”
그놈의 신재현이 문제였다.
총선 바로 전날까지 바쁘게 움직이던 조사단은 막상 총선이 끝나자 조용해졌다.
그야 이제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으니 기존의 조사를 마무리 짓느라 바쁠 것이다.
“그래도 그 똑똑한 놈이 이대로 조용히 묻힐 리는 없는데.”
서울 시장은 리모컨을 소파에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간 신재현은 잊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손안에 쥔 패를 조금씩 풀며 기자들의 관심을 유도했고, 덕분에 뉴스 탭의 상위 랭킹을 놓치지 않았다.
일반인이 본다면 ‘열심히 움직이는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치인인 서울 시장의 눈에는 노련한 선수가 보였다.
이 정도면 여론의 방향을 계산하여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다음 수는 뭡니까, 우리 부단장님.”
TV에서는 이제 길거리에서 만난 국민의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볍게 이번 정국의 감상을 묻는 말이다.
남녀노소 다양하게 마이크를 들이댔는데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조사단이 이번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국회의원의 비리를 밝힌 건 진짜 대단한데, 이대로 끝내기엔 좀 아쉽네요. 세상에 나쁜 놈이 얼마나 많겠어요.
-원래는 총선 때 놀러갈까 했는데 이번엔 와이프와 함께 한 표 행사했습니다. 조사단의 발표가 의사결정에 꽤 큰 도움이 됐어요.
-거 이왕 하는 김에 말이야, 국회의원 말고도 싹 다 털었으면 좋겠는데, 조사단이 해산한다고 해도 불만은 없어요. 조사단 없어도 이제는 공무원들이 잘 조사해 줄 것 같아서.
서울 시장은 TV를 켜둔 채 핸드폰을 들었다.
원하는 뉴스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검사들도 일어섰다! 이번 조사의 숨은 공신들.
-23대 국회도 검증이 필요하다. 국민의 목소리 빗발쳐.
서울 시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법부 아니면 입법부…… 둘 중 하나를 칠 수도 있겠네. 얌전히 해산할 성격이 아니지?”
서울 시장은 TV에 자료화면으로 나오는 신재현의 얼굴을 보며 말을 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서울 시장의 머릿속에는 대선을 향한 계획이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었다.
“일단 관심부터 빼앗아볼까. 어디 신당 대표님이 얼마나 깨끗하신지 봅시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니 본인이 제1야당의 대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당연히 캐면 뭔가가 나올 테고, 논문이든 자식 문제든 하나만 걸리면 흠집 내기는 쉽다.
그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신당으로 향하는 지지율도 떨어질 테고.
그리고 또 하나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전 상사인 정상훈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봐야겠어. 정상훈을 공격하면 뭐라도 반응이 나오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딱 봐도 신재현의 활약이 신당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모양새였다.
이 둘 사이에 뭔가 커넥션이 있다면, 정상훈의 위기에 신재현이 가만히 있긴 힘들 것이다.
뭔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한다면 그것 또한 약점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아무도 공략하지 못한 신재현의 약점이라면 정치 인생을 걸고서라도 한번 찔러볼 만했다.
“그럼 어디 우리 신당 대표님께 국회 신고식 한번 치러 드려야겠군.”
서울 시장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상훈을 공격할 재료를 모아오라는 명령이었다.
***
민치호는 감회가 새로웠다.
전 국세청장인 정상훈에게 상황 보고를 빙자한 한탄과 푸념을 들은 참이었다.
장장 30분에 달하는 전화였지만 끊고 나서 불쾌함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야. 이제 정말 날아가는군.”
물밑싸움 하는 법을 가르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품 안의 새는 언젠가 독립하는 법이라지만 신재현의 경우에는 빨랐다.
이제는 민치호보다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장 정상훈에게 한 경고만 해도 그랬다.
-민 청장, 아주 호랭이를 키워 놨어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경고를 날리드만. 근데 앞일을 아주 꿰뚫고 있어서 놀랐어.
민치호는 모든 행동의 목적이 결국 국세청에 국한되어 있었다.
비록 일이 커지긴 했지만 방해 없이 마음껏 탈세범을 잡고 깨끗한 국세청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신재현은 보는 것이 달랐다.
“이제는 제법 날 줄 안다 이건가.”
둥지를 박차고 떠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뿌듯하고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그간 있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민치호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부하 직원은 저렇게 생고생을 하는데 청장이라는 작자는…….”
민치호는 정상훈이 넌지시 일러준 것을 떠올렸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으나 정상훈은 장난하는 것 같지 않았다.
민치호는 혀를 차며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탓했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오낙현이 딴 맘을 품을 거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내 이 양반을 정말……!”
민치호는 기세 좋게 국세청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오낙현이 수건으로 난을 닦다가 반갑게 맞이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입니까? 서울에서 여기까지.”
민치호는 미소를 띠며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인데 눈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올리니 꽤 살벌했다.
오낙현이 순간 주춤할 정도였다.
“청장님,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민치호가 묻자 오낙현은 수건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평소라면 민치호의 분위기가 이상하단 걸 금방 눈치챘을 텐데, 오늘의 오낙현은 위험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만큼 들떠 있다는 뜻이었다.
“그야 민 청장과 신재현이 잘 해주고 있으니까 그렇죠. 이 세종시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귀에 활약이 들려오는데요. 민 청장은 좋겠습니다.”
물론 오낙현의 얼굴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다른 감정도 얼핏 스쳤다.
바로 부러움과 질투였다.
“조사단의 3차 결과 발표가 있은 직후에 청와대에서 제게 전화가 한 통 왔거든요. 국세청의 노력과 청장의 지원에 감사한다, 뭐 상투적인 내용입니다만 이런 일이 흔치는 않잖아요.”
대통령이 직통 전화로 격려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오낙현이 왜 이렇게 붕 떴는지 알 만했다.
더불어서 왜 오낙현이 그런 발칙한 꿈을 품었는지도.
오낙현은 민치호와 신재현, 둘 다 부러웠던 것이다.
지금껏 부하 직원의 인식은 잘 맞는 손발, 라인을 지탱해 줄 든든한 조력자 정도였다.
신재현의 경우에는 조력자를 넘어서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라 봐도 된다.
신재현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그를 발탁하고 키워낸 민치호도 덩달아 평가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국세청장이라는 이유로 격려를 들었으니, 조금만 숟가락을 얹으면 얼마나 큰 명예를 얻겠는가.
정상훈이 그랬듯 국회에 입성해 성공적으로 치고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 청장님도 했는데 나는 왜 안 되겠어? 거기다 신재현이 활약하는 지금 이 시점의 청장은 나야. 내가 명예를 갖는 게 맞지.’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오낙현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본 민치호가 비웃음을 던졌다.
불과 며칠 전, 정상훈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오낙현이가 이 판에 끼고 싶은 것 같아요. 자리 하나 내줄 수 있냐고 물어보던데. 언뜻 보니까 대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헛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발 뻗을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국세청장에게 민치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청장님, 얼마나 희망찬 미래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중지하시죠.”
“음? 무슨 소리입니까?”
“꿈 깨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