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대세는 기울었다 (4)
정상훈은 쪼르륵 국화차를 따랐다.
투명한 유리 주전자 안에 노란 국화 꽃잎이 몇 장 둥둥 떠 있었다.
주전자 겉면에는 풀과 나뭇가지 모양이 새겨져 있어서 옆에서 보면 투명 줄기 위에 노란 꽃이 맺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한 노란빛의 액체를 한 모금 마신 정상훈은 헛기침 몇 번과 함께 숨을 가다듬었다.
신재현은 그를 따라 대추차를 마시며 잔으로 표정을 가렸다.
솔직히 반성했다.
직속 상관은 아니더라도 엄연히 전 상사였으니 말하기가 편할 줄 알았다.
그래서 쉽게 불러낸 것이고.
그런데 정상훈은 철저히 이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정상훈은 충분한 호의를 베풀었다.
어떻게 행동하라고 일깨워줬으니.
보통의 정치인과 만났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정상훈이 정치인으로서 이 자리에 임하는 이상 신재현 역시 진지하게 나서야 했다.
가르침을 흡수했다는 걸 보여줘야지.
더욱이 지금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연습이 되겠어.’
국회의원을 상대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1대1로 정치적 대화를 하러 만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상대를 치러 갈 때였고, 아니면 국회에서처럼 공개된 곳에서 혼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정치다운 대화는 이게 처음이다.
비록 정치인의 태도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아까 호의를 베풀어준 것으로 미루어볼 때, 조금 실수를 해도 노여워하거나 신재현의 약점을 잡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대화와 분위기를 배우기에는 딱 좋은 자리인 셈이었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세무조사 대상이 아닌 사람이다.
그의 머리 위에는 숫자가 몇십 원 단위였으니까.
대체 세금을 뭘 어디서 잘못 계산했길래 몇십 원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때문에 다른 정치인 대하듯이 무작정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자세로 나가서도 안 된다.
정상훈이 그런 걸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부른 건 나니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세율을 외우던 때처럼 신재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까 청장님이 그랬는데. 주도권을 잡으라고. 그럼 여기서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는 황민우는 찻잔을 들기는커녕 숨소리도 죽여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정상훈의 입가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정답이다. 네가 먼저 입을 열면 안 되지. 항상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게 되어 있는 법이야. 아무리 먼저 불렀다 해도 우위에 있는 건 너다.’
잠시간의 불편한 침묵이 흐른 후에 자연스럽게 정상훈이 운을 떼었다.
“부단장님의 활약은 익히 들었습니다. 언제고 꼭 한번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불러 주시니 영광입니다. 공사다망하신데 일부러 저에게 시간을 내주시다니…… 제가 알기로 부단장님은 그 어떤 의원과의 접촉도 삼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소문이 틀렸나 봅니다.”
의례적인 칭찬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공격을 하고 있었다.
신재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의 입장 상 의원과 개인적 접촉은 위험하다.
정상훈이 적이었다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고.
누군가 이들이 만나는 걸 목격했다면 그것만으로도 특종감이기도 했다.
다만 이 찻집의 종업원에게 목격되고도 크게 걱정하지 않은 것은, 민치호가 추천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이야기할 곳이 필요하면 가보라고 알려준 곳이니 종업원들의 입단속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국회에서 대표님이 가장 말이 잘 통하실 분 같아서요.”
“하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역시 부단장님과는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대화가 즐거울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둘은 처음 보는 얼굴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만 둘 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런 연극 같은 대화를 보고 있자니 황민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있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걸 듣자마자 체득하는 사람이나…….’
황민우는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리며 몸서리쳤다.
도저히 자신은 흉내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민우는 자신을 잘 알았다.
누가 옆에 두고 하나씩 가르친다고 해도 저렇게는 못할 것이다.
당장 지금 신재현을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게 얼마인데 그는 둘 사이에 어떤 경계가 오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민우는 눈치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주전자 안에서 흔들리는 국화 꽃잎을 바라보았다.
이런 위험한 대화는 들어도 잊어야 한다.
당연히 신재현이 그를 버릴 사람은 아니다.
믿으니까 바로 옆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기도 했고.
그러니 들은 걸 그대로 흘려버리는 건 신재현과 황민우 둘 다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람은 말실수를 하는 법이니까.
목이 타는 것을 느낀 황민우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추차를 마셨다.
바로 옆의 두 사람 때문인지 차는 아까만큼 맛있지 않았다.
“대표님은 제게 뭘 바라십니까?”
본론, 그러니까 목적을 말하기 전에 속내를 알아보고 싶다는 것인가.
정상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기 목적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상대를 떠보는 것도 괜찮지. 섣불리 자기 생각을 밝혔다가 뜻이 안 맞으면 꼬투리 잡을 수 있으니까. 특히 공무원이라면 의견 표출만으로도 큰일 나지.’
정상훈은 태연하게 주전자를 열고 우러난 국화 꽃잎을 건져냈다.
말린 꽃잎이 물을 머금어 원래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꽃잎이 뭉글뭉글 부스러졌다.
“그 생각 해보셨습니까? 나라에서 뭔가를 하려면 다 돈이 들어요. 공무원을 뽑아도 월급이 곧 돈이고 건물을 지어도 돈, 복지를 해도 돈, 공공기관에서 쓰는 A4용지도 다 돈입니다!”
황민우는 흘끗 신재현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나 보자, 하는 얼굴로 개성주악인가 뭔가를 먹고 있었다.
거참 태연하네, 싶으면서도 황민우 역시 차분해졌다.
그는 지금 신재현이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정상훈은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돈이 다 어디서 올까요? 국가는 사업자가 아닙니다. 장사하면서 돈을 버는 이익집단이 아니에요. 그 돈은 전부 세금입니다! 국가의 모든 활동이 원활히 돌아가려면 결국 세금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황민우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아차 했다.
신재현도 아직 아무런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데 그가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국세청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징세의 근간이 되는 세법은 더더욱 중요하죠. 깨끗한 과세? 공무원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합니다. 제가 국세청장으로 일하면서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걸 제 손으로 해결하려면 결국 방법은 하나더군요.”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상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국회!!!”
황민우는 덜컥 놀랐지만 신재현은 여전히 두 손으로 찻잔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손끝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정상훈은 숨을 고르며 국화차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나직한 어조로 돌아갔다.
“법을 뜯어고치려면 국회를 점령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신당에 모을 겁니다. 지금의 썩은 의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 의견 한마디로 법이 바뀌게 할 겁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법을 뜯어고칠 겁니다. 그게 제가 국회에 입성하려는 이유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황민우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신재현은 눈에 띄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골적인 야욕이었지만 차라리 이것이 낫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
국회에서 원하는 대로 법안이 통과되려면 의결정족수가 필요하다.
3분의 1이든 반이든 머릿수를 모아서 제멋대로 날치기 통과시킨 적도 빈번하다.
어떤 뜻이 있든 간에 법을 고치려면 결국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사람을 모아야 한다.
표현은 조금 부적절했을지 몰라도 정상훈은 솔직했다.
신재현은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투명한 주전자를 들어 정상훈의 빈 잔에 따랐다.
“대표님. 저는 대표님의 행보를 돕지 않을 겁니다, 아시죠?”
“물론 압니다.”
신재현은 겉으로는 절대 정치인과 얽히지 말아야 한다.
속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든 말이다.
신재현이 이렇게 운을 떼는 이유를 정상훈은 잘 알았다.
“대표님이 어떤 법을 어떻게 고치시든 제 알 바도 아닙니다.”
“네.”
“하지만 국회에 저 썩은 놈들을 잘라내야겠다는 생각엔 동의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동문 라인을 좀 흔들어봤거든요.”
“봤습니다.”
정상훈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것은 정치인으로서 커다란 적 하나가 사라질 기회가 와서 기쁜 것이기도 했지만 전직 부하의 판단과 행동이 대견해서이기도 했다.
신재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목표를 말했다.
“제가 치고 안에서 흔들어주시면 더 편해질 것 같네요.”
“흔든다라…… 하동문과 차주혁은 권력이 있으니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뭉쳐 있는 파리 떼가 많은 법이죠.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모인 구조는 약합니다. 우리 신당 의원님들 동원해서 그 둘은 끝났다고 살살 찔러보면 되겠군요.”
뭘 원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상훈은 금방 계획을 읊었다.
“그다음엔 여당과 제1야당, 제2야당처럼 큰 당 내부의 의원들과 접촉해서 탈당을 권유하면 되겠고.”
배가 가라앉으면 탈출하게 되어 있다.
구심점이 사라지면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신당으로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
“그쪽엔 대부분 탈세액이 많은가 봅니다.”
가타부타 확답하진 않았지만 신재현의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정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오지 않고도 당을 깰 수는 있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정당이 생겼다가 사라졌습니까. 뉴스를 타기 시작하면 지지율이 하락하고, 그다음에는 개혁이니 혁신이니 들먹이면서 금방 또 새로운 당을 만들어낼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쓸 만한 사람들을 추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이 정치판에 들락날락 해보셨으니 보고 느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내부에서만 보이는 그런 것이요. 사람의 성격이라든가 성향 같은 걸 고려했을 때 이 사람은 꼭 끌어들이고 싶다. 그렇게 느꼈던 사람 없으십니까?”
정상훈은 순간 찻잔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췄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의원 중에서 밀어줄 사람을 찾으시는 겁니까?”
솔직하게 대답하려고 입을 열던 신재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정상훈의 충고가 생각난 것이다.
주도권을 잡으라는 것은 단순히 싸가지 없게 굴라는 뜻은 아니다.
정보를 조절하는 것도 우위에 서는데 유용한 방법이다.
신재현이 입을 다물자 정상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었다.
황민우가 의아해했다.
“아, 죄송합니다. 정말 민치호, 그놈은 복 받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항상 말을 아끼세요.”
정상훈은 마지막까지 뿌듯해하며 남은 차를 들이켜더니 본인의 목적을 말했다.
“그럼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대가라는 건가요? 대가라기엔…… 제가 그리 큰 걸 원했나요? 내부에서 흔들어달라는 건 대표님과 제 목적이 합치되니 거래로 칠 때 이건 셈에서 빼야죠. 남은 건 쓸 만한 사람을 추려달라는 것 정도인가요?”
신재현이 까다롭게 대화의 가치를 따지고 들었지만 정상훈은 연신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가라기엔 안 맞죠. 하지만 그리 어려운 건 아닐 겁니다. 부단장님도 마찬가지로 국회의원 중에서 깨끗한 놈들 리스트를 주시는 겁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다른 당을 흔들려면 사람 빼 오는 게 최고인데, 아무나 빼 올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습니까?”
신재현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릴 명단들이다.
누가 탈세했고 누가 깨끗한지.
전직 국세청장이라지만 그걸 며칠 먼저 줘도 될 것인가.
그리고 이것도 신재현 쪽이 손해를 보는 거래였다.
정상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가를 씰룩였다.
“당연히 제가 더 이득이죠? 그러니 이건 외상으로 달아두세요. 누가 압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 날이 올지.”
정상훈은 지금 손익을 따지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신재현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가르친 이상으로 신재현이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자신을 압박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치인의 가면이 벗겨지자 신재현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확답을 받았다.
“최대한 안에서 흔들어주셔야 합니다.”
“네네, 그럼요. 나도 왕년에는 국세청장이었던 사람이에요. 그 민치호와 손경진이 박 터지게 싸우는 걸 지켜봤지요. 그놈들 다루던 사람입니다.”
신재현과 황민우는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눈에 띄는 무언가를 남기겠다며 체납징세과를 신설한 것도 정상훈이었고.
신재현은 경계를 풀었다.
눈빛만으로도 엄청난 호의가 툭툭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아, 부단장님. 나갈 때는 저 먼저 나가겠습니다. 계산은 제 것만 할게요. 저 나가고 5분에서 10분 후에 나오시면 됩니다. 부단장님이 눈에 띄어서 제가 먼저 나가는 게 나을 거예요. 다른 사람하고 만날 땐 반드시 부단장님이 먼저 나가셔야 합니다. 앞서 나간 손님이 밥값, 찻값을 다 결제해 버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정상훈은 마지막까지 배려 섞인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는 잡담과 함께 서로 훈훈한 시간을 보내면 된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은 서로 친해지기 위한 행위니까.
실제로는 어땠든 간에 차 한 번 마신만큼 가까워진 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척이 아니라 진짜였지만.
본론도 끝났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찻잔을 든 순간, 정상훈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하나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채유림 조사관은 잘 있습니까?”
“네? 채유림 반장님을 어떻게 아십니까?”
채유림이라면 현재 조사단원으로서 1반의 반장을 맡고 있는 여성이다.
신재현의 질문에 오히려 정상훈이 의아해했다.
“민 청장이 국세청 내에서 키우던 사람이니까요. 이번에 함께 일하게 됐다고 들었는데. 손발이 잘 맞는지 궁금하네요. 채 조사관이 성격이 좀 세잖아요.”
“예? 성격이 세요? 아니, 민치호 청장님이 키우셨다구요?”
“네. 지금 최종적으로 민 청장의 후계자는 부단장님 하나지만 민 청장은 사실 예전부터 인재를 찾아다녔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까?”
신재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