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73화 (373/500)

373화. 대세는 기울었다 (2)

볼일도 끝났겠다, 나와 황민우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의원 몇 명이 주차장까지 배웅하겠다며 나섰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오늘 웃으며 이야기 나눈 탓인지 조금 스스럼없는 분위기가 되었나 보다.

몇 의원이 끈질기게 달라붙길래 ‘아예 국세청까지 같이 가실 거면 환영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떨어져 나갔다.

역시 의원님들은 이해가 빨라서 좋다.

싫은 소리가 나오기 전에 다들 내 의도를 파악해주니 말이다.

국회는 처음이 아니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나와 황민우는 복도를 걸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힐끔 보긴 했지만 예전처럼 피하지는 않았다.

역시 사람의 이미지란 중요한 것이다.

워낙에 오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우리는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이걸로 또 일주일은 시간을 벌었네요.”

“어째 신경 쓰시는 게 더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전하고는 일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진 않은데 뭐라고 할까…….”

황민우가 세 걸음 걸을 동안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행동 하나하나를 계산해서 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신중해 보여요. 조사단 관리라기보다는…….”

황민우가 말끝을 흐리기에 내가 가로챘다.

“정치 같다구요?”

“전략 게임을 하시는 것 같다고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딱 정치 맞네요.”

나는 피식 웃었다.

나도 내가 하는 짓이 공무원의 일과는 좀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부단장으로 몇 주 있어 보면서 조금씩 느끼는 것이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이게 거기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7급일 때와 비교해서 지금 고려하는 것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팀원들과 함께 조사하고 백데이터를 뒤적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은 나, 그리고 조사단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있었다.

조사? 그건 팀원들이 하는 거다.

팀원들에게 일을 미뤄놓는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내가 국세청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면 물론 능률은 오른다.

당장 1명의 일손이 추가되는 것이고 탈세액이 보이면 확실히 일이 빨라지니까.

하지만 그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 이건, 내가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남에게 맡길 수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 하나만 걸린 일이 아니잖아요. 조사단이 공격받고 나니까 수단을 가린다는 것도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약자예요.”

내 말투가 강해서 그런지 황민우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나는 계속 긴 복도를 걸으며 말을 이었다.

“참 신기하죠? 이다음에 어떤 수를 놓을지 고민하는 게 너무 재밌습니다. 현재는 제가 유리해서 그럴까요?”

지는 게임은 재미없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수를 계산해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라 그럴까.

지금 이렇게 상대의 진영을 돌아다니는 것도 무척이나 재밌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늘어나고 있었다.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는 흔히 원서를 보거나 원어민과 말해보라고 하던가.

지금 내가 그런 심정이다.

부단장으로서 움직일수록 내가 뭘 해야 하고 누굴 먼저 건드려야 할지가 보였다.

단적인 예로 오늘 일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저번 주에도 그랬듯 관심이 식지 않도록 내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의원들을 갈라볼까, 하는 생각에 분위기를 보러 온 것이다.

국회의원이라고 모두 한마음 한뜻일 리는 없다.

하다못해 우리의 조사 대상이 된 의원들도 우리에게 대응하겠다고 손잡지는 않을 것이다.

뒤가 구릴수록 더욱 그렇다.

약점을 공유하며 대책을 강구하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여기서 더 나아가서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하동문의 심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려는 것이었다.

출석요구서를 등기우편으로 보낸 사람과 내가 직접 전달한 사람, 두 종류로 나뉘는 이유는 하나다.

하동문을 따르는 의원들의 동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먼저 등기우편으로 보낸 사람들은 사실 잔챙이나 다름없다.

탈세를 하긴 했는데 복잡할 것도 없고 그냥 불러다 물어보면 끝나는 일이다.

그 정도면 조세범 축에도 못 든다.

반면 내가 직접 전달한 이들은 하동문의 사람이다.

복잡하게 얽힌 그의 자금줄 중 하나 말이다.

등기로 보내도 될 것을 일부러 와서 전달했으니 저 두 집단이 서로 차이가 있다는 건 다들 알았을 것이다.

거기서 내가 하동문의 자금줄과 돈세탁 루트를 아는 것처럼 흘렸으니 의원들은 기겁했겠지.

조사단이 그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떨까.

하동문의 파벌이 아닌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려고 할 것이다.

그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최영설이 그랬던 것처럼 흔들릴 테고.

아무리 충성도가 높아도 함께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죽어줄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그것을 손경진 원장과 그의 심복들을 보고 배웠다.

출석일까지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 사분오열하여 서로를 물어뜯을 것이다.

대기업까지 등을 돌린 마당에 그들도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심복이 흔들리면 자연히 그 밑에서 하동문을 떠받들고 있던 의원들도 제 살길을 찾아서 흩어지겠지.

결국 그의 라인은 해체되고 혼자만 남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힘을 잃은 하동문을 잡는 일만 남는다.

내가 피식 웃자 황민우가 물었다.

“저는 의외로 의원님들이 우호적이라 놀랐습니다. 그것도 계산하신 건가요?”

“아니요. 하지만 왜 태도가 바뀌었는지는 짐작이 갑니다. 국회의원 모두를 친다는 건 사실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고 가장 먼저 때려 맞는 사람이 가장 화제가 될 겁니다. 메인뉴스로 나오겠죠. 그러다가 한 100명째쯤 되면 관심도 많이 식을 겁니다. 어느 의원이 얼마 탈세했는지 읽어보기도 힘들 거예요.”

“그럼 설마 조사 순서를 뒤로 미뤄달라는 속셈입니까?”

“그것도 있고, 적으로 두는 것보다는 친분을 갖고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겠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조사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지지율 하락이고 낙선이에요.”

다른 의원들이야 어찌 되었든 자기만 다음 총선에서 당선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국민들의 관심은 당연히 대선주자의 탈세로 집중될 테고, 다른 이름 없는 의원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세금은 안 낸다고 해서 전과자가 되지 않는다.

이중장부를 만든다거나 고의로 장부를 없애 버린다거나 밀주를 만드는 식으로 심각한 부정행위일 때만 징역이나 벌금이 부과된다.

그러니 탈세로 걸린다 해도 까짓거 내면 장땡이다.

“……조사단이 생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팀장님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셨네요. 아,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민치호 청장님을 보는 느낌이에요. 물론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요. 가끔 이런 식으로 판세를 말씀하실 때 민치호 청장님의 흔적을 느낍니다.”

황민우는 뿌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동안 들은 칭찬 중에서 가장 기분이 좋았다.

민치호는 내가 배우고 닮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 사람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짜는 판은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정교했다.

“사람이 아무것도 모를 땐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가, 조금 배우게 되면 갑자기 상대가 엄청 대단해 보이잖아요? 저한테는 민치호 청장님이 그렇습니다.”

“그럼 팀장님도 어느 정도 배우셨다는 뜻이네요. 청장님이 뭘 어떻게 하시는지 보일 정도로.”

“아직은 멀었어요. 그래도 하루하루가 재밌습니다.”

“내일은 누구를 칠까, 하는 고민을 하시면서 재밌다고요? 의원님들이 들으면 경악했을 겁니다.”

풉, 하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다가 문득 복도에 사람이 많이 뜸해졌음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흔들기의 효과도 커지는 법이니 본회의가 열리는 날을 골라서 오긴 했다.

우리가 국회에 혼란을 일으킨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업무가 마비될 만큼은 아니었다.

어디에나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국회 역시 그러했다.

“다음으로 상정된 안건은…… 기재위에서 올라온 조세범 처벌법 강화에 대한 건입니다.”

마이크 때문에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걸음을 멈췄다.

다른 법안이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조세범 처벌법이라면 우리와 관련된 분야였다.

당장 우리 조사단도 조세범 처벌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저번에 왔을 때 2층의 방청석에서 본회의를 본 적이 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2층으로 달렸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직원은 우리를 보더니 막아서지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얼른 가장 앞자리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도 법안의 내용 설명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대신에 몇몇 의원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법안을 내놓는 저의가 뭡니까!”

“저의라뇨? 당연히 개정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은 세금을 안 내도 딱히 큰 제재가 없잖습니까.”

“제재가 없긴 왜 없습니까? 가산세를 매기고 있지 않습니까! 신고불성실 가산세는 10%에서 40%까지 다양하고, 거기에 하루에 얼마씩 붙는 이자 형식의 납부불성실 가산세도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각종 서류 미제출 가산세도 있고 세금을 체납하면 가산세와 별도로 가산금도 붙어요. 추가로 붙는 세금만 해도 어마어마한 부담이 됩니다! 이게 충분한 제재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우리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작게 감탄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에는 국회의원들을 허구한 날 싸움박질만 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TV에서 보이는 모습들이 항상 그러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확실히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다웠다.

지금 토론을 하는 사람들은 세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가산세든 가산금이든 얼마나 많이 붙든 상관없습니다. 아니, 상관없게 되고 맙니다. 체납자 명의로 된 재산이 있어야 징세가 가능하니까요. 작정하고 모든 재산을 타인 명의로 돌려놓으면 징세가 어렵습니다.”

“체납자의 차명재산을 찾아내면 결국 징세가 가능하잖습니까.”

“거기에서부터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차명재산을 찾아내는 게 뚝딱 되겠습니까? 결국 공무원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건 곧 행정력이고요.”

내려다보고 있자니 구도가 참 이상했다.

어느 당인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데 조처법 개정을 주장하는 사람이 달고 다니는 숫자는 꽤 적었다.

평범한 일반인 수준으로, 자릿수부터 다른 의원들 사이에 껴있으니 눈에 확 띄었다.

그에 반해 개정을 반대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의원은 1억이나 되는 숫자를 달고 있었다.

법안을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입법부의 역할이고, 나는 엄밀히 따지면 행정부 소속이니 입법 과정에 왈가왈부할 생각 따윈 없었다.

법이 좋은지 나쁜지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걸 판단하는 순간 나는 분명 국회에도 개입하려 들 테니까.

내 성격이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는다.

그래선 안 되니 국회에서 무슨 싸움을 벌이든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딱 봐도 속셈이 보였다.

탈세액 없는 의원은 처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탈세액이 1억이나 되시는 저 의원님은 개정을 반대한다 이거지.

참 눈에 잘 들어오는 구도다.

둘은 말싸움을 하면서도 절대 지려 하지 않았다.

1억짜리 의원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말 잘하셨습니다. 당연히 공무원이 해야 하는 일이죠. 그들의 업무를 줄이기 위해 조처법을 개정하겠다 이 말입니까?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바로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의 업무를 줄이겠다고 국민의 납세 부담을 지우겠다니 주객전도입니다!”

프레임 뒤집는 실력은 정말 훌륭하다.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다음으로 탈세액 없는 의원이 어떻게 반격하나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의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상대적으로 언변이 부족한 건지, 경력이 부족한 건지.

이 어이없는 반론에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이번에도 개정은 물 건너갔군.

1억짜리 의원은 한번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억측으로 공격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하시죠? 조사단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 아닙니까! 왜요? 의원님도 뭔가 덮고 싶은 게 있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은 감정싸움이다.

논리도 없는 말싸움에서 1억짜리 의원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둘의 한심한 싸움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주욱 훑어보았다.

예전에도 이렇게 의원들을 보곤 했는데.

그러다 출석한 의원들 사이사이에 탈세액이 없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국회의원이라고 다 썩은 게 아니었다.

그야 물론 탈세액 있는 사람이 훨씬 많긴 하지만.

어차피 총선이니 싹 물갈이되면 깨끗한 국회가 될 것 같은데.

의욕에 가득 차서 탈세액을 일일이 세어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이 풍경을 봤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거 진짜 내가 국회를 개편할 수도 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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