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76화 (376/500)

376화. 내가 몰랐던 후보자

생각해 보면 그렇다.

민치호는 인재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자신과 함께 달려 나갈 사람 말이다.

그럼 당연히 여러 후보가 있었을 것이다.

나 이전에 관심을 둔 사람도 있었을 테고.

예전에 이선균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나를 눈여겨본 것은 내가 공무원이 되기 전이다.

정확히는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의 횡령과 비리, 탈세를 내부고발한 후.

내가 경찰에 신고한 그 건은 검찰로 넘어가 당시 서울서부지검의 차장검사이던 송대희 눈에 띄었다.

송대희 차장검사는 친구인 당시 민치호 조사국장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런 놈이 있더라. 근데 마침 세무직 공무원으로 지원했지 뭐냐.’

그래서 내가 필기시험을 본 날 이선균을 잠수교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팀장까지 올라온 지금의 내가 만약 인재를 찾는다면 어떻게 할까.

괜찮은 사람을 하나 발견했는데 아직 공무원 합격도 못했다.

실력도 입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내부고발이라는 화려한 전적이 있어도 그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잘 나가다가 거꾸러지면?

처음엔 인재인 줄 알았는데 막상 세무서에 들어와서 일하다 보니 생각했던 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여러 명을 두고 지켜보는 게 맞지.

나 하나에만 운명을 거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당시 민치호는 이미 국장이었다.

국세청의 조사국장으로 오래 지냈으니 휘하의 직원 중 뛰어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내게 숨긴 건 내가 혹시라도 실망하거나 동요할까 봐 그런 거겠지.

지금은 조사단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중요한 시기니까.

그러나 제일 의외인 것은 그거였다.

채유림을 내 밑으로 넣어준 것.

“팀장님, 오셨어요? 보고서가 좀 밀렸습니다. 급한 건 오른쪽에 따로 빼 놨으니 이것부터 확인 부탁드립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채유림이 다가왔다.

확실히 그녀의 일 처리는 매끄럽고 정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고 할까.

남들이 이것저것 뒤지고 헤매는 시간에 채유림은 정답을 향해 직진한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나는 지난 몇 주간 국세청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도 사무실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돌아갔다.

물론 별일 없다면 책임자 하나 없다고 바로 사무실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무실은 별일이 있어서 문제지.

단적인 예로 2주 전에 조사단에 공격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사실 내가 아니라 채유림 반장이었다.

이상을 감지했다는 건 평소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뜻이다.

그녀 역시 중간관리자로서 많이 일해 본 티가 났다.

일도 잘하는데 중간직도 잘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내게 붙여준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팀장님께서 지시 내린 걸 제가 생각해봤어요. 하동문과 차주혁 의원의 두터운 방어를 깨기 위해서 그쪽 의원들부터 조사하시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쪽 라인을 따로 명단을 만들어 봤습니다.”

채유림은 내 지시만 갖고도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게다가 한발 앞서 나간 일 처리다.

두 대선주자의 추종자가 쭉 적힌 명단과 각각의 탈세액, 그리고 조사 진척도가 적혀 있었다.

이 한 장의 표만 봐도 내가 현재 조사단의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배려해 놓은 것이다.

확실히 나와 일하는 것이 비슷하다.

그녀와 나 모두 일하는 방식은 흡사하게 단련되어 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나는 거기서 수 싸움을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냐면, 채유림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나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팀장님, 듣고 계시죠?”

“아, 네. 보기 편하게 정리하셔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저랑 방식도 비슷하시고. 손발이 잘 맞을 것 같네요.”

살짝 떠보았지만 채유림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분명 후보가 여럿 있었을 텐데 채유림이 아니라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아니, 이건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나는 민치호와 그 윗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까.

여기서 더 파고들어서 이득 될 게 있을까?

굳이 지난 일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다.

후보가 총 몇 명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결국 그중에서 선택받은 건 나 아닌가.

말한다고 해도 뒷사정만 알게 될 뿐이다.

그들이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내가 궁금한 건 역시 이거다.

채유림 본인도 알고 있을까?

나와 그녀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걸.

내 밑에서 일하는 게 정말 괜찮을까?

“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파일 분류했더니 찾기가 쉬워져서요. 저는 조사한 것들 정리를 주로 맡고 있습니다. 중간에서 제 역할은 그거라고 생각해서요.”

“감사합니다. 채 반장님 같은 분이 오시니 다행이에요. 솔직히 저 혼자라면 헤맸을 부분을 채 반장님이 꽉 잡아주셔서 자리를 비워도 안심이 됩니다.”

민치호나 이선균, 다른 상사들에게서 배운 게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이거다.

칭찬할 때는 한다.

물론 그녀보다 어린 내가 하는 칭찬은 고깝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인데 어쩌겠는가.

근데 조금 오글거리긴 한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조금 더 나가보기로 했다.

“여기 모인 분들이 다 저보다 훨씬 경험도 많은 조사관님들이잖아요. 제가 좋은 모습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걱정도 많이 했는데 반장님께서 애 많이 써 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칭찬의 향연에 채유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습관인 것 같았다.

채유림은 조용하게 혼잣말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같이 술 한 번 먹을 때가 됐나?”

“예?”

내가 되묻자 채유림은 혼자서 답을 냈는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좀 그렇죠? 잠깐 얘기 좀 하실까요?”

뭐지?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그동안 내가 남에게 같이 얘기 좀 하자고 한 적은 많은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이건 딱 봐도 진지한 얘기를 좀 하자는 것 같은데.

아랫사람에게서 상담 요청을 받은 적이 없어서 잠시 당황했다가 차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고 이상할 것 없다.

채유림에게 있어서 나는 직속 상사다.

더군다나 자리를 자주 비우기도 한다.

“그럴까요?”

나는 손에 들었던 형광펜을 내려두고 일어섰다.

앞서 나가는 채유림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직원들의 시선이 한눈에 쏠렸다.

나는 혹시 몰라서 내 예전 팀원에게 눈길을 보냈다.

-나 없는 동안 뭔 일 있었어요?

-ㄴㄴ

장세훈과 강혜원은 졸린지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안심하고 채유림의 뒤를 따랐다.

휴게실로 들어가자 채유림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 혹시 팀장님 담배 피우세요? 흡연실로 갈 걸 그랬나?”

“아뇨. 끊었습니다.”

“제가 담배를 안 피워서 잘 모르는데, 담배 끊는 사람은 독한 사람이라던데요.”

나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고 자판기로 다가갔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무언가를 함께 마신다는 건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해 주니까.

“어, 저는 코코아요.”

채유림은 당당했다.

자판기 커피라지만 내가 사면서 남이 본인 취향을 요구하는 걸 들어본 적은 처음이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입에 안 맞는 커피 괜히 먹고 속 쓰린 것보다는 차라리 뭐 먹겠다고 말해주면 편하지.

뜨거운 코코아를 가져다주자 채유림이 한입 후룩 먹어보더니 정수기로 다가갔다.

그리고서 찬물을 쪼르륵 따랐다.

“제가 하루에 커피 딱 2잔밖에 안 먹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이거든요. 근데 마침 딱 졸리던 참이었어요. 이럴 땐 단 걸 먹어줘야 해요. 근데 이거 너무 달아요. 뜨겁고.”

내가 궁금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채유림이 설명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채유림은 한입에 물 탄 코코아 3분의 1을 꿀꺽 해치웠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세 입이면 코코아 한 잔이 뚝딱이란 뜻이네.

채유림은 내 표정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내부에 걱정 많으신 거 알고 있어요.”

채유림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적이 아닌 데다 같은 팀으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네. 그렇죠. 우리 국세청에 있는 인재란 인재는 다 끌고 와서 만든 팀이잖아요. 청장님이 신경 많이 쓰신 건 알겠는데 다들 너무 쟁쟁하세요.”

모범공무원에 선정된 사람도 있었고 적극행정 우수공무원 표창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강남의 모 의사가 숨긴 자산을 찾아내 세무업계에서 유명해진 사람도 있었고 학원 탈세 카르텔을 밝혀낸 사람도 있었다.

전문 분야도 아주 골고루 선발해서 팀에 넣어 줬다.

‘상속세로 궁금하면 얘한테 물어봐라’라는 말에서 ‘얘’에 해당하는 상속세 계산 전문 공무원도 우리 팀에 있었다.

그 어렵다는 정유회사 세무조사를 한 사람도 있었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채유림만 해도 세무사 합격 후 7급 공무원 시험을 본 재원(才媛)이기도 했다.

화려해도 너무 화려하다.

그만큼 일을 잘하니까 나는 좋지만.

“그래서 쓸데없이 걱정하실까 봐 얘기하자고 한 거예요. 사실 지금 팀에 계신 분들 중에 한 성격 하는 분들이 좀 있긴 해요.”

나는 조사단원의 신상명세가 적힌 보고서를 떠올렸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상사에게 불복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도 있긴 했다.

신상명세에는 놀랍게도 경력이나 이력 사항뿐 아니라 그런 것도 적혀 있었다.

나더러 조심하라는 뜻이겠지.

부당한 명령이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바로 따지러 올 사람이 우리 팀에만 족히 네다섯 명은 된다.

솔직히 내가 걱정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묻자 채유림은 또 한 번 코코아를 삼켰다.

이제 3분의 1밖에 안 남았다.

그녀와 속도를 맞추기 위해 나는 뜨거운 커피를 불어가며 후루룩 마셨다.

“교수님한테서 따로 신신당부가 있었어요.”

“교수님이요?”

같은 학교 출신인 사람이 있나?

아니, 신상명세에는 각각 출신이 굉장히 다양했는데.

나처럼 고졸도 있었고 전문대졸도 있었다.

“아뇨. 교육원 교수님들이요. 우리가 학생도 아니고 사실 교수님을 그렇게 은사로 여기거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근데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무려 4달이나 있었으니까 정이 들 법하죠. 우리와 같은 공무원 선배님들이기도 하고. 그런데 모든 교수님들이 일제히 자기 애제자한테 연락을 돌리셨대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커피고 뭐고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채유림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재현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라고.”

교육원에 있을 때 교수님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채유림이 했던 것처럼 한 모금 가득 커피를 마셨다가 캑캑거리고 말았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액체가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거 그렇게 드시면 식도암 걸려요.”

그렇게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닌데.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쳐다봤지만 채유림은 담담했다.

이 사람, 굉장히 포용적이다.

“팀장님도 아시겠지만 교육원의 모든 교수님들이 그런 연락하셨다는 게 사실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딱히 은사로 생각하지 않는 공무원들도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뭔가 있구나, 팀장님이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굳이 시비 걸 필요는 없겠다.”

“네에.”

“그리고 교수님들 제자 중에 우리 같은 7급 이하 공무원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청장님도 신경 쓰고 계신 거 뻔히 알면서 반기를 들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사무실 쪽은 정말 신경 하나도 안 쓰셔도 됩니다.”

“다행입니다. 다들 좋은 분이셔서…….”

채유림이 다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술 먹자고 한 거는 이런 얘기를 맨 정신으로 하기엔 좀 부끄러워서 그런 건데요. 굉장히 기분 묘하네요.”

“저는 조사 있을 때는 술을 안 마셔서요.”

“아, 그래요?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네요. 팀장님도 프로의식 투철하시구나. 저는 오늘도 자기 전에 맥주 한 캔 하려고 했는데. 그럼 오늘 같이 커피 마신 걸로 퉁치고 조사 끝나면 술 먹죠, 뭐.”

채유림은 남은 코코아를 한입에 다 털어 넣더니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과 찬물을 섞어 왔다.

텁텁한 입을 맹물로 씻어내려는 것이다.

“하여튼 그러니까 팀장님이 뭘 시키든 다들 잘 따라와 줄 거란 얘기예요. 보고서 보면서 팀원들 눈치 보지 말고 시키고 싶은 거 그냥 시키세요.”

“아, 그게 보였습니까?”

“살짝 어색해하는 건 보였죠. 그건 일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거니까 신경 안 씁니다. 팀장님이 이상한 명령 내리는 것도 아니니까요.”

종이컵 분리수거대에 종이컵을 넣는 채유림을 보면서 나는 민치호에 대해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치호 밑에서 큰 게 맞는지.

그에게서 뭘 배웠는지.

지금 내 밑에 있다는 게 혹시 불만은 아닌지.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은 채유림에게 물어선 안 된다.

괜히 일 잘 하고 있는 그녀를 흔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말입니다. 지금 한창 총선 유세 중이잖아요. 다음 달이 바로 총선이고. 선거 전에 두 대선주자 라인만이라도 끝장낼 수 있을까요?”

채유림이 멈칫했다.

지금도 이미 조사 속도는 다른 팀에 비해 월등히 빨랐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결론만 나온다.

채유림은 푸후, 하고 깊은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못한다는 소리는 안 나오는 걸 보니 가능하긴 한가보다.

“닦달해 볼게요. 어떻게든 가능하게 해야죠. 부단장님의 명령인데.”

채유림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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