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영악한 녀석 (2)
유진환은 자세한 내용을 듣지도 않고 뛰쳐나갔다.
그가 그동안 해온 일의 특성상 국회에서 대놓고 다닐만한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헐레벌떡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허둥거리며 달렸다.
신재현이 이미 몇 수가 앞서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대는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신재현은 수를 두자마자 제 3의 눈이라도 뜨인 것처럼 거침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일은 해본 적도 없을 텐데.
마치 노련한 정치인이 빙의라도 한 것 같다.
“허억, 허억…….”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도 몇 번을 넘어질 뻔했다.
난간을 붙잡으면서 쓸렸는지 왼손 새끼손톱이 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환은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청년의 얼굴을 찾은 순간, 유진환은 자리에서 멈춰 서서 옆의 벽을 짚었다.
산소가 모자라서 그런지 주변 공기가 일그러져 보였다.
아니, 청년은 이 탁한 국회에서조차 그 깨끗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유진환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상했다.
국회에는 항상 공기가 탁하게 고인 느낌이었다.
유진환이 음지의 인간이라서 그런 건지, 그가 모시는 하동문 의원이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라 그런지는 모른다.
유진환에게 있어서 국회란 항상 권모술수가 넘치는 능구렁이들 사육장이었다.
그가 아는 의원들은 하나같이 구린 것이 많았다.
그것은 유진환의 역할 때문이기도 했다.
유진환의 정책연구소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설계’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비자금을 만들고 싶다, 정치자금을 세탁하고 싶다, 탈세를 하고 싶다…….
항상 본 것이 그런 것이다 보니 어쩌다 한번 국회를 온다 해도 그에겐 진창에서 진창으로 옮겨온 것뿐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국회는 항상 탁했고 오염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랬었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다.
빛조차 사람을 가리는 걸까.
양지와 음지, 지금 둘이 서 있는 곳조차 서로의 처지를 나타내는 듯했다.
지금 청년이 국회 로비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지금 여기는 구덩이가 아니라 국세청 지부인 것처럼 보였다.
‘내가 미쳤군.’
그러나 이런 비이성적인 감상은 유진환으로서는 가장 멀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분석했다.
청년에게서 정말 어떤 아우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무대장악력이다.
그들이 자신이 바로 이 국회의 주인이며, 여기가 홈그라운드인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평소에는 청문회랍시고 재벌 회장과 국무총리마저 불러서 호통을 치는 사람들이 오늘은 왜 이렇게 겁을 먹었는지.
유진환은 한심한 얼굴로 꼿꼿이 섰다.
그가 관찰하고 있는 청년이 남의 홈그라운드에 와서도 당당하니 그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당당하게 굴려고 해도 눈앞의 청년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느라 셔츠는 한쪽 끝이 삐져나와 있고 넥타이는 건들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무릎께에 먼지가 묻어 있는데도 털어낼 생각을 못했다.
그는 온 신경을 청년에게 곤두세웠다.
무슨 말을 하고 누구에게 시선을 던지는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국회가 원래 이렇게 붐비는 곳이었나요?”
멋쩍은 얼굴로 환하게 웃던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보좌관들이 주춤하며 고개를 떨궜다.
문득 고등학교 교실이 생각났다.
눈에 띄면 질문이 날아올까 봐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 말이다.
그런데 그를 유심히 살펴보던 유진환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신재현은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야 처음에는 조사단 팀장이나 국세청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7급이었던 과거와 달리 그는 이제 현장에 나올 위치가 아니니까.
조사단의 규모와 현재 업무를 생각하면 각 부처 업무를 조율하는 데만도 하루가 꼬박 갈 것이다.
거기에 국세청 쪽의 조사를 직접 지휘하고 있으니 무척이나 바쁘겠지.
그런데 지시하는 거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는 핸드폰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야 가끔 들여다보긴 했는데, 지시를 내리는 거라면 상대의 보고를 봐야 할 것 아닌가.
유심히 관찰해보니 신재현은 현재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핸드폰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신재현이 한 명씩 뚫어져라 바라봐서인지 더욱 누가 나서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왜 왔냐, 누굴 찾느냐고 물어봐야 할 텐데.
양 떼 무리에 늑대가 뛰어든 것처럼 우왕좌왕하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었다.
물론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은 양 떼가 아니었지만.
이들도 자기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새 신재현을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재현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기회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차분하게 한 명 한 명을 뜯어보았다.
혼자서 수십 명을 압도하는 기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가 뒤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더니 흠칫했다.
의사당에서 근무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항상 신재현 곁을 따라다니는 직원이었다.
그는 이 대치 상황을 보고 질린 얼굴을 하더니 신재현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제야 신재현이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공문 같은 것을 여러 장 꺼냈다.
“의원님들 바쁘신 와중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제 손으로 전달 드리고 싶은 사항이 있어서요.”
신재현이 손에 든 종이로 시선을 내리는 순간 그의 주변에 한걸음만큼 더 빈 공간이 생겨났다.
대부분 아까 복도에서 난리를 피우던 젊은 의원들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이미 출석요구서를 받아봤으니 혹시라도 더 큰 걸 들고 왔을까 봐 두려운 것이다.
사람은 더 모였는데 빈 공간은 더 넓어졌다.
신재현을 고개를 들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유진환은 그 웃음을 보고는 순간 욱하며 의원들을 욕했다.
‘국회에서 소리 지르던 기세는 다 어디 간 거야? 이럴 땐 당당하게 나가야지. 구리다고 광고하는 거야, 뭐야?’
그러나 유진환은 막상 자신도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재현은 연달아 4명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준 의원님, 박진택 의원님, 최영설 의원님, 서수진 의원님. 혹시 여기 계십니까? 출석요구서 받아가세요.”
출석요구서라니.
이미 등기 우편으로 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과 저들이 대체 무슨 차이인가?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유진환이었다.
큰 당에는 보통 계파가 나뉘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이름을 부른 네 명의 의원은 한마디로 하동문의 계파라고 할 만했다.
하동문이 뭔가 원하는 법안이 있으면 가장 먼저 앞장서서 당론을 취합하는 그런 역할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하동문의 라인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들은 이 네 명의 공통점을 눈치채고 머리를 굴렸다.
‘타깃이 하동문 의원인가? 일부러 전해주러 왔다는 건데…… 그럼 등기 우편으로 받은 우리는 곁다리인 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다른 것으로 연막을 치는 경우는 흔히 있다.
진짜 목적이 하동문과 그 계파라면 자신들은 적당히 조사하고 끝낼 수도 있다.
일찌감치 출석요구서를 받은 의원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잘하면 살아날 수 있겠는데?’
희망이 보인다!
그렇다면 조금 친한 척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그들은 이미 눈에 띈 거나 다름없다.
정치인의 장기 중 하나가 적 앞에서도 웃으며 친한 척 악수하기인데, 상대가 신재현이라면 더더욱 간과 쓸개를 내보일 자신이 있었다.
다시 신재현 주변으로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웃으며 재차 물었다.
“이 네 분 안 계신가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사무실에는 계시나요?”
유진환이 주먹을 꾹 쥐었다.
당내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하동문을 따르는 의원은 많았다.
그런데 하필 저 네 명을 골랐다는 것은 신재현이 뭘 알고 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동문의 심복 의원들 중에서도 그에게서 ‘용돈’ 명목으로 여러 가지를 받아 챙긴 의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환의 애타는 마음과 다르게 로비에 모인 의원들은 하동문의 계파가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위에서 갈려 나가 준다면 오히려 이득이다.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고민하던 사이 의원들 틈바구니에서 살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여기서 신재현 부단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곳에서 보니 아주 반갑네요.”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전직 국세청장 정상훈이었다.
그는 일부러 신재현이 가진 직함 중 가장 높은 것을 불렀다.
까마득한 부하직원이었는데도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의도한 것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정상훈은 한 무리의 의원들을 이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신당을 만들었다더니 벌써 저만큼의 의원이 모였나 싶었다.
정상훈을 바라보는 눈길에 질투와 경계가 섞였다.
그는 국세청장이었던 과거를 모조리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덥석 신재현의 손을 잡더니 유세현장에라도 나온 것처럼 과하게 웃으며 칭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바쁜 분이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주다니요. 앞으로는 오지 마시고 부하직원 보내세요. 아니면 등기를 보내셔야지.”
“제가 올 일이 있었습니다.”
“뭡니까, 설마 이번에도 통지서 수령 거부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설마 우리 국회에 그런 파렴치한 사람은 없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만.”
정상훈은 범인을 찾아내겠다는 듯이 주위를 훑었다.
보좌관에게서 소식을 듣고 새로 합류한 의원들이 정상훈의 티 나는 말투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아주 그냥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시는구만. 정치판 들어오자마자 지지율 얻으니까 아주 국회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인데, 어디 한 번 탈탈 털려 봐라.’
국회의원들의 목표가 신재현에게서 정상훈으로 옮겨 가는 순간이었다.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본 신재현이 물끄러미 정상훈을 보았다.
이래도 되냐는 염려 섞인 눈빛이었다.
정상훈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신재현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구도가 찍혀서 기사로 뜨면 또 정상훈과 신당의 지지율이 3% 정도는 상승할 것이다.
정상훈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 지지율을 바라보고 앞장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정치하려는 목적이 뭔데. 이런 인재들 지키려고 하는 것 아닌가. 민치호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암.’
신재현은 못내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지만 걱정하는 표정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눈치만 보고 있던 의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제나저제나 말 한 번 걸어볼까 벼르고 있던 의원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회에서 신재현의 악명은 다른 방향으로 높았다.
2년 전에 신재현을 이용해보려고 삼성 세무서 앞까지 찾아가 언론 쇼를 하던 류석호 국회의원이 바로 탈세 철퇴를 맞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건드리면 조사 들어 온다’라는 소문이 암묵적인 룰처럼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을 걸고 싶어도 눈에 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신당 대표인 정상훈이 스타트라인을 끊어줬으니 들러붙어도 이상할 게 없다.
“아이고,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언제고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이렇게나 노고가 많으시니 국민 여러분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저는 항상 신재현 부단장님을 응원합니다. 깨끗한 국회, 일하는 국회의 시발점이 될 겁니다.”
“신재현 부단장님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이런 분이 공무원을 하셔야죠! 이 나라의 보배입니다!”
뒤에서 물어뜯을 때는 언제고, 앞에서는 아부하기에 바빴다.
신재현의 입가에 쓴 미소가 맺혔다.
정상훈이 유도한 판이라 억지로 버티면서도 신재현은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크고 작음의 차이만 있을 뿐, 이들 모두 숫자를 장식처럼 달고 있었다.
입을 열면 저도 모르게 고함이 나올 것 같아서 신재현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그들의 머리 위를 꼼꼼히 훑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명, 쓴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으득.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유진환은 주먹에 힘을 주었다.
건물 안에 서 있는 자신에게 비치지 않는 햇빛이, 로비 앞에 서 있는 신재현의 발밑에 드리운 것조차 둘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의원님네들을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해온 건 바로 자신인데, 지금 벽을 짚고 서 있는 그에게는 아무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찾으시는 의원님들께 연락이 갈 동안 잠시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죠. 공무원분들이 현장에서 애로사항은 없는지 의견을 듣는 것도 저희 일입니다, 하하하.”
수십 명의 의원에게 둘러싸여 의사당 안으로 안내받아 가는 청년을 보며 유진환은 활활 타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분노와는 다른 끈적한 이것은 바로 질투였다.
유진환은, 신재현이 미치도록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