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대세는 기울었다 (3)
국회를 개편한다.
어쩌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놓고 잠시 흠칫했다.
조사단을 맡기 전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생각이기도 했다.
6급이라 해도 공무원 중에서는 중간 허리 중에서도 하위직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국회를 개편해볼까 계획을 세우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게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원님은 조세 정의를 바로 세운다면서 왜 반대를…….”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의원들의 고함은 그냥 웅웅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귓가를 맴돌았다.
비생산적인 감정싸움 따위에 할애할 뇌용량은 없었다.
자, 생각해보자.
나는 조사단을 통해 탈세나 하고 다니는 국회의원들을 아낌없이 잡을 셈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숫자들을 보고 있자니 꽤 많은 수가 물갈이 되겠다 싶었다.
물론 가산세 포함해서 세금 좀 내고 살아남는 의원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국민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어디까지나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는 거니까.
그런데 만약 조사단을 거친 탈세범들이 깡그리 낙선한다면?
소위 중진 의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비우게 된다.
남는 것은 비교적 젊고 깨끗한 의원들이다.
정치 쪽은 아예 생각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동으로 그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요즘 하도 머리를 굴린 부작용일까.
지금 국회는 분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하동문과 차주혁의 사람들을 잘라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면 마침 총선이 다가올 것이다.
대선주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다음 대선에는 빈자리를 노리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나오겠지.
당은 깨지고 표도 분산될 것이다.
새삼 내가 가진 권한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당선시키고 누굴 떨어뜨릴지 내 말 한마디로 결정될 수도 있다.
내 손에 전가의 보도가 들렸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이것을 휘두를까 말까를 고민할 단계를 넘었다.
국회의원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에서 이미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까지 하느냐인데.
한참을 생각하던 나는 멍하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구석 자리에 있던 중년 여성 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자리를 보아하니 제4에서 제5 야당쯤 되는 위치다.
얼굴이 낯익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정상훈 전 국세청장의 뒤에서 따라왔던 의원이었다.
아마 정상훈이 만든 신당 소속일 것이다.
그녀는 턱짓으로 한참 싸우고 있는 두 의원을 가리켜 보인 후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했다.
조세범 처벌법을 두고 싸우는 의원들은 이제 서로 원색적인 비난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나는 국회를 내 입맛에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거에 맡기자.
대신 철저하게 검증할 것이다.
조세범 처벌법을 개정하겠다며 싸우고 있는 저 의원처럼 깨끗한 사람이 눈길을 끌어야 하지 않을까?
철저하게 파헤쳐서 저들의 목록과 탈세액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내놓을 거다.
저들의 실체를 까발리면 선거 전에 충분한 판단 재료가 되겠지.
그렇게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신당 쪽의 의원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떠올랐다.
그에게 궁금한 것도.
***
찻집도 별실이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우리끼리만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서로의 사무실로 갈 수는 없었다.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밥을 먹자니 아직 밥때가 아니고.
영업직이 그런 연유로 카페를 찾듯이 우리도 전통찻집을 찾았다.
고급 한정식 집처럼 일반 손님을 위한 홀도 있고, 좌식으로 된 별실도 있었다.
예전에 민치호에게 들어둔 곳이다.
이럴 때 써먹으라고 알려준 곳이니 잘 써먹어야지.
인테리어는 편백나무로 장식되어 있고 꽤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보였다.
별실로 들어가니 자수라던가 여러 문양의 찻잔이 장식된 선반이 있었다.
전통의 느낌을 내려고 한 노력이 느껴졌다.
먼저 도착한 것은 우리였다.
나는 방석 위에 앉은 후 메뉴판을 펼쳤다.
와, 역시 비싸다.
들어본 차도 있었고 히비스커스 같은 허브차도 있었다.
“원래 계획하신 만남입니까?”
옆자리에 앉은 황민우가 물었다.
나는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아니요. 오늘 국회에 가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구요. 혹시나 해서 연락해봤더니 바로 시간을 내주시네요.”
황민우는 생각에 잠겼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눈은 계속 메뉴판을 훑었다.
디저트도 생각보다 화려했다.
한과나 약과, 강정은 나도 아는 거다.
그런데 금귤정과랑 매작과, 개성주악은 또 뭐지?
민치호가 추천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다.
내가 먼저 도착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척은 못 해도 모른다고 망신당하지는 말아야지
나는 핸드폰을 들어 모르는 것들을 일일이 검색했다.
전통 과자가 이렇게 다양했구나.
아직 시간이 남는 것 같아서 어떤 차에 어울리는지도 검색해서 외워두었다.
이제부터 만날 손님은 당연히 이런 걸 다 알겠지만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다.
“오, 개성주악이 찹쌀도너츠 같은 거래요. 맛있겠는데? 금귤정과는 낑깡으로 만든대요. 낑깡이 금귤이구나…… 맛있겠는데?”
내가 사진을 보며 연신 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황민우가 다시 심각하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총선이 코앞이고 신당의 대표인 분이에요. 만나고 싶다고 문자 한 통에 덥석 만나줄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경계하는 듯했다.
나도 너무 쉽게 만나주는 게 이상하긴 했다.
유세는 아직 안 한다 쳐도 그도 나름의 일정이 있을 텐데.
미리 말하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나도 연락했을 때 바로 수락할 줄은 몰랐다.
다음에 기회 되면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오늘의 만남은 조금 충동적인 것이라서 오히려 바로 승낙하니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어색했다.
다시 입을 다문 황민우에게 내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시간 좀 남았는데 먼저 시킬까요? 주문도 안 하고 빈방 차지하고 있기도 미안하고.”
황민우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미간을 좁혔다.
그도 생소한가보다.
“제가 아는 게 쌍화차랑 생강차, 대추차밖에 없는데요.”
“쌍화차랑 생강차는 맵잖아요.”
“그럼 대추차 하시죠.”
“그럴까요? 아까 인터넷에서 단 게 어울린다고 했으니까 금귤정과랑 개성주악 시켜볼게요.”
“그냥 팀장님이 드시고 싶은 거 아니에요?”
나는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엄청 궁금해요. 무슨 맛인지 이 기회에 먹어봐야겠어요.”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지출이다.
그러나 오늘은 큰맘 먹고 질렀다.
이유는 여럿 있었다.
어쩐지 나중에 또 누군가와 비밀 이야기를 나누러 오게 될 것 같았고, 승진하면서 월급이 올랐기 때문이다.
차는 주전자 채로 나왔다.
값이 좀 나가 보이는 자기로 만든 주전자, 목제로 된 받침에 올려진 과자.
양을 보아하니 정신이 아찔해진다.
미리 시켜보길 잘했다.
이걸 손님 앞에서 봤으면 표정 관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찻집에서 공무원이 접대받으면 왜 김영란법 위반인지 알겠네요. 이건 법 위반이 맞지.”
우리는 가격과 양에 대해 감탄하며 투명한 잔에 차를 따랐다.
잔에도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응? 내가 아는 대추차의 맛이 아닌데?”
“그렇네요. 저는 달달한 대추차 생각했는데 이건 좀…… 한약 맛인데.”
그렇다고 대책 없이 쓰지는 않았다.
고소하면서도 살짝 단맛과 함께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거기에 금귤정과를 먹어 보니 왜 인터넷에서 이 조합을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설탕에 졸였는지 겉은 달달하면서도 안은 상큼했다.
혀에 눌어붙은 단맛은 다시 대추차로 씻어낸다.
찻잔을 들고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 드라마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장르는 재벌물과 정치물의 그 중간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정치인을 만나러 온 거니까.
첫 잔을 비웠을 무렵 우리가 있던 별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우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당장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우리가 상사로 모셨던 정상훈 전 국세청장이 그린듯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보고는 역시 이 자리에 정치인으로서 온 것이구나, 하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린 제가 잘못이죠.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 정상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언가 거슬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언급 없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앉으시죠.”
정상훈은 이 분위기와 잘 녹아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국화차를 주문하더니 재킷 단추를 풀었다.
내가 본론을 꺼내려는 순간, 정상훈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 전에 잠깐.”
역시 내가 멋대로 불러낸 게 불편했던 걸까.
나는 살짝 긴장했다.
전 청장이기도 했고 아까 국회에서 의원들의 경계심을 모두 가져간 걸로 봐서 내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만약 정상훈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내게 친하게 군 거라면, 대화 결과에 따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나를 직접 만나자고 한 걸 보면 분명 정치적 얘기를 하려고 온 거겠지요? 나도 정치인으로서 대하고 싶은데 지금 상황을 보니 몇 마디 해야겠네요. 그러니까 아주 잠깐, 두 분의 전 상사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허락은 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검지로 날 가리켰다.
“저자세로 나오지 마.”
“……예?”
정상훈이 한 말의 내용보다는 그의 어조에 놀랐다.
전직 상사, 그러니까 전 국세청 수장으로 돌아온 그의 말투는 반말이었으며 어쩐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린 제가 잘못이죠,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잖나.”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보았다.
이상할 게 없는데.
“의례적인 인사잖습니까.”
“그거는 일반적인 사이에서의 인사지. 지금 자네는 정치인에게 제안인지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뭔가를 하러 온 거잖나.”
“자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나도 알아. 지금 대화를 나누기에는 급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의 말이 맞다.
나는 내심 민치호 청장에게 먼저 갔어야 하는 건가 고민하던 차였다.
아까는 무작정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긴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정상훈과 마주 앉아 사태를 논하기에는 나는 조금 급이 안 맞는 것 같다.
여기에는 민치호가 왔어야 동등한 거래 상대가 되는 것 아닐까?
“자네는 착각하고 있군. 자네는 조사단의 부단장이야. 단장은 경제수석이잖아. 그는 함부로 정치인을 만날 수 없어. 그렇다면 조사단을 대표해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명의 부단장이지.”
“……그런가요?”
정상훈은 협상이나 거래가 아니라 부하 직원을 타이르듯 말하고 있었다.
“그래. 자네는 아까 저자세로 나와선 안 됐어. 조사단은 지금 국회에 부는 폭풍의 핵이야. 더군다나 정치인은 조금만 얕보여도 금방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고 하는 놈들이지. 자네는 내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주도권을 잡았어야 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까진 존중의 의미로 볼 수 있어.”
“그야 청장님과는 척을 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전직 청장님 아니십니까.”
“그래서 그것까진 이해한다고 한 거야. 그래도 ‘잘못’이라거나 ‘만나줘서 고맙다’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자네를 낮추면 조사단도 위치가 낮아지는 거야. 자네는 지금 조사단을 대표하고 있으니까. 나이나 경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이 업계는 서른 먹은 놈이 청년 대표랍시고 당 대표도 하고 비서관도 하는 판이니까.”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네를 먼저 낮추지 마. 이 판에서 자네의 본질은 권력이네. 자네가 뭘 할 수 있는지, 그 힘 말이야. 만약 다른 정치인과 비슷한 회동을 가진다면 앉아서 맞이해도 돼. 자네는 지금 그런 힘을 갖고 있어.”
정치판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상훈은 저쪽 생리를 굉장히 잘 꿰뚫고 있었다.
“더군다나 여기서라면 더더욱 그래. 나와 신당은 자네 덕에 지지율을 얻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자네에 대한 인기와 기대가 곧 전직 국세청장인 내게 몰리고 있는 거거든. 내가 자네의 덕을 보고 있는 거지. 반대로 자네의 말 한마디에 내 지지율은 다 날아갈 수도 있는 거고.”
나와 황민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어도 돼. 칭찬이니까. 그러니까 자네는 내게 첫인사를 이렇게 했어야 해. ‘대표님, 늦으셨군요. 기다리다 먼저 시켰습니다.’”
조금 무안을 주는 말 같은데.
게다가 약속도 없이 다짜고짜 만나자고 한 건 나다.
하지만 정상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었다.
기선제압이라 이거지.
내가 부르면 너는 나와야 한다, 나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그것을 말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나는 손에 찻잔을 쥐고는 신중하게 입을 떼었다.
“대표님, 늦으셨군요.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시켰는데 괜찮으시죠?”
그래도 상대는 정상훈인데 정중하게 해야지.
그렇게 말하자 정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우리의 전 상사에서 국회에 막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마침 그가 고개를 숙이던 순간 문이 드르륵 열렸다.
찻집의 종업원이 주전자를 받쳐 들고 들어오다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계속했다.
“앉으세요, 대표님. 타박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한숨 돌리고 얘기하시죠.”
“감사합니다, 부단장님.”
정상훈이 내 맞은편에 앉자 종업원이 준비한 차와 다과를 내려놓았다.
-달그락.
종업원의 심경을 반영하듯 떨리는 손 끝에서 찻잔이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