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86화 (386/500)

386화. 미답의 영역 (5)

이런 말이 있다.

-나만 아니면 돼~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의 몰락은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지금 하동문이 조사단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는 영상을 본 거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그랬다.

그러나 관계자는 어떨까.

하동문의 가장 가깝다는 네 심복은 각각 자신의 집이나 사무실에서 TV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권력으로서 떵떵거리고 살 줄 알았던 하동문이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산은 가까이 있을 때 높은 줄 알고, 오르기 시작해야 힘듦을 안다.

국회의원 내에서 하동문의 손발이나 다름없던 심복이었기에, 이들은 하동문이 얼마나 큰 산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동문이 원하는 법안은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었다.

국회에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는 국회의원은 없다.

그렇기에 이 네 명은 간이고 쓸개고 모조리 팔아서라도 하동문의 옆에 붙어 있던 것이다.

하동문의 개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지금쯤 이 장면을 지켜보는 다른 국회의원들도 놀라고 있겠지만, 심복 네 명의 경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진짜 이게 가능하다고?”

신재현이 처음 조사단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쳤다.

국세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하긴 했지만 이렇게 단숨에 하동문을 잡아 처넣을 줄이야.

그동안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라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수사기관은 국민의 대표라는 입장을 존중해서, 출석 요구로 시작하곤 했다.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가서 수갑을 채우고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끌고 나온 일은 없었다.

-성역은 없다.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심복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지위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남아야 해. 그래야 다음이 있다고…….”

네 심복 중 가장 먼저 국세청에 출석했던 최영설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매니큐어가 벗겨져 입술에 묻고 손톱에 핏방울이 맺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살아남아야 한다고!”

제1야당의 권력자 옆에 붙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자리 또한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치열했으니까.

하동문이 꿇으라면 꿇고 기라면 기었다.

“아니, 근데 마당이 무슨 다이아 광산이야? 미친 영감이 다이아를 저기다 묻어놔? 이건 빼도 박도 못 하잖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를 클로즈업한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군데군데 섞여 있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났다.

색을 봐서는 상급품이 분명했다.

핑크 다이아는 색이 다양했는데 당연하게도 진할수록 값이 비쌌다.

등급도 따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흐릿한 페인트에서 라이트, 팬시 인텐스 등을 거쳐 가장 진한 팬시 비비드까지.

8단계의 등급 중에서 저 정도 색이면, 6등급에서 7등급에 속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저 영감은 가진 것도 저렇게 많으면서 나한테는 겨우 회사 하나 갖고 생색을 낸 거야?”

사람을 다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동문은 뭔가를 줄 때는 절대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그에 합당한 충성을 증명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온갖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야 하동문 입장에서는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회사를 맡기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제 와서 최영설은 서운한 것만 기억났다.

더불어 어떻게든 형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변호사, 변호사한테 물어봐야 해.”

최영설은 다급히 핸드폰을 누르다가 화면을 가득 채운 신재현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자신 있어 보이는 청년의 얼굴에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난주에 하동문 의원님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현직 국회의원 네 분께서 직접 국세청에 출석해 모든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최영설은 이를 까득 갈았다.

“저 영악한 새끼!”

정치인인 최영설은 청년이 뭘 요구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예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구만!”

그렇게 요란하게 출석 요구서를 전달했으니, 신재현이 말하는 네 명이 누구인지 기자들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장 자기 살겠다고 기자들에게 정보를 팔 국회의원들도 수두룩했다.

시간이 없었다.

“저런 놈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최영설은 소파에 핸드폰을 냅다 던졌다.

조금이라도 형을 줄이기 위해 최영설은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다.

지금 성난 군중 앞에 서서 물어뜯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미 신재현이 등을 떠민 상황에서 주저할 수가 없었다.

타이밍마저 저 청년이 정해준 것이다.

지금 나서라고.

“괴물 같은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이렇게 다 죽여야만 속이 시원하냐!”

최영설은 화면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 김 비서. 지금 당장 기자회견 준비해.”

강자가 무대를 만들고 올라가서 춤을 추라고 요구하는데 감히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하동문에게 설설 기었듯 최영설은 상대가 누구든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상대가 백발의 노인이든 새파랗게 젊은 놈이든 상관없다.

지금은 신재현이 강자였다.

***

[속보] 제1야당 3선 의원 최영설 기자회견(전문)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 제1야당의 하동문 의원에 대한 불미스러운 사건은 이미 보셨을 겁니다. 신재현 부단장님이 말씀하신 가장 가까운 측근은 제가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저는 2선 시절에 하동문 의원에게 발탁받아 당의 중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단순히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중임에는 하동문 의원의 비밀스러운 일탈을 돕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동문 의원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최영설을 필두로 네 명의 심복이 앞다투어 기자 앞에 섰다.

미리 연설문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들의 회견은 날것 그대로였다.

그래서인지 의원들의 심경과 초조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저의 변명일 뿐입니다. 저는 하동문 의원의 실체를 알면서도 가담했습니다. 비록 제가 2선 의원이었다 해도 그를 막았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의 민낯을 국민 여러분 앞에 낱낱이 밝혔어야 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한 제 잘못이며, 권력 앞에 꺾인 제 불찰입니다.

최영설은 대본 없이 즉석에서 지어내는 말임에도 영악하게 굴었다.

국민도 안다.

당시 2선이었던 최영설이 어떻게 4선에게 덤비겠는가.

지금은 3선이라 해도 5선에게 어떻게 쓴소리를 하겠는가.

가담한 것은 맞지만 힘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동문에게 시선이 쏠리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바짝 엎드렸다.

국민의 분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 하동문에게 향하도록.

또 다른 심복인 이서준은 한술 더 떴다.

-저는 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5선의 대선주자란, 같은 국회의원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조사단이 아니었다면 하동문은 순조롭게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비리를 쌓고 사리사욕을 채웠겠지요. 저 또한 ‘이래도 되는구나’ 하고 제2의 하동문이 되었을 겁니다. 국회에서는 그를 보고 더한 놈들이 나왔을지도 모르고요. 저는 분명 나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앞으로 국회의원은커녕 범죄자로서 구속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조사단에게 감사합니다. 이 국회가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기 전에 빛을 밝혀준 점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마땅한 죗값을 받을 것입니다.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습니다.

그는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굴었다.

그 모든 것이 계산이었지만 결국 화살은 하동문을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그물이 던져진 것이다.

‘이 정도면 만족하지? 제발 나는 불구속 기소로 끝내주라.’

카메라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네 명의 심복은 신재현에게 빌었다.

***

기자들은 빠르고 열정적이었다.

전 국민의 관심이 높기도 했지만 워낙에 캐낼 것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딱 하루 만에 유진환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렵지는 않았다.

국회에 들락거리는 기자라면, 국회의원과 국회 공무원을 취재하는 것만으로도 유진환이 하동문의 오른팔이라는 걸 쉽게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어느 정당이든 의원이든 전문가의 자문을 듣고 자료를 모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책 연구소의 실장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이 이상했지.

-어제 낮, 조사단 사무실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남자가 하동문 의원의 정책 자문임이 밝혀졌습니다.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하동문 의원의 돈세탁과 비자금 및 페이퍼 컴퍼니 관리를 자문하고, 검은돈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조사단이 일찌감치 이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파헤치던 중에 막다른 길에 몰린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소식통은 전했습니다.

그가 바로 신재현 부단장이 말한 하동문 의원의 측근 Y 모 씨로, 이제 그가 가져온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입니다.

-조사단이 불구속 기소를 진행할 50명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덧붙여 이는 시작에 불과하며, 아직 하동문 의원과 그 라인의 불법에 대해서는 조사가 한창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조사단이 밝힌 명단에는 여야 전반에 걸쳐 다선 의원들의 이름이 올라 있어 큰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대규모 조사를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국회의원 게이트로 명명…….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당장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가 73.1%, 총선을 기다려야 한다가 26.9%로…….

-……전문가분을 모셔서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국민 여론이 뜨거운데요. 당장 오늘만 해도 국회 앞에 대규모 시위가 예고되어 있죠. 집회 신청된 걸 보면 5만 명이라고 신고가 되어 있어요.

-먼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국회 해산은 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70%가 넘게 나오는 이상, 국민께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의견의 진정한 의미는 이겁니다. 어차피 다음 달에 총선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선례를 남기자는 거다, 국회의원이 특권층이나 성역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이며 국민의 부름을 받은 봉사자라는 걸 강조하겠다는 뜻이죠. 이번에 국회 게이트라고 명명될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생한 만큼, 국회 자체를 정화하자는 뜻인 겁니다. 물론 그게 시간 낭비, 돈 낭비라는 의견도 있어요. 당장 다음 달이 총선이니까요. 모든 국회의원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요.

-대통령이 국회 해산은 헌법상 불가능하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대신, 조사단에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국회의 정상화와 투명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통령도 대놓고 아무도 조사단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국무회의에서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또 한 명, 화면을 보며 덜덜 떠는 사람이 있었다.

“뭐야, 하동문이 왜 저렇게 순식간에 나가떨어져?”

여당의 5선 국회의원인 차주혁이었다.

하동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리가 덜할 뿐, 그도 찔리는 것은 많았다.

이번엔 어차피 총선이고 대선이고 물 건너갔다.

그래서 하동문이 잡혀가던 날, 차주혁은 아예 해외로 튀는 것을 생각했다.

몇 년만 외국에 나갔다 들어오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차주혁은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져 있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국회의 투명화를 위해, 저 차주혁 역시 함께하겠습니다. 그간 제 부족함으로 인해 있었던 실수나 잘못, 그 모든 것을 조사단에 자진해서 증언하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국회의원들이 스스로의 잘잘못을 국민 앞에 숨김없이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이, 바로 국회 정상화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차주혁은 부르기도 전에 조사단 본부 앞에 나타났다.

바로 일주일 전, 유진환이 서류에 불을 질렀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 모든 사태가 당의 최고위원으로서 제대로 일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차주혁은 바닥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저의 모든 허물을 국민 여러분 앞에 낱낱이 드러내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겠습니다.”

현직 5선 국회의원이 출석 요구서를 받기도 전에 자진 출석하며 무릎을 꿇은 초유의 사태였다.

그를 지켜보는 기자 중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린 차주혁의 머리 위로, 셔터 누르는 소리와 플래시 터지는 불빛만이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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