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72화 (372/500)

372화. 대세는 기울었다 (1)

국회의사당 입구에 들어섰을 때.

“어엇!”

누군가가 나를 보며 손가락질하는 것이 보였다.

목에 공무원증을 건 것을 보면 국회직 공무원인 듯싶었다.

나는 로비에서 잠시 멈춰 섰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도 자리에 멈추더니 나를 중심으로 반경 3미터의 원이 생겼다.

다 큰 어른들이 하는 짓 치고는 유치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여기 있던 사람들이 부르는 경우도 있었고, 지나가다가 인파가 모인걸 보고 하나둘 더해지는 것도 있었다.

바로 목적을 밝혀도 되겠지만 저들이 언제까지 날 세워 두나 보자, 싶어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서른 명쯤 모인 인파 가운데서 눈에 거슬리는 것이 슬금슬금 보였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 빠르게 그들의 머리 위를 훑었다.

수만 원, 이것은 실수일 수 있으니 넘어가고.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머리 위에 숫자가 보이는 것은 정장 차림의 국회의원뿐이 아니었다.

목에 공무원증을 걸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수백만 원 수준의 숫자가 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실수로 탈세했다기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쯧, 하고 나는 혀를 차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눈으로는 숫자를 훑고 손으로는 빠르게 자판을 쳤다.

그들의 얼굴을 꾹꾹 눌러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다 외우진 못한다.

숫자만 적어두어도 나중에 도움이 된다.

신고서나 장부를 봤을 때 비슷한 금액이 보이면 아, 국회에 있었던 사람이구나 하고 얼굴이 연관되어 떠오른다.

그러면 고용주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이상한 점이 보이면 자금 흐름을 추적하면 된다.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숫자가 이렇게 많지?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서 그런가?

절대 아니다.

당장 밖에 나가서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다들 이렇게 주렁주렁 숫자를 달고 다니지는 않는다.

이렇게 탈세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은 처음 보는데.

하다못해 지산을 갔을 때도 일반 직원들은 거의 깨끗했다.

윗대가리 몇 명이 큰 금액을 달고 있어서 문제였지.

그런데 여기는 아주 골고루 달고 있네.

저번에 왔을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어서 오히려 안심했다.

이러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주차하고 뒤따라 들어온 황민우가 흠칫하더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팀장님, 무슨 짓 하셨어요? 왜 다들 저러고 보고만 있대요?”

“글쎄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솔직히 웃기긴 하네요.”

나 역시 저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세워둘 건지.

그래도 이들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내게 국회의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자기들 지지율을 위해 날 이용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놈은 다 쳐냈다.

거기에 내가 국회의원을 조사하겠다고 선언한 후에 초대장이라 할 수 있는 출석 요구서를 보내고 찾아왔으니 섣불리 말 걸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 의도가 잘 먹힌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내가 씨익 웃자 흠칫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 일대의 대치 상태를 깬 것은 내 전직 상사였다.

정상훈 국세청장은 오자마자 내게 모인 경계심을 혼자 다 끌어가더니 날 중심으로 만들었다.

정치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분위기 바꾸는 기술이 대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대감으로 팽배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매일 말하기 연습만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치인들은 입담이 좋았다.

과하게 칭찬하지도 않으면서 날 은근히 띄워줬다.

내가 국회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는 불세출의 인재이자 구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기름칠을 하는 걸 듣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신재현 부단장님 덕분에 공무원들의 기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일하는 걸 언제 봤다고 기강 타령이지.

괜히 동료들이 욕먹은 것 같은 기분에 듣자마자 흘려버렸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부단장님은 이미 갖추셨더군요. 뉴스에서 보고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사사로운 정이라면 형을 말하는 거겠지.

신우현. 내가 그놈에게 한 짓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남이 우리 집 가정사로 입방아 찧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의 말도 가볍게 흘려버렸다.

수십 명의 의원들과 함께 걷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런 구도를 TV에서 많이 봤는데.

정작 그걸 내가 하고 있네.

슬쩍 돌아보니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는 황민우가 토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심정인지는 알 것 같다.

진심이 없는 말은 와 닿지 않는다.

높으신 분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들 마음에도 없는 번지르르한 말을 듣고 있자니 나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들을 쳐내지 않았다.

착각을 하고 있다면 그대로 놔두자.

내가 움직이기 편해질 것이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명, 그다음엔 두 명, 마지막으로 한 명.

그들은 회의실에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다가 인파 사이에 묻혀 있다시피 한 나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동시에 나도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얼른 다시 입가를 바로 폈지만 아마 눈치 빠른 이 의원님들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찾았던 네 명의 의원이 다가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는 걸 보니 대단하긴 하다.

“안녕하세요,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이 중년 여성은 정말 단아하고 지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만 아니었다면 나도 기꺼이 그 손을 잡았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갖고 온 공문 중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악수를 위해 내민 손에 그 공문을 소중하게 쥐여 주었다.

“최영설 의원님이시죠?”

중년 여성은 자신의 손에 들린 출석 요구서를 보자마자 얼굴이 팍 구겨졌다.

그나마 팽개치지 않은 건 주변의 의원들이 눈치를 줘서일 것이다.

“허어, 최 의원. 최선을 다해서 조사받으셔야겠어요.”

“우리 최 의원님은 큰 잘못이 없을 테니 별일 없을 겁니다.”

그녀와 다른 당의 사람들은 당연히 잘되었다는 웃음을 보냈다.

같은 당의 사람들도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출석 요구서를 받았다면 일단은 혐의점이 있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서 내게 밉보여가며 그 혐의점 있는 이들을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내가 제대로 인사를 받지 않아 떨떠름한 얼굴을 한 최영설이 손에 쥔 종이를 펼쳐보며 돌아서려는 순간, 나는 가볍게 툭 던져 보았다.

“하동문 의원님께서 최 의원님께 뭔가를 맡기신 것 같던데요.”

“……예?”

최영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당혹을 애써 웃음으로 가리다 보니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라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에 보이는 숫자부터가 내 심증의 확신이 되었다.

[531,554,290]

참 많이도 해 먹었네.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팀원들이 발견한 것 중에 하나다.

하동문은 자금을 많이 굴렸는데 그중에서도 페이퍼 컴퍼니를 곧잘 이용했다.

이건 아마 곁에 두고 있는 유진환 때문일 것이다.

유진환은 나름의 머리가 있어서 남들에게도 ‘설계’라는 걸 해줬다.

다른 의원들이 단순하게 일하면서 얻은 정보로 투자해 이익을 얻는 수준이라면, 유진환은 기업을 세우고 자금을 우회했다.

쓸데없이 잔머리가 있다 보니 규모가 커진 것이다.

거기에 하동문은 혼자서 모든 것을 관리하지 않았다.

그가 주변인을 믿는 종류의 사람인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떡고물을 주면서 사람을 부렸던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네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최영설이 가장 큰 떡고물을 갖고 있었고.

“하 의원님이 제게요? 글쎄, 뭘까요. 법안 상정을 맡기셨던가? 하하하.”

시치미를 떼며 웃는 최영설에게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내가 입꼬리를 올리자마자 최영설이 웃음을 뚝 그쳤다.

무언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원래 계획대로 물었다.

“에이, 아시면서. 제가 설마 법안 얘기 하려고 직접 최영설 의원님을 뵈러 왔을까요? 잘난 척은 아니지만 저는 굉장히 바빠요. 법안이야 의원님들의 고유 영역인데 거기에 말참견하러 오겠어요?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걸 알면 국세청의 저희 팀원들이 절 때리려고 할걸요.”

“부단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모르시면 안 될 텐데요. 의원님 최근에 별장 하나 사셨죠? 그 자금원은 어디서 났을까요? 사촌 동생 분은 어떻게 해외 법인의 이사로 등록되어 있을까요? 분명히 영국으로 유학 가서 지금 한창 공부 중이실 텐데.”

최영설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다른 당 의원들은 먹잇감을 찾았다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최영설 의원님께서 작정하고 그러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동문 의원님께서 맡기신 것을 관리하다가 삐끗한 거죠.”

당연히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탈세했을 리가 없지.

그러나 내 말은 메시지였다.

살아남고 싶으면 하동문을 팔아라.

최영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저희가 조사할 게 정말 많습니다. 의원님께서 다음에 출석하실 때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괜한 시간 낭비는 서로에게 좋지 않잖아요.”

최영설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 말만으로 그녀가 하동문을 배신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내가 노리는 것은 흔들기였다.

나는 다 알고 있다, 숨겨도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금 구경하고 있는 다른 의원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했다.

조사단이라는 악재가 있다 해도 그들은 곧 총선을 대비해야 한다.

300개의 한정된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겠지.

그들끼리 싸우느라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려준다면 최상일 것이다.

거기에 정말로 하동문을 배신하는 사람이 나오면 금상첨화고.

우리가 아무리 인력을 동원해 조사한다고 해도 결국 내부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있기 마련이다.

이들 중 누군가는 입을 열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굳은 채 서 있는 최영설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다음으로 도착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중년 남자다.

미리 보고 온 사진보다 약간 살이 더 쪄 있었고, 그 역시 어김없이 4억이라는 숫자를 달고 있었다.

나는 약한 한숨과 함께 그에게도 한 장의 종이를 쥐여 주었다.

앞서 내가 한 것을 봤기 때문인지 남자는 종이를 잡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안녕하십니까, 이서준 의원님. 의원님의 따님분께서 재단을 하나 운영하고 계시던데요…….”

“크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나중에.”

예고도 없이 당한 최영설과는 달랐다.

이서준은 일단 내 입부터 막는 것을 택했다.

“나중에 출석할 때 성실하게 조사에 응하겠습니다. 약속드리죠. 성실하게!”

이서준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할 말을 다 못하긴 했지만 저렇게 동요하는 거면 차라리 낫다.

내가 원하는 답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조사 당일 저렇게 흔들리면 추궁하기가 쉽다.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입구에서 익숙한 숫자의 향연을 보았다.

한 명의 사람을 자기장처럼 감싸고 있는 수많은 숫자들.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국회에까지 당당하게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다.

하동문이 그만큼 급하다고 봐도 되는 걸까.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유진환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대세가 기울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방심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제 이 판을 엎을 수 없다.

“박진택 의원님, 아드님이…….”

“크흠. 저도 나중에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한 명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출석 요구서를 빼앗듯 가져갔다.

회의실을 나가던 그가 문가에 서 있던 유진환을 발견하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저들끼리도 분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의원이 그를 스쳐 회의실을 나가자 다시 나와 유진환의 시선이 마주쳤다.

차근차근 네가 설계해준 사람들, 하동문의 팔다리들을 내가 다 잘라줄 거다.

그러니 천천히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찾아갈 때까지.

나는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넌 나중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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