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77화 (377/500)

377화. 뭐 하냐 (1)

유진환은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이 방을 열고 나가면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 나왔고, 그들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할 일은 항상 많았다.

알음알음 하동문의 오른팔이자 책사로 통하는 그에게는 끊임없이 상담이 들어왔다.

종류도 다양했다.

-이번에 새로 자금줄을 좀 굴려 볼까 하는데 어르신께서 유 실장을 추천하지 뭡니까.

-증여세나 상속세 없이 우리 아들놈한테 재산을 미리 좀 주고 싶은데요.

-이번에 내가 꼭 좀 투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이름이 들어가면 안 되거든. 믿고 맡기려면 유 실장이 최고라고 하던데. 괜찮겠나?

의원님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요청이었다.

유진환은 겉으로 그들에게 살갑게 대했지만 속으로 무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탁 내용도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들만 갖고 오는 주제에’

유진환의 유능함은 이미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다.

하동문은 그것을 잘 이용했다.

인재를 포용하는 것도 위에 선 자의 능력이다.

유진환이라는 똑똑한 젊은 놈을 통해 의원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고 생색을 냈다.

마치 자신 덕인 것처럼.

그건 유진환도 알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도 이용하는 것뿐 충성은 없었으니까.

자금책을 유진환이 총괄하게 되면서 요구는 점점 더 음지의 것으로 변해 갔다.

-어르신이 보내서 왔습니다. 초기 자금은 유 실장에게서 받으라고 하더군요.

하동문은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권력에 혹해 몰려든 부나방도 있었고 돈에 넘어온 똥파리도 있었다.

특히나 돈을 보고 온 놈들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어중이떠중이였지만 그만큼 이해득실만 확실하면 편을 들어주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하동문은 돈이 많았다.

그것도 유진환 덕분이었지만.

그 돈은 모두 저런 인간들에게 쓰였다.

흔히 말하는 ‘용돈’ 말이다.

국회의원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

유세하는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그랬고 그 후 의정활동에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국가에서 보좌관이나 비서의 임금을 지원받았지만 그 외에도 일명 ‘품위유지’나 ‘여론 취합’에 들어가는 돈은 따로 있었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로비가 금지되어 있어서 돈은 항상 부족했다.

그런 의원이 찾아오면 처음에는 비타민 음료 상자를 하나 줬다.

예전에는 1만 원권으로 2500만 원이 들어갔는데 지금은 5만 원권으로 7000만 원이 들어간다.

다른 건 몰라도 현금만은 유진환이 직접 넣어서 챙겼으니 확실하다.

처음엔 의원들이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헤벌쭉해서 돌아간다.

그야 목마른 상황에 우물을 퍼줬으니 눈이 뒤집힐 만하다.

그러나 사람은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한 줄 안다.

처음에는 만족하며 하동문에 대해 무제한 감사를 늘어놓던 사람도 몇 달 지나고 나면 시큰둥해진다.

금액에 마비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진환은 이번에는 커다란 비타민 음료 박스를 내밀었다.

그렇게 길들이는 것이다.

이 정치판에서 그만한 돈을 줄 수 있는 건 사실 하동문밖에 없었다.

한번 돈맛을 본 사람은 두 번 다시 그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

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사를 늘려서 갈 수는 있지만 좁혀서 갈 때는 세간살이를 처분해야 한다.

돈에 익숙해진 의원들은 하동문을 떠날 수 없다.

그 후에는 그들에게 주는 용돈의 양을 줄이고 ‘주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도 있다’라는 것을 교육시킨다.

처음에는 네까짓 게 말이 많냐며 갑질하던 의원들도 나중에는 입장이 역전된다.

콧대 높은 2선과 3선 의원들이 자기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걸 보면 그야말로 막후의 실력자가 된 것 같아서 짜릿했다.

-하동문 의원님과의 창구라고 들었습니다. 한번 뵙고 싶습니다.

하동문의 비서나 보좌관이 아닌 유진환에게 연락이 온다는 것은 그만큼 은밀한 이야기라는 뜻이었으며 유진환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유진환은 그것을 즐겼다.

하동문은 정치판을 지배하고 유진환은 그를 입맛대로 휘두른다.

하동문 본인은 유진환을 그저 부하1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유진환은 그랬다.

-내가 대통령을 만든다. 즉, 내가 비선이 되는 거야.

정치는 골치 아프다.

사람을 상대하고 웃는 낯으로 TV 앞에서 아양 떠는 것은 하동문이 하면 된다.

자신은 그를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올려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동문은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도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는 것이 많을뿐더러, 유진환의 능력은 다들 인정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하동문의 용인술에 감탄하지만 유진환은 반대였다.

‘내가 선택한 거야. 그 많은 정치인 중에서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라고.’

유진환은 뿌옇게 먼지가 앉은 소파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무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빛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먼지 입자가 훤히 보였다.

텅 빈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몰렸지?

유진환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을 벗어났다.

“그냥 죽여 버릴까.”

유진환은 마지막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잃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유진환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치안이 좋았다.

권력으로 덮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지금 한창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재현이 사고든 사건이든 모종의 이유로 죽는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당장 대통령부터 경찰청장 따귀를 후려갈기며 수사를 지시할 것이다.

저물어가는 권력인 하동문이라면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모든 걸 덮어씌울 것이다.

유진환은 하동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생각이 없었다.

‘라인도 해체되고 있고. 당도 깨지는 것 같고.’

돈과 권력으로 뭉친 인간관계는 얄팍하기 짝이 없었다.

권력의 정점이 아닌 하동문은 더 이상 들러붙을 대상이 아니다.

돈줄도 국세청의 활약으로 말라붙고 있었다.

돈마저 없다는 걸 눈치챈 하동문의 사람들은 하나둘 등을 돌렸다.

당장 저번 주에 불려 간 의원들만 해도 그랬다.

신재현이 국세청에 직접 와서 출석요구서를 건네준 4명의 의원들.

모두 하동문에게서 뭔가 하나씩 받아먹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곁가지들에 있어 성공의 본보기이기도 했다.

하동문에게 잘 붙어 있으면 이렇게 출세한다는 본보기 말이다.

그런 그들이 당장 국회에서부터 동요하더니 하동문을 슬슬 피해 다녔다.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의원님들은 이 문자를 받는 즉시 제 사무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안 받아서 하동문이 보낸 문자는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국세청에 출석하기 전에 말이라도 맞춰둬야 하는데.

보다 못한 유진환이 직접 그 의원들의 집으로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의원님께서는 댁에 안 계셔서요. 만나 뵙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기다리겠습니다. 언제 들어오시죠?”

“친구분들과 좀 멀리 나가셨어요. 오늘 안에 안 들어오실지도 몰라요.”

대문조차 열어주지 않은 채 의원 댁의 가정부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뒤돌아선 유진환은 하동문이 힘을 잃었음을 인정했다.

그 후로 유진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동문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부우웅.

몇 시간은 내버려 둔 핸드폰이 오늘 처음으로 울음을 토해냈다.

유진환은 흘끗 시선만 돌렸다가 도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이젠 방법이 없다.

원래는 선거만 무사히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적당히 발목을 잡고 시간을 끈다.

그 과정에서 의원 몇 명 던져줄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 일단 무사히 선거만 치러내고 나면 더는 국민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신재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먹잇감이라고 가만히 놔뒀다가 나중에 되살아나 뒤통수를 맞을 만큼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아마 끝까지 달려들어 확인사살을 하겠지.

당장 다음 달에 있는 총선의 투표용지가 인쇄되기도 전에 끝낼 것이다.

투표용지에서 후보의 이름 자체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

하동문의 심복 딱 4명을 집어서 부른 것만 봐도 국세청의 준비는 다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불려 간 4명의 의원이 국세청에 미주알고주알 불었다면 어느 정도 자료도 다 갖춰졌겠지.

하동문을 엮어 넣을 자료 말이다.

정말 마지막이구나.

유진환은 먼지 쌓인 소파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옷에 먼지가 들러붙어서 흰 셔츠와 검은 바지가 회색이 되었다.

제 잘난 줄 아는 정치인들을 주물러 판도를 짜는 것도 재미있었다.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는 수긍할 줄 알았다.

-부웅!

이번에는 문자다.

-TV 켜 새끼야! 그리고 당장 튀어와!

하동문의 벼락같은 일갈이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유진환은 핸드폰을 집는 대신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하동문에게서 쫓겨날 당시 이 사무실로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에 사무실 임차료와 공과금은 다 내고 있었다.

당연히 전기도 들어왔다.

어떤 채널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TV를 켜자 모든 공중파 채널에 속보가 나왔다.

[조사단, 하동문 의원 구속영장 청구]

소환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고 무려 구속영장이다.

검찰과 경찰이 포함되어 있는 조사단이니 당연히 가능하다만 몇 단계를 건너뛰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혐의는 다 입증되었고 여죄만 추궁하는 단계라는 뜻이다.

“결국 가시는구나~.”

유진환은 노래를 부르듯 운율을 붙여 하동문의 넋을 기렸다.

마치 남의 일처럼 차가운 행동이었다.

그는 기지개를 쫙 펴더니 구석에 있던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정장 딱 한 벌이 걸려 있었다.

***

조사단 서울지부가 입주해 있는 건물은 종로의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건물은 조금 낡았지만 보안이 좋고 주차장이 넓은 것이 장점인 곳이다.

이것은 조사단 측에서 일부러 그런 곳으로 고른 것이기도 했다.

당장 지금 주차장에 가득 찬 기자들만 해도 그랬다.

조사단에서 새 소식이 나오자마자 벌떼처럼 모여든 이들은 누구 하나가 한마디라도 던져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구속영장은 오래 걸리지 않으니 아마 기자들도 오늘 하루 종일 여기에 죽치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조사단 발족하던 날보다 기자 수가 줄어든 것은 일부가 하동문 의원의 자택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이러고 있다 보면 들어가는 사람이든 나가는 사람이든 하나쯤은 기자들에게 잡힐 것이다.

그러면 바로 특종이고.

이제는 얼마나 오래 기다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기자들은 철퍼덕 땅바닥에 앉아 편안한 자세를 했다.

그런 그들의 귀에 무언가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륵. 드르륵.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수레에 실어 끄는 사람도 종종 있기 때문에 기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이상을 느낀 것은 잠시 후다.

그 남자는 온통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다.

초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쌀쌀한데도 점퍼나 코트는 걸치지 않았다.

까만 정장에 넥타이와 셔츠 색마저 새카맸다.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는 차림새 같았다.

뭔가가 있다!

기자들은 헐레벌떡 일어나서 일단 카메라를 돌렸다.

누군지,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찍고 보자는 것이다.

남자는 수레 하나를 질질 끌고 왔는데 그 위에는 박스가 네 개 얹혀 있었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돌멩이를 주워다가 수레의 바퀴에 괴었다.

일련의 행동이 미리 계획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멍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수레 위에서 상자 하나를 끄집어 내리더니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뭔가 종이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빌딩 바로 앞에다 가서 엎어 버렸다.

-촤르륵!

어어, 하고 기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단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된다는 기자의 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남자는 그러고서 가장 큰 카메라를 바라보고 섰다.

“보고 있지? 나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자는 카메라가 찍고 있는데도 보란 듯이 손수레에서 통 같은 것을 내렸다.

뚜껑을 퐁, 따고서 바닥에 쏟아 놓은 서류 위에 끼얹었다.

기자들은 그게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등유 같은데요!”

두려워하거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내용물을 서류에 다 뿌린 후, 남자가 빈 통을 냅다 집어던졌다.

플라스틱 통이 바닥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틱, 틱.

부싯돌이 부딪치며 특유의 소리를 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불은 한 번에 붙지 않았다.

남자가 네다섯 번의 시도 끝에 라이터에 자그마한 불꽃을 피워 올렸을 때 빌딩의 유리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입구에는 3개의 야트막한 층계참이 있었다.

남자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바로 그 층계참 위에 서 있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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