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우리 팀에는 괴물이 산다 (11)
거래라는 말이야 흔히 쓰이는 거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오기엔 굉장히 부적절한 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거래 상대방이 대기업과 공무원이라니 함부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지금 공무원을 매수하려 했단 말인가?
이것은 지산의 회장이 알고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청탁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얘기였다.
특종을 바라긴 했지만 이런 폭탄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기쁜 마음과 당혹감을 섞어 기자가 질문했다.
“조사단원과 따로 접촉한 겁니까?”
“아뇨. 설마 우리 조사단원과 지산이 그렇게 멍청하겠습니까? 조사단원은 나름 철저하게 사람을 가려 뽑은 곳입니다. 저만큼 미친놈은 아니어도 적당히 정의감과 열의가 있는 분들이죠.”
신재현의 노골적인 어투에 기자들은 잠시 눈치를 보았다.
저 말을 그대로 기사에 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신재현이 가식 없이 말하는 사람이기에 기자들이 좋아하는 인터뷰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말투는 조금 손봐야 하지만 충분히 좋은 기삿거리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지산에서 스스로 일부 부서에서 불법이 있었다고 자진 신고를 했습니다. 그것도 그리 중범죄는 아닌 사안을요.”
지산에서 자진 신고했다고 포장해준 이유는 지산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조사단을 건드리는 다른 기업들에게 티 나게 경고하기 위해서는 ‘거래’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혹시라도 메시지를 알아먹지 못할 멍청한 기업들이 있을까 봐서였다.
하동문 쪽에서 각 기업에 은밀하게 접촉했을 테니 지산을 조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기업체들이 ‘조사단 압박을 그만두라는 거구나’라고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얄궂게도 거래라는 말을 꺼내버리면 지산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게 된다.
뇌물수수죄는 중범죄니까.
지산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인터뷰가 이 정도였다.
“이 시점에 뜬금없이 왜 자진 신고를 하겠습니까. 조사단의 다음 타겟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작년 세무조사에 이어 올해 특별 조사단까지 들이닥치면 곤란해지니까요. 불법이 있으면 자정을 할 테니 조사만은 참아달라는 무언의 메시지죠.”
기자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신재현의 발표를 들었다.
이런 얘기를 여기서 신재현에게 들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단 내용이 일종의 정치에 가까웠다.
국회에서 하는 그런 정치가 아니라 상황을 파악하고 머리를 굴리는 그런 종류의 일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신재현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도 놀라웠다.
지금껏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가는 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신재현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동안 생각한, 눈에 뵈는 게 없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그걸 말씀하셔도 됩니까?”
한마디라도 더 얻어내려고 애쓰는 기자들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신재현이 한 말은 뒷사정에 가까웠다.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슬쩍 뒷말을 흘리는 거야 꽤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가 끝나고 카메라와 녹음기가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었다.
‘설마 말실수한 건가?’
기자들 중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멋모르고 그만 툭 사정을 말해 버린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은 바로 생각을 바꿨다.
‘그럴 리 없지. 신재현이 누구인데.’
방금 신재현이 한 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해도 될 말, 안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재현이 뭔가 폭탄 발언을 날렸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자들은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결국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거든요. 조사단은 거래나 협상, 외압 따위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부단장이 둘 다 나온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입니다. 지산이 자진 신고한 것은 불법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지금 조사단이 아무리 바쁘든 간에 당연히 수사할 내용입니다. 거기에 더불어 저희는 현장 조사를 거치면서 지산이 신고하지 않은 불법적인 내용도 추가로 찾아냈습니다.”
신재현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를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 말하는 내용도 이해 갈 법했다.
특종을 던져주고 원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신재현의 말은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사 쓰실 맛나죠?”
“네!”
기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충분하다마다.
신재현이 여기서 어떤 걸 쓰고 어떤 걸 쓰지 말아야 할지 지시해준다 해도 기삿거리는 충분했다.
당장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가 선물을 드렸으니 이왕이면 조사단의 성격을 강조해주셨으면 싶은데요.”
역시나 원하는 방향이 있었다.
아마 민감한 얘기는 빼고 잘 포장해서 조사단에게 유리하게 써달라는 거겠지.
기자들은 웬만하면 신재현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가 선물이라고 표현했듯이 이미 특종을 받았다.
왜곡기사를 쓰라는 게 아니라면 오늘만큼은 비난 기사도 접어줄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이렇게 특종을 던져준 것은 다음에도 기삿거리가 있으면 주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괜히 거슬렀다간 다음에는 자기만 특종에 뒤처지게 될 수도 있다.
“거래라는 말은 빼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 좋은 어감을 줄 수 있으니까요. 쉽게 설명하기 위해 거래라는 단어를 썼지만 적당히 순화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이기도 하니까.
‘지산이 은연중에 뜻을 내비쳤다’ 정도로만 써도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여기부터가 중요합니다. 조사단은 그런 손길을 다 뿌리쳤다. 외압, 회유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걸 많은 분들께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눈치가 조금 있는 기자라면 신재현이 단순히 조사단을 어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외압과 회유가 많이 들어왔구나! 그래서 일부러 지산을 친 거였어!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정치부 경력이 있는 기자들은 순식간에 분석을 마쳤다.
그리고 색다른 눈으로 신재현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적절한 타이밍에 기자회견을 하거나 기삿거리를 제공해서 판도를 바꾼 적이 있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기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본인이 원하는 판을 깔고 있었다.
삼성세무서에 있을 적에 국회의원 류석호를 잡을 때, 그리고 장관을 칠 때 여론을 이용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주어진 상황에서 발버둥 치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다르다.
처음 신재현이 기자회견이라는 수단으로 언론 앞에 나선 게 겨우 2년 전이다.
그 안에 터득했다기엔 믿을 수 없는 노련함이었다.
정치에 일가견이 있는 능구렁이 국회의원쯤 되어야 기자를 이렇게 다룰 수 있다.
기자도 제멋대로 튀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언론을 잡으려고 돈도 먹여보고 외압도 가하며 애쓰는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상황은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저 젊은 얼굴 아래에 혹시 60살 먹은 정치인이 있는 건 아닌지 까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기자님들.”
“부단장님, 또 좋은 정보 주셔야 합니다!”
“저야 일만 하는 건데요, 뭐. 결과발표라도 괜찮으시면 그때 뵙겠습니다.”
“결과발표는 당연히 대규모 기자회견으로 하셔야죠! 기다리겠습니다!”
기자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헤어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언론을 다룬답시고 섣불리 적대하면 오히려 안 좋다.
지금처럼 저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았다.
신재현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들며 저 멀리 남아 있던 까만 승용차에 올라탔다.
‘저놈이 공무원이라서 다행이네. 정치라도 했다간 국회에 괴물이 나오겠어…….’
기삿거리를 얻어서 신난 젊은 기자들도, 신재현에게 두려움을 느낀 나이깨나 있는 기자들도 서둘러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삼삼오오 흩어졌다.
어찌 되었건 지금 모두의 생각은 똑같았다.
‘1초라도 빨리! 내가 먼저 올린다!’
***
조사단이 지산에 압수수색을 들어갔다고 속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종합기사가 떴다.
오후가 되자 팀장들은 왜 신재현이 기다리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기사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조사단이 지산 그룹 본사에 긴급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리고 경고를 날렸다.
누군가에게 보낸 경고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때문에 댓글에서는 그 대상이 국회의원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권력자를 친다더니 경고까지 날리네!
이런 감탄의 반응은 덤이었다.
물론 조사단의 팀장들은 이것이 국회의원에게만 보내는 경고가 아님을 알았다.
이 일에 얽힌 사람들이라면 대충 눈치챌만한 힌트가 숨겨져 있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지산이 압박을 가했는데 신재현이 바로 가서 털어 버렸다!
팀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각자의 사무실을 나섰다.
기사에는 어떻게 치면 된다는 가이드라인까지 적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기업을 가서 엎어 버리다시피 했는데 다른 기업체는 무서워할 것이 없었다.
팀장들은 기세등등하게 맡은 회사로 쳐들어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바로 고용노동부이었다.
노동부 공무원으로서 지금은 조사단 팀장인 40대 초반의 여성은 언제고 튀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두었다.
그리고 움직여도 된다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벼르고 있던 중소기업으로 쳐들어갔다.
조사단원으로서 첫 현장 조사이니만큼 팀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나오시면…….”
“기사 보셨죠?”
“네?”
“안 보셨으면 지금 당장 보시고요,”
“대체 무슨 기사를 보라는 겁니까?”
짚이는 것은 많았지만 일단 잡아떼고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업장을 헤집었다.
“일단 신고된 근로자는 31명인데 근로계약서 가져와 보시겠어요? 일용직 대장도 주시고. 사대보험 가입 안 하고 근무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네요? 연차대장이랑 급여대장도 보여주세요. 연차수당은 제대로 계산하셨죠?”
세법만큼이나 여러 불법이 자행되는 것이 바로 노동법이다.
근로감독관들이 작정하고 뒤지자 사장은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아니, 왜 조사단이 나오냔 말입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조세범 처벌 특별 조사단 아니에요? 이 사람들, 할 일이 없어서 우리 같은 중소기업에 조사를 나와요? 국회의원 조사한다며!”
하도 헤집고 다닌 탓인지 사장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노동부 직원들의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팀장은 조금 노골적으로 사장에게 말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모르고 조사단에 압박을 가하셨나요?”
“예? 그게 무슨…….”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요. 우리 부단장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고 가자 오히려 업체 직원들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들이 생각해도 잔챙이에 불과한 중소기업에 조사단이 직접 현장 조사를 나온 건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공무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조사단에 압박을 가해요? 우린 그냥 중소기업일 뿐인데요!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이건 권한 남용이에요!”
사장은 나름 근거를 갖고 따졌다.
그야 그럴 것이 얼마 전 누군가의 부탁으로 과장 하나를 자른 것은 그에게는 하등 찔릴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직원을 해고한 것뿐이었으니까.
그가 조사단원의 가족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했다.
“그래요? 바로 며칠 전에 부당해고 하셨죠? 그러면서도 실업급여 주는 게 싫어서 권고사직이 아니라 자진 퇴사로 처리하셨고. 당사자에게는 온갖 욕설을 하면서 말이죠.”
“직원을 자르는 건 사장인 제 고유 권한입니다! 왜 그런 것까지 조사단이 개입하는 겁니까? 이거 대통령 탄핵감 아니에요?”
뭘 잘했다고 대통령 탄핵까지 들먹이는지, 팀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살벌한 어조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신 것 같으니 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여기 기사 보이시죠?”
팀장은 친절하게 핸드폰으로 기사를 하나 열어서 보여주었다.
-조사단, 외압과 회유에는 강경히 대응하겠다 밝혀. 지산 그룹 압수수색.
사장은 아직도 이게 왜 자신과 관련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단이 대기업을 건드렸다는 사실 자체는 불안감으로 남았다.
대기업도 당당하게 쳐들어가는데 쪼그만 중소기업 하나는 못 건드리겠는가?
“이게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누군가가 과장을 최대한 괴롭히면서 자르라고 부탁했죠? 그 짓을 지산도 했습니다.”
사장의 눈에 불안이 서렸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팀장은 핸드폰을 집어넣은 뒤 어깨를 쭉 펴고 말했다.
“사장님이 자른 그 과장이 바로 우리 조사단원의 가족이에요. 왜 부단장님이 직접 지산으로 가서 담판을 지었는지, 왜 노동부 소속인 우리가 나왔는지 아시겠습니까?”
“흐업!”
사장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