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68화 (368/500)

368화. 내부의 싹은 미리 자른다 (1)

청와대의 경제수석 임현승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화려한 장식이나 채색은 없었다.

그러나 청와대 안에 있는 건물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은 없다.

3층짜리 수수한 이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3개의 건물이 서로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서 있는 이곳은 바로 여민관이었다.

대통령 비서들과 행정관이 근무하는 곳 말이다.

그러니 임현승이 여민관의 복도를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직함이 직함이니만큼 여기는 그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의 위치가 어떻든 건물 모양새가 어땠든 안에서 보면 평범한 회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무실마다 파티션으로 나눈 자리에 직원들이 꽉꽉 들어차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 정경만 봐서는 일반 회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임현승에게도 그랬다.

처음 청와대에 입성할 때야 가슴 벅차고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전에 있던 곳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기재부 차관일 때도 일에 치여 살았고 지금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승진한 셈이니 그건 기쁘지만 일이 그만큼 과중해졌으니 마냥 기쁜 일은 아니었다.

일반 회사로 따지면 부장급에서 임원급이 된 것인데, 사기업에서도 임원급은 무척이나 힘든 자리다.

항상 실력과 실적을 강요받으며 언제 잘려나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임원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직원보다 계약직에 가까운 자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임현승이 임명된 시점이 참 미묘했다.

원래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를 함께하지 않는 게 좋다는 속설이 있었다.

임기 초반부터 함께하던 사람이면 어쩔 수 없지만 마지막 해에 임명된 사람이면 버림패라는 인식이 컸다.

보통은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오더라도 2, 3년을 버틴 후 사직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임현승은 대통령 4년 차에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 기피한다는 마지막 임기의 비서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은 임현승에겐 자질구레한 것에 불과했다.

레임덕에는 대통령이 힘을 잃는 걸 알고도 들어왔으며 정권이 바뀌면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흔쾌히 경제수석 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고 도와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를 지금 무겁게 하는 것은 레임덕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유는 최근 얻은 또 하나의 직책 때문이었다.

조세범 처벌 특별 조사단 단장.

긴 이름만큼이나 거창한 지위였다.

사무실에는 나가보지도 않을뿐더러 실무 보고조차 아직 한 번도 받은 적 없었는데도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직함이었다.

조사단의 서울본부 사무실이 있는 곳은 바로 종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임현승이 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임현승은 처음 조사단 결성일만 빼고는 단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실무자들이 편히 일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비교적 젊은 부단장 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안 그래도 젊고 경력이 부족한 이들이다.

자신이 나가면 회의를 주재하는 것은 자연히 단장이자 경제수석인 자신이 될 것이 뻔했다.

두 명의 부단장이 들러리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조사단에 고르고 골라 모은 팀장들은 부단장이 어리다고 무시할 만한 위인이 아니니 자신이 일부러 참석해서 팀장들의 콧대를 눌러줄 필요도 없었다.

언뜻 들려오는 소문으로만 봐도 그쪽은 이미 잘하고 있다.

실무 쪽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임현승은 조사단 때문에 어깨가 무거운 것인가.

‘빌어먹을 정치인 놈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인 임현승조차 최근의 공세는 눈 뜨고 못 봐줄 것이었다.

이런저런 라인으로 온갖 압박과 회유가 들어왔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이걸 정말 배울 만큼 배운 작자들이 하는 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경제수석님, 아무리 임기 마지막 비서관이라고 해도 그 운명까지 함께하실 생각입니까? 평생 공직에 있었고 이제 막 청와대 들어가신 분이 그 위치를 마지막으로 낙향하실 생각이에요?

-정치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경제수석이나 되시는 분이면 능력도 출중하시고 나라를 위한 마음도 뛰어나시니 당연히 국회에서 그 능력을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당은 항상 인재를 향해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항의 전화가 수십 통 와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천박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시커먼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는 쪽은 그나마 낫다.

위선은 떨지 않으니까.

-조사단이 지금 하는 짓은 국회에 대한 도전이자 국민에 대한 기만입니다! 행정부가 입법부를 이렇게 핍박한다고 국회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대통령을 올바른 방향으로 모셔야 할 비서관이라는 분이 정치에 개입하고 국회를 압박하는 것은 엄연한 위법 행위입니다! 국회는 자랑스러운 국민의 대표로서…….

이런 항의를 받았을 때는 정말 귀를 닫아 버리고 싶었다.

더군다나 항의한 사람은 예전에 아들 군대 면제로 논란을 빚었던 모 4선 의원이었다.

정치판에서 오래 굴러먹은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유수와 같았다.

누가 옆에서 들었다면 정말 경제수석이 탐관오리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임현승이 마치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국회의원들의 약점을 잡고 흔들려는 것처럼 호통을 치는데, 순간 자신이 진짜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거짓말을 많이 하다 보면 그걸 진짜로 믿게 된다더니.

너무도 진지하고 리얼한 항의라서 혹시 국회의원이 연기에 너무 빠져 자신이 청렴한 줄 믿어 버린 것 아닌가, 임현승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여의도의 그 어르신들은 체면을 중시해서 직접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기껏해야 보좌관이 거들먹거리며 전화하거나 항의 공문이 오는 게 전부였다.

아니면 그들의 인맥을 총동원해 압박하거나.

처음부터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은 없을뿐더러, 국회의원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 정부 부처 곳곳에도 그들의 인맥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회의원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개새끼들. 그런 권력을 가지고 할 짓이 없어서 공무원 압박을 해?’

임현승은 여민관 복도를 걸으며 쿵쿵 발을 굴렀다.

그의 거친 발걸음에 지나가던 행정관들이 흠칫했다.

경제수석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임현승은 꽤 자제한 상태였다.

정치인들이 얼마나 음험하고 치졸한지는 그동안 기재부에서 일하며 몇 번 겪어봤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다 똑같은 놈들이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이름만 국회의원인 개새끼들은 깡그리 골라내고 깨끗한 놈들만 남겨야 해.’

임현승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레임덕 정권의 경제수석 자리에 앉은 것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는 조사단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이루어냈다.

신재현이 계획을 짜고 지산에 쳐들어가는 동안 임현승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은 신재현이 손대기에 앞서 그가 직접 방문했다.

공기업 사장이든 공공기관장이든 현직 청와대 경제수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조사단장을 맡은 임현승의 뜻이 곧 대통령의 뜻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공기관 쪽은 임현승의 일갈 한 번에 금방 정리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재현의 행동이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했다는 점이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평범한 공무원 같으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했을 텐데.’

젊은 인사를 앉히면서 팀장들이 했던 우려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실력이야 확실한 건 알지만 이런 압박에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재현은 멋지게 해냈다.

그뿐인가?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사태를 마무리 짓기 위해 임현승이 뛰어다닌 것뿐, 아마 시간이 조금 더 흘렀으면 신재현이 혼자서도 깔끔하게 해결했을 것이다.

‘대체 어디서 배워 온 수완인지. 허, 참.’

당연히 민치호에게서 배운 거겠지만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수법으로 보자면 오히려 여의도의 능구렁이들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던 기업인들의 자선행사에서는 전무사 이사 같은 임원들 앞에서도 어색해 했었는데.

지금은 아마 대기업 회장들 사이에 갖다 놔도 멀쩡할 것이다.

오히려 회장들을 압박하며 탈세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겠지.

‘재밌겠는데?’

문득 그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여의도의 악랄한 수법에 대한 분노로 거칠게 걷던 모습은 많이 수그러들어있었다.

그렇게 임현승이 향한 곳은 어느 회의장이었다.

서른 명은 넘게 앉을 수 있을 법한 O자형 회의용 테이블에는 이미 자리의 주인이 몇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임현승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더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임현승은 수석비서관으로 엄밀히 말하면 오늘 회의의 참석자 자격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장관, 그리고 장관급 인사가 모여 국정을 논하는 자리, 즉 국무회의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대통령과 정책을 논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국무회의는 말 그대로 국무위원이 참석하는 자리다.

임현승은 복잡하게 놓인 테이블 사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는 국무위원의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그 뒤의 보좌관들이 앉는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비교적 대통령과 가까운 자리였다.

눈으로 그의 행적을 좇던 장관과 눈이 마주치자 임현승이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주 인사한 남자는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임현승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기재부의 차관이었으니 전 직장 상사인 셈이다.

그런 그도 임현승이 왜 참석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국무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속속들이 국무위원인 장관들과 보좌관들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당연히 대통령이었다.

임기가 이제 1년도 남지 않은,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는 행정부 최고수반 말이다.

그는 흘끗 임현승을 보고는 국무회의를 시작했다.

이들이 다룰 안건은 많았다.

부동산, 외교, 물가 등의 주요 안건이 먼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장관이 현 상황을 보고하고 대통령은 각 분야의 전문가인 장관과 보좌관에게 정확한 수치를 묻기도 하고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조사를 명령하기도 하면서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렇게 중요한 안건이 지나가고 난 후, 대통령은 가벼운 말투로 운을 떼었다.

“이제 급한 건 끝난 것 같으니 다른 보고를 들어볼까 합니다.”

국무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임현승에게 향했다.

못 보던 참석자가 있으니 당연히 그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임현승은 다들 알다시피 요즘 장안의 화제인 조사단의 공식적인 단장이었다.

“대통령 직속으로 특수 설립된 기관인 만큼 국무회의에서 그 보고를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불렀습니다. 임현승 조사단장님께서는 말씀하시죠.”

짐작이 맞았다.

임현승은 경제수석이 아니라 직속 기관의 대표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보고는 대통령에게 직접 했을 텐데, 국무회의까지 와서 보고할 필요가 있는가?

장관들이 의아해할 때 임현승은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사단 진행 상황을 보고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일상적인 업무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항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우리 행정부 분들도 몇 분 계셨는데요.”

대부분은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의 항의가 많았지만 간혹 한두 명, 행정안전부 차관보라던가 법무부 차관 같은 사람들이 조금 자중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메일을 보내 왔다.

그나마 공문이 아닌 것은 공적인 의견이 아니라서일 것이다.

국회의원 중에서는 유명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사람도 있었고 사법고시 출신도 많았다.

검사나 판사 출신도 꽤 되었다.

그러니 선배랍시고 행안부나 사법부의 지인들에게 싫은 소리를 했겠지.

지금이야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까지 한 상황이니 차관보가 소극적으로 사적인 항의를 보낸 것이지만, 나중에는 내부에서 어떤 은밀한 방해를 할지 모른다.

행정부라고 모두 깨끗한 건 아니니까.

신재현이 조사단을 지키기 위해 직접 지산을 쳐들어갔듯이 이곳 정무회의에서의 싸움은 임현승의 몫이었다.

“솔직히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외부의 적은 그렇다 치는데, 내부에서 쓴소리라니. 지금 조사단은 각 행정부처에서 그 힘을 빌려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사단이 지금 뭔가를 잘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단장인 제 앞에서 말씀해주시죠.”

임현승의 어조가 점점 거칠어졌다.

내용은 더더욱 거칠었다.

대통령까지 있는 자리에서 장관에게 할 말투는 아니었다.

“도와주지는 못할 판국에 항의라뇨. 제가 언제 각 부처에 적극적으로 국회의원님들과 싸워달라고 했습니까? 한 점 어긋남 없이 법에 따라 조사하는 것뿐입니다. 그걸 못마땅하게 바라보셔야겠습니까?”

임현승이 장관들에게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항의 메일을 보낸 게 장관이 아니라 차관이라 해도, 그런 중요한 서한을 장관의 허락 없이 보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장관 중에도 딴마음을 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조용하더라도 지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신재현이 기업들을 쳐서 함부로 조사단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은밀한 방해가 없도록, 미리 못 박아두는 것이다.

적어도 나중에 허튼짓을 할 마음을 먹었을 때 이런 대화를 떠올리도록.

마치 경제수석이 장관을 나무라는 모양새가 되자 국무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중에는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경제수석이 국무회의에서 저런 말투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잠시만요, 수석님. 말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조사단이 지나친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그리고 임현승의 말투에 불쾌함을 느낀 서울시장이 가장 먼저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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