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다음 단계로 (6)
“반응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인기가 꽤 많을 것 같은데요.”
방금 전까지 살벌했던 분위기가 장난이었던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근황이 오갔다.
정확히는 국회에 대한 정보였다.
“새벽 4시쯤에 여당과 제1야당 쪽에서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새벽에요?”
신재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일반인이라면 상대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서라도 피하는 시간이다.
국회의원 중에 개표 방송을 놔두고 자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아침을 기다리지 않고 연락이 왔다는 건 그만큼 급했다는 뜻도 된다.
“제 예상보다는 늦은 겁니다. 개표 결과가 대략 잡히면 바로 연락 올 줄 알았거든요. 새벽 4시면 많이 늦죠. 아마 저들끼리 대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오혜라가 거들었다.
신재현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지루한 얼굴을 했다.
“선거 결과는 다들 예상했을 텐데요. 그 짓들을 하고도 잘 풀릴 거라 생각한 건가?”
신재현은 언뜻 불쾌하게도 보였다.
황인영의 얼굴에 절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청년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국회의 더러운 부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감히 짐작도 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황인영 의원님께서도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네요. 어떻게 보십니까?”
느닷없이 신재현이 자신을 지목하자 황인영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는 듯 없는 듯 보고 듣기만 하는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자리가 파하기 전에 인사 정도만 나누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신재현이 무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인사를 안 시킨 건 나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어서였나?’
황인영은 소름이 돋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말은 그런 게 아니다.
형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한정된 정보로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를 보여줘야 했다.
“거대 정당은 그 저력이 엄청납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듯 거대 정당 역시 망해도 10%는 나옵니다.”
“콘크리트 층 얘기인가요?”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여 당의 지지율이 오르면 또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선순환을 만들죠. 거대 정당에는 쓸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단장님께서 조사한 건 현직 국회의원뿐이잖습니까. 그동안 각 정당에서 빨아들인 인재는 현직 국회의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이번 일은 뭘까요. 역시 국민을 얕본 겁니까?”
“정확히는 계산을 실패한 거라고 봅니다. 그동안 거대 정당에 질려 하면서도 왜 무소속을 뽑지 않았는가. 그건 무소속 의원들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들 똑같은 놈이라는 생각도 있죠.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면 최선의 후보를 뽑는 게 아니라 최악을 피해서 뽑게 됩니다. 그럼 결국 검증된 거대 정당의 후보들에게 손길이 갈 수밖에 없어요. 정당이 얼마나 바보짓을 하든 공천과 경선이 있는 이상 최소한의 검증은 마치니까요.”
“그럼 황 의원님 해석에 의하면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들이 정당을 외면할 정도로 큰 실망을 했다고 봐도 될까요?”
“그게 신기한 겁니다. 낙선한 사람들 중에는 큰 불법 없이 탈세만 있던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까지 줄줄이 낙선했다는 건 현재 정당과 그들의 검증 과정 자체에 불신을 품었다는 거니까요. 저놈들을 믿느니 차라리 얠 뽑겠다, 이거 아닙니까. 이러면 당이 있을 의미가 없습니다.”
황인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망설이며 덧붙였다.
이 말을 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단장님이 대단한 겁니다. 공약이나 후보가 아니라 당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도 많은데, 당을 아예 배제시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업적입니다. 간접적으로 모든 당을 폭파시킨 거나 다름없어요. 거기다 23대 국회까지 원하시는 대로 개편이 가능하죠.”
신재현은 남은 인삼차를 홀짝이고서 무표정하게 주전자를 기울였다.
다시 방 안에 인삼과 도라지의 향기가 퍼졌다.
“현직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적인 분석에 가까운 견해로군요. 새로운 방식이라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말씀은 안 하시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역시 너무 대놓고 아부처럼 보였을까.
하지만 황인영으로서는 사실만을 말한 것이었다.
‘아부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데. 냉정하게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있다니, 대체 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저렇게 객관적이 되지?’
서른이 안 된 젊은이라고 자칫 겉으로만 판단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옆의 두 의원이 괜히 고개를 숙인 게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이 청년은 국세청의 6급 중간직으로 보고 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볼 때는 미래의 가치를 봐야 한다.
이 청년이라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아직 나이도 젊으니 이대로 잘 성장하면 국세청장은 무조건 올라갈 것이다.
이 청년이 국민의 사랑에서 벗어나려면 음주운전 뺑소니나 마약 같은 중범죄를 저질러야 할 텐데,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 탄탄대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황인영은 뻗어 나가는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었다.
당연한 걸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총선에 나오면 압도적인 지지율로 국회의원이 됐겠지. 앞으로 계속 실력을 보여줄 테니 어쩌면 대통령도…….’
신재현은 다시 꿀을 타더니 이번에는 정상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요. 싹 물갈이됐을 텐데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대체 누가 당 대표 자격으로 연락이 온 겁니까?”
“21대 국회까지 당 대표를 했던 사람입니다. 22대 총선에서 전략 공천을 했다가 낙선해 이번 조사의 손길에서 벗어난 운 좋은 사람이죠.”
전략 공천이란, 전국구로 이름값 먹히는 유명인이 자신의 텃밭이 아닌 다른 지역구에 나가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다른 당의 자리 하나를 뺏어오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전략 공천에 성공하면 불모지를 개척했다는 상징성도 있고 그만큼 민심이 돌아섰다는 증거도 된다.
당의 목소리가 커지는 건 덤이다.
“설마 제가 22대 국회의원만 조사할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단발성 이벤트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황인영이 눈을 치켜떴다.
신재현은 절대 이대로 끝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계속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면 국회에서 허튼짓을 할 수 있을까.
황인영은 무릎 위에 얹은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까 황 의원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국회 개편도 가능하다고. 제가 그렇게까지 건방진 짓거리를 하려는 건 아닌데, 이번 사태가 저로 인해 발생한 거나 다름이 없어서요. 최소한 책임은 지려고 합니다.”
“말씀하시죠.”
“기존 정당이 당분간 제 기능을 못하고 박살 날 겁니다. 무소속 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한 이 상황에서 국회는 혼란을 겪겠죠. 최선의 상황은 적당한 토론 끝에 새로 정당이 나오는 거지만, 아마 최악으로 갈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대부분이 초선 의원이셔서 열정이 가득하실 테고. 어쩌면 지난 국회보다 더 개판이 될 수도 있죠.”
“물갈이로 인한 부작용입니다만, 그건 어차피 한 번쯤 겪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성장통이라고 봐도 되겠죠.”
“하지만 질서 없는 모습이 TV에 보이면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역시 다 똑같은 놈들이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존 의원들 뽑을걸. 그놈들이 뒷주머니를 차도 일은 잘 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뭘 염려하시는지 이해했습니다.”
기껏 힘들게 물갈이를 해놨더니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이 들면 안 된다.
자칫하면 ‘차라리 뒷주머니를 차도 유능하면 뽑아준다’라는 기상천외한 문화가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이래도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끝장인 것이다.
다음 총선부터 당장 원래의 국회로 원상 복귀 될 테고 국회는 더한 성역이 될 것이다.
신재현 본인의 입장도 좁아지고 탈세범을 잡겠다는 취지 자체가 흐려질 수도 있었다.
“이제 막 국회 입성하신 분께 이런 요청은 힘드실지 모르겠지만 대표님께서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지 않게 막아주셔야 합니다.”
어려운 주문이었다.
아까 분명히 신당 인원을 국회 과반수가 넘지 않게 하라고 했다.
당으로 의원들을 끌어들여서 장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럼 다른 당이 생기는 걸 도와준 후에 그 당을 견제하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저런 걸 요청하는 신재현도, 그걸 또 받아들이는 정상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밀실의 뒷거래를 보면서도 그동안 봐왔던 국회와 다를 거라는 기대가 드는 건 왜일까.
아마 지금 나누는 대화에서 사적인 이익은 느껴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국회의 혼란을 잘 수습해 달라는 걱정 어린 신재현의 당부는 순수하게마저 느껴졌다.
‘이래서 급하게 개표가 끝나자마자 만난 거구나. 경고와 당부를 하려고.’
이런 거라면 다른 당의 회동을 보류하고 온 것도 이해가 갔다.
신재현은 정상훈을 유심히 보더니 슬쩍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표님도 조사 대상에서 빠져나간 건 마찬가지네요. 검증해 드릴까요?”
황인영은 입을 딱 벌리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던데, 만일 신임 당 대표에게서 뭐라도 나오는 날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다.
신재현이 예상한 것 이상의 혼돈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의 표정은 평온했다.
오히려 신재현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떠올라 있었다.
“어차피 새로 당선된 사람들 다 검증할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안 그러면 물갈이한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도 대표님은 다른 분들보다 엄격한 잣대로 공격이 들어올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안 괜찮다고 하면 봐주실 겁니까?”
“아니요. 제가 잘못 봤구나 하고 다른 분을 찾겠죠.”
“허허허, 그 말을 들으니 안심입니다. 오히려 반가운데요. 저번에 조사단 막 생기고 나서 부단장님의 자질이 의심받았을 때 면접 영상 푸니까 바로 조용해졌잖습니까. 그걸 보고 굉장히 부러웠거든요.”
“준비 철저하게 하셨나 봅니다.”
“제 인생 전부가 준비였죠. 손경진 그 양반처럼 싹싹 긁어도 안 나올 겁니다.”
황인영은 미친놈 보듯 자신의 당 대표를 바라보았다.
아예 공무원 시절부터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국회의원을 하기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 떠오르는 혜성이 될 수 있다는 건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신재현과 정상훈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황인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감성이었다.
“그래서 민치호 청장은 대선에 언제 나갈 거랍니까?”
총선이 끝난 지금 시점에서 당의 사활을 걸고 움직여야 할 빅 이벤트가 바로 대선이었다.
모든 정당은 자신들의 정치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대통령을 배출하길 원한다.
정상훈의 질문에 신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 청장님은 국세청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은퇴할 때까지 계실 거래요. 대표님도 그러셨잖아요.”
“다음에 국세청장 한번 하고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같은 국세청 출신이라는 공통 관심사 덕분인지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대화는 잡담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황인영은 의문이 떠올랐다.
“대표님, 이번 대선에 나가실 거 아닙니까?”
말을 던지고 나서 괜히 끼어들었나 아차 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정상훈이 먼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국회에서 아직 할 일이 많아서요. 방금도 부단장님이 당부하신 거 들었잖습니까. 제가 대선으로 가버리면 국회는 누가 정리합니까. 이 혼란을 만들었으니 저도 책임을 져야죠.”
이어서 신재현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황인영을 보며 그의 이력을 주르륵 읊었다.
“45세, 검사 출신. 스폰서 검사와 그 커넥션을 조사하려다 윗선의 압력으로 사직 후 국회로. 저번에 지나가다가 의원님께서 조세범 처벌법 개정 관련해서 싸우시는 걸 봤습니다. 감명 깊었어요. 아마 이번 대선에선 황 의원님이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역시 나에 대해 알아봤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황인영이 순간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되물었다.
“네?”
“국회의원 중 200명 넘게 물갈이 되면서 대선 후보 하실 만한 분들도 깡그리 갈려 나갔거든요. 그래서 황 의원님이 신당의 대선 후보라고요.”
처음엔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밀 회동을 하는 자리에서 저런 주제로 장난을 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짜라고?’
믿기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 황인영은 앉은 채로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