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다음 단계로 (4)
-안녕하십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총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전문가 패널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의 중요성은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번엔 특히나 중요했다.
-저는 이번 총선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물갈이다. 단어가 조금 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는데 이보다 더 딱 맞는 표현을 찾기가 힘듭니다.
-전혀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조사 결과를 보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딱 300명입니다. 그런데 그중 200명 이상이 최소 하나씩은 범죄를 저질렀어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국회가 얼마나 중요한 곳입니까? 국민을 대표해서 법을 만드는 곳이에요. 거기서 만들어진 법으로 국민이 처벌을 받는단 말입니다. 유세 가보면 항상 비슷한 말을 해요.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 이게 다 국민 기만입니다.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교수님께서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조금 진정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국회의원들이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는 게 되겠습니다. 그것도 전체 3분의 2를 넘어서는 대다수라는 데서,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아주 타이밍이 좋아요. 총선 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화가 나도 국민으로서는 별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잠시 말씀을 이어보자면, 총선 이후였다면 이렇게 죄를 밝히는 것조차 힘들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200명이 넘는 의원들을 어떻게 처벌하겠습니까. 온전히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맡겨야 하는데, 현직 국회의원을 건드릴 수 있는가 없는가는 둘째 치고 사법부의 부담이 굉장히 막중해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간편하게 물갈이가 가능합니다. 그저 국민이 한 표를 행사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게 바로 조사단의 영리한 점입니다. 국회의원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그걸 넘겨받는 검찰과 법원은 더 힘들거든요. 한두 명도 아니고 말이죠. 조사단은 그 부담을 덜어준 겁니다. 더불어서 국민에게 선택권을 넘겼어요. 국민의 대표니까 국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조사단이 이런 것까지 계산해서 활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판단을 굉장히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행정부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준 게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어요. 왜냐하면 이게 양쪽에서 포화를 맞을 수가 있거든요. 일단 입법부는 입법부대로 반발이 일어납니다. 국민의 집중 포화도 조사단과 사법부로 쏠릴 거예요. 수사 결과가 마음에 안 들거나 처벌이 마음에 안 들 수가 있거든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제 생각에는 일부러 총선 전에 조사단이 끝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양쪽으로 부담되는 걸 절대 모를 리가 없거든요. 대통령이야 어차피 연임 안 되니까 ‘그만두면 끝이다’하고 질러 버릴 수 있지만 조사단은 공무원이잖아요. 어중간하게 끝내면 총선 후에 국회의 공격이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고 해도 조사단의 행적이 낮게 평가되는 건 아닙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어요. 현직 국회의원을 전수조사 한다는 것 자체가 유례가 없는 일이거든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이번 기회에 깨끗한 국회, 일 잘하는 국회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갖고 계실 겁니다. 그 어느 총선보다 후보를 판단할 근거가 많거든요. 오늘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자리에 여당과 제1야당의 의원을 모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 그건 저도 좀 궁금하네요. 어떻게 좋은 말로 포장하든 국회의원 대다수가 불법을 저지른 건 사실이거든요. 약 10년, 20년 전에 국회의원들 아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군 면제를 받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죠. 지금은 그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엄연한 사실을 두고 양 당에서 어떤 견해를 밝힐지 꼭 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여당이든 야당이든 입장을 밝히지 않는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기자들 앞에 나서야 하는 날이에요. 이따 기자들이 당사에 가지 않겠습니까? 그때 아마 양 당의 분위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공중파에서는 비교적 차분한 논조로 대화를 나눴지만 인터넷은 달랐다.
거름망 없는 날것의 여론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속보] 1시 투표율 현재 53.1%로 역대 최대
[종합] 조사단 3차 결과 발표(명단 포함)
-이번 발표로 인하여 국회의원 300명 전부에 대한 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은 파악한 혐의점과 탈세액만 정리했을 뿐이라며, 앞으로 수사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사단원 100여 명에 더불어 검찰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후, 국세청의 일반 직원들도 행렬에 합세했다.
총선 직전에 가서는 300명도 넘는 인원이 이 대규모 조사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현직 국회의원 전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으니까.
조사단이 국세청 홈페이지와 검찰청 홈페이지에 올린 자료는 거의 매일 갱신되었다.
공식적으로 신문에 발표한 세 번의 발표 외에도, 여죄가 파악될 때마다 해당 국회의원의 이름 옆에는 새로운 혐의가 추가되었다.
사람 숫자가 많아서 국민이 원하는 정보를 콕 집어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갱신된 내용을 실어 나르는 것은 기자들의 몫이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기사마다 뜨거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름망 없이 이야기가 오가는 것은 단연 커뮤니티였다.
[지금 국K-1님들의 반응이 마비된 이유 말해준다]
-저분들 반응은 크게 3단계로 나뉨. 1단계는 일단 잡아떼고 남 탓 하는 거. 흔히 하는 말 있잖아. 음해입니다, 오해입니다, 저런 헛소리는 믿으면 안 됩니다 하는 거. 웬만한 의혹은 여기서 컷이 됨.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폭로전이 되는데 보통 메신저를 공격하는 게 2단계임. A가 B한테 의혹을 제기했다 치면 A의 뒷조사를 해서 형이 투자 사기를 했네, 딸이 마약을 했네, 이런 걸 까발리는 거임. 그럼 B는 살고 A는 뒈짐. ㄱㅅ
3단계는 손절임. 그 왜 비상대책위원회랍시고 만들어서 걔네가 자체적으로 징계 내리잖아. 도저히 실드가 안 될 때 이 방법을 씀. 잘못을 했지만 그건 개인의 일탈이니 당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는 깨끗하다! 하고 잘라내는 거임.
자, 이제 이번 사태를 보자. 당의 높으신 분들 대부분이 명단에 올라 있다. 조사단 부단장의 명성이 있으니까 1단계는 물 건너갔고, 2단계도 불가능함. 근데 이번에 걸린 놈들이 다 중진 의원이라서 손절 자체도 불가능함ㅋ 손절하려면 당 자체를 부숴야 됨. 여기서 섣불리 기자회견 하고 나섰다간 온 국민의 어그로 혼자 다 얻어먹고 장렬히 산화하는 거야.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진 거임.
└나 국회에서 운전기사로 일했었는데 여기서 빠진 것만 알려 드림. 왜 당 차원의 대응이 없냐면 당이 거의 깨진 거나 다름없어서임ㅋㅋ 여당, 야당 중진들이 다 이번 총선을 못 버티고 감옥 가게 생겼는데? 운 좋게 총선에서 된다고 해도 검찰이 가만 놔둘까? 그래서 거의 두고 보자는 풍조가 강함. 뒈질 놈은 뒈지고 살아남은 놈은 23대 국회에서 뭉치자는 느낌임.
└형 이런 거 말해도 됨? 운전기사라며. 짤리는 거 아냐?
└우리 의원님도 이미 징역 각 서서 괜찮음^^ 어차피 백수 됨
└앗, 아아. 여기서 이런 부작용이.
└괜찮음. 차라리 잘됐음. 십새들 안 보이는 데서 갑질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아냐? 주차장에서 차 늦게 뺀다고 조인트 까여 봄? 글고 걔네 맨날 TV에서 국민국민 노래 부르잖아? ㅋㅋ술자리에서 개돼지라고 한 것도 들어봄. 놀랍게도 실제다.
└뭐야, 평범한 국회잖아? 그래서 누가 그랬음? 말해주고 가라.
└고소당할까 봐 그건 좀; 의원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노잣돈을 내 돈으로 드릴 순 없자너.
└의원님, 사식은 이쪽 분이 쏘신답니다. 몇 년 살든 밥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대부분 국회에 대한 실망과 총선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지만 개중에도 반대 의견은 있게 마련이다.
[너네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지금 국회의원이 나쁘다는 것도 다 신재현이 한 말뿐이잖아. 신재현이 대단한 건 인정하는데 왜 다들 의심의 여지도 없이 믿어? 신재현이 거짓말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나는 차라리 국회의원을 믿겠음. 애초에 국회의원 2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게 말이 돼?
└나왔다! 얘는 대체 뒤통수가 얼마나 깨져야 정신을 차릴 거냐?
└응. 너는 국회의원 믿어. 나는 안 믿을 거니까.
└국회의원 대다수가 불법일 리 없다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ㅋㅋ
└시밸럼아, 나 여당 뽑았다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중인데 어디서 불난 데 기름을 붓고 ㅈㄹ이야, 뒈질라고. 야, 어디 사냐. 그 대가리 내가 깨줄라니까. 어디 사냐고!!!!!
└급발진한다! 아재요, 진정하십쇼. 세상에 저런 놈도 있는 겁니다. 괜히 심력 낭비하지 말라고.
└위에 아조씨가 그라데이션 분노 해줬으니까 나는 진지 빨고 설명해줌. 국세청이랑 검찰청 홈페이지 가보면 상세한 불법 행위랑 탈세 내용이 공개되어 있음. 증거도 개인정보나 수사 중인 것 빼고는 대충 설명되어 있고. 전국에 국회의원 빠가 얼마나 많을 거라고 생각하냐? 걔네가 검증 안 해봤을 것 같냐?
└당장 국회의원 본인들이 변호사 사서 검증해 봤을걸? 그런데도 조용하다는 건 뭐다? 팩트라는 거다.
└ㅋㅋㅋ만약에 조사단에서 조금만 실수했으면 바로 명예훼손 고소장 접수했을 거임. 기자회견 한답시고 감성팔이도 좀 하고.
└근데 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듦. 신재현이 선거 결과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느낌 안 드냐? 만약에 진짜로 신재현이 딴 마음 먹고 정보를 편향되게 준 거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때 가서 조지면 되지. 국회의원이 왜 지금 말 한마디 못 하고 조사단이 때리는 대로 얻어맞겠냐? 이제 국민은 개돼지가 아님.
└저; 죄송한데 본인이 생각해도 좀 오글거리지 않나요?
└뽕 차서 괜찮음. 현직 국회의원을 조사해서 물갈이한다는 게 어느 나라에서 가능하겠냐구.
국회의원 편을 드는 사람은 인터넷에서도 비웃음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투표가 끝나자, 경천동지할 출구조사 발표가 튀어나왔다.
[속보] 투표율 80.1%로 마감
-제23대 총선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인 80.1%로 마감되었다. 국회의원 전수조사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 투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유권자가 늘어났다는 분석이다.
└솔직히 이번에는 고민할 것도 없었음. 우리 지역구는 깨끗한 의원님 계셔서 고대로 찍었다~
└부럽다. 우리 동네는 혼돈이었음. 아침에 투표소에서 우리 의원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울고불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대한민국에서 개표 방송은 하나의 예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전 국민이 참가하는 축제인 것이다.
개표가 하나둘 진행되고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여당과 야당 당사를 비추는 카메라에는 연신 죽 쑤는 중진 의원들의 얼굴만 잡혔다.
10시쯤 되었을 때는 낙선한 의원들 대부분이 당사를 떠났다.
다음 날 아침 확정된 총선 결과는 놀라웠다.
[종합] 22대 국회의원 중 238명 낙선
└명단에서 불법이나 비리 조금이라도 있던 놈은 가차 없이 낙선했음. 내가 방금 확인하고 옴.
└이게 국민이다! 잘 봤냐, 이놈들아!
└근데 초선이 국회 대다수 차지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괜찮을까? 정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입법 이상하게 하면…….
└깨끗한 의원들 살아남았잖아. 기존 국회에 9선 8선 이런 고인물 있던 것보다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음.
└당선자들 거의 무소속이던데 당 어케 되는 거임?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면서 새 당 만들 거임. 우리는 날카롭게 지켜보기만 하면 됨.
새로운 국회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이제 관심은 다시 조사단으로 기울었다.
└조사단은 지금쯤 축배를 들고 있겠지? 이제 그럼 조사단은 목표를 달성했으니 해체되는 건가?
└기존 조사하던 거 수사는 이어서 해야지. 그거 하는데 한참 걸릴 듯.
└좀 아쉽네. 우리나라에 물갈이할 곳이 국회만은 아닐 텐데. 저거 그냥 상설 기관 하면 안 되나?
└어디든 고이면 썩음. 특히 조사단은 힘이 너무 커졌잖아. 슬슬 해체하라는 압박 들어갈걸. 근데 국회만 치고 해산하기엔 아깝긴 하네. 몇 개만 더 치지.
사람들의 예상은 각각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인 것이 있었다.
바로 조사단에서는 지금쯤 승리자로서 기쁨에 취해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승리의 주역인 신재현은 홀로 종로의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들뜬 대한민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
그는 한옥집처럼 보이는 찻집 앞에 멈춰 서서 굳게 닫힌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신재현 역시 총선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탈세액이 보였고 잡을 놈은 아직 많았으니까.
-딩동.
한옥 대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벨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한복을 입은 사장이 손수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의 성공에 기뻐하며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