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 뭐 하냐 (2)
-사라락.
손끝에 종이가 걸렸다.
하동문을 잡아넣을 근거가 모조리 여기에 있었다.
32장으로 정리한 이 보고서는 이래 봬도 약식이었다.
제대로 정리하면 파일철로 가득 채운 상자가 3개는 나온다.
나는 종이 옆면을 쓰다듬었다.
삐져나온 종이가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공무원 생활 몇 년 하면 가장 빨리 느는 것이 공문서 작성하는 것과 바로 이 종이 추리기다.
나는 마치 제본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러운 옆면을 쓰다듬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아직 연락이 없다.
지금 내가 대기하고 있는 곳은 조사단 서울본부.
나 말고도 몇 명의 팀장이 더 있긴 했다.
그러나 이 중에 검찰과 경찰 측의 사람은 없었다.
아마 지금쯤 각자 사무실에서 쳐들어갈 준비를 하며 구속영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관세청과 국토부, 노동부 같은 일반 공무원들이다.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종이를 촤라락 넘겼다.
여기에 하동문의 모든 비리가 적힌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한정된 시간에 이만큼 찾아낸 것만 해도 조사단원들이 꽤 갈려 나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가 닦달할 필요도 없이 채유림이 앞장서서 독려 했다.
사무실에 아예 베개와 침낭을 갖다두고 자면서 조사한 결과물이 바로 이 보고서다.
이 안에는 국세청에 출석한 4명의 심복이 진술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동문에게 얻어 먹은 것은 많았지만 그와 함께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물론 처음에야 모른 척 잡아뗐지만 이쪽은 세무공무원만 있는 게 아니다.
일부러 경찰과 검찰 수사관들까지 국세청으로 모셔왔다.
그들은 과연 우리보다 속마음을 끌어내는 데는 선수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두들겨 패거나 협박한 게 아니다.
-제가 예전에 수사했던 모 재벌의 이야깁니다. 회사 물려받을 예정이던 사장님이 좀 지저분하게 놀았어요. 참나, 요즘 세상에 성 상납 요구하는 미친놈이 있더란 말입니다. 그 모든 치부를 알고 뒤처리 하는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시죠? 세상에 무덤까지 가는 비밀은 없다는 거. 김 실장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그 사람에게 접촉했을 때 이미 자살한 후더라고요.
-그야 거기서 얻어먹은 게 많겠죠. 얼마나 고맙겠어요. 나 같아도 열심히 꼬리 흔들면서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 그래서 의원님은 같이 죽어줄 수 있어요?
-의원님은 당시 겨우 2선이었잖아요. 중진 의원이 시키면 거절할 수 있었겠어요? 다음 총선에서 공천 못 받을 수도 있는데. 의원님은 순수하게 이용당한 겁니다. 그렇죠?
-이야, 걸린 혐의만 해도 의원직 박탈은 당연하고 징역도 꽤 오래 사셔야겠는데. 페이퍼 컴퍼니 실제 관리하셨죠? 어허,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요. 지금은 그냥 확인하는 시간이니까. 어이쿠, 국세청 조사관님도 할 말 있으신가 보네. 탈세 금액도 꽤 되던데요?
-참작의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의원님의 태도에 따라 달린 거죠. 옛날하고 달라요. 하동문 의원님은 우리가 잘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쳐넣을 거니까 걱정 마시고. 그래서 의원님도 그 옆에 공범으로 함께 하실 건가요? 아니면 저희 수사를 도와주실 건가?
어르고 달래다가 심적으로 하동문에게서 떨어뜨린다.
그가 더 이상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수 없음을 주지시켰다.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몰아치며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4명의 의원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하동문을 배신했다.
참 웃긴 일이다.
권력과 돈으로 이룩한 탑이 이렇게나 쉽게 무너지다니.
내가 피식 웃고 있자 노동부에서 파견 나온 팀장이 붙임성있게 말을 걸었다.
“부단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고지가 눈앞이라 그런가요?”
중년 여성은 눈에 호의를 가득 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함께 현장을 뛴 일도 없고 그저 여기 본부에서 본 게 다인데 팀장들이 날 보는 얼굴은 항상 부드러웠다.
물론 좋게 봐주는 거야 당연히 고맙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예전부터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게 정말 되니까 설레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네요.”
“저도 처음 파견 연락 받았을 땐 상상도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네요.”
대화의 물꼬가 터지자 다른 팀장들도 슬금슬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어차피 기다리기도 심심하겠다, 잡담이라도 나눌까 하고 나도 부단장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들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내내 핸드폰을 보고 있던 관세청 쪽의 팀장이 새된 소리를 냈다.
“부단장님, 이거 우리가 조사 중이던 그 정책실장 아닙니까? 사무실 앞에 와 있는데요?”
나는 튕겨나듯이 일어나 테이블 위로 걸터앉았다.
말을 꺼낸 팀장이 건너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가 튕겨 나가 벽에 부딪치고 팀장이 얼결에 내게 핸드폰을 넘겼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유진환이 거기에 있었다.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웬 손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더 볼 필요는 없다.
구속영장 떨어지기 전에 심심하지 말라고 일 거리를 만들러 왔구나.
나는 정장 재킷을 걸치고 코트를 챙겨 입었다.
저놈은 각오의 표현인지 아니면 열불이 나서 저러고 왔을지 몰라도 나는 추우니까 입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부단장님, 나가시게요? 밖에 기자들 많을 텐데.”
“저놈은 절 찾으러 왔을 겁니다. 이건 피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저놈은 제가 처리해야 해요.”
사람에게는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이 있다.
시험 종료 5분 전에 답안지를 밀려 썼음을 깨달았을 때.
중간고사를 다 보고 답을 맞춰보는데 ‘뒷장 풀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시합 종료 직전에 공을 빼앗겼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손경진 원장이 제주도로 내려가고서도 한동안 포기하지 못해서 이런저런 수작을 걸었던 것처럼 말이다.
유진환 역시 그런 사람인 것 같다.
하긴 성격상 가만히 앉아서 죽을 놈은 아니다.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겠지.
그렇다면 납득하게 만들어주는 게 좋겠지.
할 줄 아는 게 많은 놈일수록 더욱 그렇다.
감옥에 가서도 계속 나와 조사단을 괴롭히며 화풀이라도 하면 귀찮다.
때로는 납득하지 못하고 질질 끌며 지지부진하게 소모전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유진환도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가만히 있어서 구속을 기다릴 성격은 아니다.
-보고 있지? 나와.
그럼 그렇지.
나는 말리는 팀장들에게 가볍게 웃어 보인 후 사무실을 나섰다.
아까 언뜻 보니까 손수레 가득 뭔가를 갖고 왔던데.
자기 손으로 잡아달라고 증거물을 갖고 왔을 리는 없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망하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나 혼자는 죽을 수 없다.’
유진환도 비슷한 생각일까?
일부러 영상을 더 보지 않고 나왔다.
유진환이 부스럭대며 뭔가를 하는 것 같았는데.
카메라 앞에서 비밀 대화라도 까발릴 셈인가.
생일날 어떤 선물을 받게 될지 두근두근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나는 복도를 걷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제는 유진환이 어떤 짓을 하든 뒤집을 수 없는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기대가 되었다.
이왕이면 내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면 더 좋겠다.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입구 문으로 다가갔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건물 안에 비해 밖은 환했다.
거기에 카메라 불빛까지 터지니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이다.
유리문을 힘주어 밀자 온갖 소란스러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물 안과 밖은 차원이 달랐다.
당혹스러워하는 기자들의 비명과 사방에서 터져대는 셔터 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광경을 살펴보기도 전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유진환의 꼬라지였다.
저놈은 아직도 숫자를 잔뜩 끌고 다니네.
그건 어차피 내 눈에만 보이니 그렇다 치고.
그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사람들 눈길을 끌기 딱 좋은 올블랙 정장이었다.
까만 셔츠에 까만 넥타이까지.
어떤 각오로 왔는지는 알겠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파일철과 종이뭉치가 뭔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진환이 손에 든 라이터를 보고 나는 상황을 판단했다.
동시에 한심해졌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 같다.
아니, 할 짓이 없어서 이러고 있냐.
“뭐하냐?”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유진환은 울컥한 듯했다.
하긴, 그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왔을 텐데 내가 너무 건조하긴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관심을 가져주기로 했다.
“장례식 왔냐? 누구 장례식인데?”
소리 없는 경악이 스쳤다.
기자들이 금붕어처럼 눈과 입만 뻐끔뻐끔했다.
아, 이게 아닌가?
그러나 유진환은 기자들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든 라이터의 불꽃 이상으로 유진환의 눈빛이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단 위에 서서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뭐, 왜. 어쩌라고.
그래 봤자 이긴 건 나다.
유진환도 그걸 아는지 금방 감정을 가라앉혔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이제 더는 뒤집을 방법이 없겠더라고.”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고백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 봤지. 나 혼자 죽긴 싫은데.”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군요.”
보는 눈이 있는지라 나는 말투를 경어로 바꾸었다.
유진환이야 이제 그런 걸 신경 쓸 생각도 없는지 거의 막 나가다시피 했다.
“이 안에 있는 건 다 내가 그동안 모은 것들이야. 나도 보험은 하나씩 갖고 있어야 하잖아?”
“아. 그거군요.”
그동안 유진환을 거쳐 간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놈 주위에 맴도는 숫자만 해도 수십 개니까.
그리고 저런 놈들이 순순히 ‘설계’만 해줬을 리는 없다.
의리와 충성이 없는 세계에서 언제 배신당하거나 적이 될지 모르니까.
뇌물을 준 사람이 따로 뇌물장부를 작성해 보관하듯이 유진환도 뭔가를 손에 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갖고 왔다면 거래를 하자는 건가?
“조금 실망스럽네요. 지금의 제가 저걸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가진 자료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저걸 줄 테니 참작해달라는 거래를 하려고 온 건 아니겠죠?”
유진환은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소리를.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몰래 찾아왔겠지. 저건 그냥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나 말고 다른 놈들도 철저하게 조져달라는 청탁의 뜻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 서류는 왜 던져놓은 겁니까?”
“그야…… 화려하게 가보려고?”
그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손에 든 라이터를 떨어뜨렸다.
과연 종이 다발에 끼얹은 건 기름이었나 보다.
조그마한 불꽃은 순식간에 종이 전체로 번졌다.
“어어!”
“저게 뭔진 몰라도 꺼야지!”
“소화기!!!”
안달 내는 것은 기자들이었다.
나와 유진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불을 보자 습관적으로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를 끊은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손이 근질거렸다.
담배 물고 가서 저 불에다 담뱃불 붙이면 약 올리기 딱일 것 같은데.
내가 아쉬운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지고 있자 유진환이 물었다.
“이걸 찾나?”
유진환이 꺼낸 담뱃갑은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레종 프렌치 블랙.
내가 주로 피우던 담배다.
유진환은 약 올리듯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것은 나에 대한 뒷조사를 했다는 시위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여기 있는 기자들 중에도 내 뒷조사 해본 사람은 많을걸.
내 약점을 찾겠답시고 꼬투리 잡으려는 의원님이나 재벌들도 내 신상명세 한 부씩은 갖고 있지 않을까.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습관적으로 넣어 갖고 다니던 거라 담배는 없어도 라이터는 있었다.
“불붙여줄까요?”
내가 꿈쩍도 안 하자 유진환은 손수레로 가더니 물병 같은 것을 들고 왔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세상이 다 네 것 같지? 아쉽게도 내가 여기서 뭘 하든 이 결과는 바뀌지 않겠더라고. 그래서 너한테 트라우마를 남겨 주기로 결심했어. 한번 스크래치가 난 철판은 아무리 다듬어도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못해. 그렇게 네 끔찍한 기억 하나를 남겨 줄 거다. 앞으로 탈세 건을 조사할 때마다 두려움에 주춤하도록, 그래서 성역 없는 정의의 공무원에서 조사마다 벌벌 떠는 반쪽짜리가 되도록!”
유진환은 물병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것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다.
비릿한 냄새가 삽시간에 진동했다.
“예전에 세무조사 받던 사장 죽은 거 기억해?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했지? 그럼 이건 어떨까?”
유진환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내 귀엔 그것이 먼 곳에서 오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유진환이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크흐흐흡! 크흐흐흐흑! 눈앞에서 불타는 시체를 본 적은 있냐? 너는 과연 이것도 극복해낼까?”
천천히, 유진환이 불타고 있는 서류철로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