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다음 단계로 (5)
“대표님! 대승리입니다! 23대 국회는 우리 신당의 승리입니다!”
밤을 꼬박 새운 채 사무실에 모여 앉은 신당의 인원들은 다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현직 국회의원은 딱 4명밖에 없는 그야말로 소수당이었고, 지금 사무실에 모인 사람도 겨우 15명에 불과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위치도 무소속 의원들 바로 앞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주목을 받는 당이었다.
지금 사무실에 모여 있는 15명은 모조리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비례대표 냈으면 우리 원내교섭단체 설립도 가능했겠는데요!”
어제까지만 해도 낙선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벌벌 떨던 청년 하나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결과를 보니 신당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것이다.
국회의원이 20명 이상이면 원내교섭단체를 만들 수 있고 그 대표인 원내대표를 지정할 수 있다.
원내대표가 국회의 일정과 안건을 협의하는데 그중에는 상임위원회의 배정도 포함되어 있다.
법안이라는 게 처음부터 바로 본회의에 상정되는 게 아니라 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 걸 생각해 보면, 상임위 배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고민해서 좋은 법안을 올려도 상임위에서 다른 당에게 컷 당하면 그 법안은 국회 문턱조차 밟지 못한다.
반대로 아무리 악법이어도 상대 당이 숫자로 밀어붙이면 통과된다.
때문에 당정 활동의 첫 번째 목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이었다.
신당의 경우 비례대표만 포함되었으면 아예 원내교섭단체를 갖고 국회에 입성할 수 있다.
원내교섭단체 결성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이들이 아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의 대표이자 이제는 초선 의원의 딱지를 단 정상훈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비례대표는 국민이 직접 뽑은 게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약합니다. 비례대표 제도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우리 당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 4선 의원이 된 오혜라 의원은 상기된 얼굴로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제 막 국회의원이 된 기쁨에 냉철한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다선인 그녀는 정상훈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숫자만 늘린다고 당이 커지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실입니다. 이제 막 발족한 신당이 사람도 적은데 지지율만 높다? 주인 없는 떡이 길바닥에 널려 있는 것처럼 먹음직해 보일 겁니다. 아마 앞으로 우리 당에 가입하겠다는 사람은 차고 넘칠 겁니다.”
“오 의원님 말씀대로입니다. 선거 결과만 봐도 우리는 제3야당입니다. 지금 우리 목표는 원내교섭단체 결성이 아니에요. 국회 장악도 아니에요. 깨끗하고 달라진 국회를 보여 드리는 겁니다.”
이제 막 생긴 신당에 곧 금배지를 달 예정인 초선이 대부분이다 보니 감동과 의욕이 맺혔다.
그들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요. 기존의 저놈들이랑 똑같은 놈이 될 뻔했어요. 대표님께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반성했습니다. 제1야당이 되겠다는 욕심을 잠시라도 부려본 게 부끄럽습니다. 항상 초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정상훈과 오혜라가 고르고 골라 데려온 젊은이들이다.
그 나이대의 열정과 순수함을 그대로 가진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물론 정상훈에게는 정치적 생각도 있었다.
소속 국회의원이 전부 지역구라면 여론에 어필하기도 좋고 소수당임에도 국회에서 큰소리치기가 좋다.
그러나 벌써부터 순수한 젊은이들에게 이런 어른들의 생각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저 때가 참 의욕 넘치고 좋을 때지.’
어차피 모진 세상 좀 겪다 보면 이상을 어떻게 현실에 녹여야 할지 알게 된다.
젊은이가 보는 눈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예전의 썩은 국회의원처럼 되는 순간, 정상훈이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겠지만.
“슬슬 나가야겠네요.”
정상훈은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5분을 지나자 밖이 슬슬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총선 결과에 따른 기자회견 있지 않습니까?”
축제 분위기던 젊은 의원들이 물었다.
“그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아니, 기자회견에 늦더라도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젊은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총선 직후, 신당의 승리 선언을 하는 중요한 자리이다.
첫 대외 활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때로는 공식 활동보다 비공식 활동이 더 중요하답니다.”
오혜라 역시 주섬주섬 겉옷을 걸쳐 입었다.
“첫 기자회견보다 더 중요한 비공식 활동이요? 혹시 다른 당 대표들과 회동하시는 겁니까?”
젊은이의 호기심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는 묻지 말아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정상훈은 그에게 면박을 주지 않았다.
그랬다간 초선 의원의 입을 막아 버리는 기존의 당과 다를 바가 없다.
대신 미안한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웬만한 건 공유하겠지만 이건 정말로 말할 수 없는 비밀 회동입니다. 중요한 분을 만나러 가거든요.”
정상훈의 말에 의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 시점에 쉬지도 않고 모든 걸 다 제쳐둔 채 새벽같이 만나러 나간다니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이해 한 것이다.
“10시 전까지는 최대한 돌아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황인영 씨는 저랑 갑시다.”
“……예?”
구석에서 가만히 핸드폰으로 개표 결과를 확인하던 40대 초반의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젊은이들 사이에 끼지 않고 홀로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왜 중요한 자리에 그가 따라가는지 의아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가시죠.”
잘못 부른 줄 알았지만 정상훈의 시선은 그에게 꽂혀 있었다.
황인영이 주춤 일어나 둘을 따라나섰다.
“대표님, 왜 저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당사에 남아 있는 다른 젊은이들 같았으면 어딜 가는 것이냐, 누구를 만나는 것이냐는 질문이 날아왔을 텐데 황인영은 자신의 가치를 먼저 물었다.
정상훈이 싱긋 웃었다.
“이런 면이 마음에 들어서요.”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지만 황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빠르고 물어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
정상훈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차를 움직이는 내내 조수석에 앉은 황인영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총선에 대한 이야기조차 말이다.
목적지에 내린 그들은 잠시 종로의 골목을 걸었다.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기사 식당 앞을 지나자 환호성이 왁자지껄하게 흘러나왔다.
따스한 봄바람에 떨어진 목련이 바닥에 새카맣게 눌러 붙어 있기도 했다.
아직 사람이 오가지 않는 종로 골목은 총선과는 상관없는 별세계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찻집으로 들어섰다.
한옥을 개조한 것처럼 보였는데 중앙의 마당에는 벚나무 한 그루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벚꽃이 피면 꽤 운치 있겠다 싶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배치된 한옥 중 가장 안쪽의 별채로 안내받고 나서, 정상훈은 모든 창문을 닫았다.
자리가 넓은데도 테이블의 한쪽은 아예 비워둔 채 반대쪽에 세 명이 나란히 앉은 상태였다.
어지간히 높은 분이 아닌 이상 이런 대우는 하지 않는다.
정상훈보다 윗줄이라면 누굴까.
방 안이 조용하자 황인영은 자꾸만 생각이 치닫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쓸데없는 상상을 멈춰야 하는데도 그랬다.
‘당 대표 회동인가? 그럼 굳이 내가 필요할 이유가 없는데. 내가 초선 때 나댄 것 때문인가? 다른 당을 장악하라고? 아니, 이것도 이상한데. 차라리 당선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게 국회 장악하기 훨씬 쉽지. 아니면 뭐지, 진짜 대통령이라도 나오는 건가?’
신당 대표인 정상훈은 총선 전보다 앞으로가 더 바빠질 것이다.
오혜라는 또 어떤가.
신당의 유일한 4선 의원인 그녀는 여기서 가장 정치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아마 원내대표를 맡을 확률도 높았다.
침묵 속에 차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10여 분을 더 기다렸을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정상훈과 오혜라가 곧바로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말석에 앉은 황인영 역시 넥타이를 조이고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까마득하게 어린 청년이었다.
“흡!”
황인영이 눈을 부릅떴다.
절로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자 이번에는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신재현이었어!’
경악과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을 느긋하게 지나친 청년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비워둔 상석에 가서 앉았다.
그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익숙한 손놀림으로 구석에 마련된 따뜻한 보리차를 물잔에 따랐다.
그가 보든 말든 고개를 숙인 정상훈과 오혜라가 자리에 앉았다.
누가 봐도 윗줄을 대하는 공손한 태도여서 황인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가 위아래로 떨리며 딱딱 소리가 났다.
상식의 파괴 운운할 수준이 아니다.
전 직장 상사이자 청장, 그리고 현재는 제3야당의 대표인 정상훈과 4선 의원인 오혜라가 극진하게 대하는 모습이라니.
정치가 원래 이런 것이라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서 황인영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들의 모습을 그냥 보고 넘겨서는 안 된다.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는 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황인영은 절로 손을 모으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극진한 예였다.
황인영을 힐끗 쳐다본 청년이 얇은 목도리를 벗어 옆 의자에 아무렇게나 올려두었다.
3명이 1명을 마주 보는 모양새였다.
“오늘 기자회견 있다고 들었는데요. 연설문 준비는 잘하셨어요? 승리 연설만 준비하셨죠?”
“당연한 일이죠. 예견된 결과였으니까요. 이렇게 좋은 판이 깔렸는데 그 위에서 춤도 제대로 못 춘다면 내려가야지요.”
기본으로 제공되는 따뜻한 보리차에 양손을 녹이던 신재현이 피식 웃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총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신재현은 시종일관 여유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고 정상훈은 정중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잠시 잡담으로 분위기를 풀고 있자 신재현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주문한 인삼차가 들어왔다.
주문을 받는 것과 서빙 모두 사장이 직접 하고 있었다.
이 안에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하니 영업시간 전에 통째로 빌린 듯싶었다.
젊은 친구가 인삼차라니 참 특이한 취향이다 싶었더니, 옆에 함께 들여온 자그마한 단지에서 꿀의 향내가 확 풍겨왔다.
정상훈이 일어서서 청년에게 인삼차를 따라주자 청년은 꿀을 한 숟가락 넣고 젓더니 한 숟갈 떠서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잡았다.
이걸 보면 어리구나 싶다가도. 스스럼없이 정치인들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걸 보면 5선쯤 당선된 국회의원 같기도 하고.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신재현은 단숨에 인삼차를 반쯤 들이켜더니 그제야 발견한 것처럼 오혜라에게 말을 걸었다.
“오 의원님, 서로 얼굴 맞대고 얘기 나누는 건 처음이죠?”
오혜라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단장님.”
“뭘요. 그렇게까지. 오늘은 일단 얘기 시작하기 전에 경고 하나만 해도 될까요?”
신재현은 젊은이 특유의 총기 어리고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두 의원을 훑었다.
아직 황인영의 차례는 오지 않은 듯싶었다.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황인영은 긴장한 채로 말을 기다렸다.
“개표 결과랑 여론을 대충 훑어보니까 신당에 제1야당이 될 것 같더라고요. 그것도 압도적인 숫자로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어요.”
판도 보는 눈도 꽤 있네, 하고 황인영은 내심 감탄했다.
지금이야 신당은 15명에 불과하지만 곧 수많은 의원들이 입당을 신청할 것이다.
지는 해와 뜨는 해의 차이는 명백하다.
“저도 그렇게 예상합니다. 정말 새로운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든, 가라앉는 배를 버리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든 신당이 다수를 차지하겠죠.”
“근데 4년이란 시간은 길잖아요. 사람이 변하기에 아주 길죠.”
신재현의 눈이 번뜩였다.
잘 벼려진 칼을 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 눈앞의 청년이 무명일 적에는 국세청에서 사냥개, 칼의 취급이었다고 들었다.
그 기세가 아직 죽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웠다.
옆의 두 중년 남녀가 얕보거나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진중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신재현의 경고가 이어졌다.
“저는 우리나라 국회와 정치제도를 사랑해요. 많은 사람이 애써온 만큼 잘 짜여 있거든요. 부작용도 있지만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어요. 그렇지,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당정 싸움 말이에요.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당이 다수를 차지해 버리면 그 순간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고 그 당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게 결정되잖아요.”
신재현은 인삼차가 마음에 드는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사람마다 생각과 사상이 다를 수 있죠. 그러니까 국회에서 서로 싸우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국익과 관련된 현안이면 하나가 되어 해결한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청년의 말은 이상적이고 약간은 꿈같았다.
‘이런 데서 젊은 면이 보이는구나.’
하지만 이상주의자의 공허한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눈앞의 청년은 절대 안 된다는 성역을 깨부순 사람이니까.
“그래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어느 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엄연히 국민의 선택을 받으신 대표님이시니 앞으로는 감히 이런 경고는 드리지 않을 겁니다. 대표님께서 변치 않으시길 바랄 뿐이죠.”
“이번 선거는 순수하게 저희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초심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국회는 성역이 아니니까요. 언제고 부단장님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믿습니다, 대표님.”
당의 힘을 너무 크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와 그걸 진지하게 받는 당 대표를 보며 황인영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본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