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64화 (364/500)

364화. 우리 팀에는 괴물이 산다 (9)

“흐흠…….”

“크흐흡.”

우리는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부회장과 나, 둘 다 이 사태의 원인을 알고 있고 또한 해결책을 알고 있다.

서로 상대가 눈치챘다는 것도 안다.

그 상황에서 짐짓 화난 척, 떠보는 척하고 있자니 연극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크흠, 신재현 부단장님께서는 화가 풀리셨나 봅니다.”

“하아…… 더 추궁해야 할 게 남았는데요.”

이미 웃음이 터져 버린 상황에서 다시 분위기를 잡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도 지금 얘기는 중요하다.

조사단의 미래가 달린 것이기도 하고.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웃음기를 털어냈다.

부회장도 덩달아 순식간에 웃음을 지웠다.

두 번째 보는 건데, 진짜 따로 연습을 하나 보다.

그 순간 나는 억지로가 아니라 정말로 웃음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지금 부회장은 내게 맞춰주고 있다.

절대 얕봐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추궁하시죠. 듣겠습니다.”

“아뇨. 이미 사정을 다 아는데 추궁해봤자 쇠귀에 경 읽기 아닙니까.”

“제가 어떻게 신재현 부단장님의 말씀을 흘려듣겠습니까?”

“지금 이렇게 우리가 찾아와 따지는 것도 이미 예상하신 것 아닙니까?”

“……뭐, 그렇습니다.”

나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차를 단숨에 비우고 나자 부회장은 말없이 빈 잔을 채웠다.

나는 내 잔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왜 그가 조사단을 공격하는데 협조했는지, 왜 이렇게 순순히 말해주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토끼는 굴을 여러 개 파놓는다고 하죠.”

이것은 서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확인 작업에 불과했다.

이미 다 아는데도 굳이 입으로 말해서 확인하는 작업 말이다.

이것은 다음 단계인 협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어디서 들은 얘깁니다. 선거자금을 뿌릴 때, 어느 한 명의 후보만 밀어주는 게 아니라 골고루 자금을 넣어 준다구요.”

“사업하면서 올인하는 바보는 없지요.”

지현석도 뒤늦게 이해한 듯 조용히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후보만 도와주면 만일 다른 후보가 당선됐을 경우 곤란해질 수 있다.

돈은 많이 들겠지만 골고루 도와주면 나중에 누가 되든 상관없이 줄을 잡을 수 있다.

떨어진 후보에게 들어가는 기회비용이 크긴 해도 당선자에게 확실히 줄을 댈 수 있으니 남는 장사다.

지산의 부회장 지도석이 한 짓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부회장님은 국회의원과 우리 조사단, 둘 다에게 걸었군요.”

“네. 제가 어느 한쪽 편을 들 이유가 없잖습니까. 다른 쪽에 밉보이고 싶진 않아서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부회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냥 넘길 수 없는 발언이었다.

“부회장님은 조사단이 이길 확률이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아예 우리가 이길 여지가 없다면 국회의원의 부탁만 들어주고 끝났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나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곧 국회의원들 손에 조사단이 풍비박산 날 텐데 곧 추락할 놈들과 뭐하러 시간 낭비를 한단 말인가.

“저희가 몇 퍼센트로 예측하는지 알려드릴까요?”

은근히 떠보듯 말하는 부회장에게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아니요. 필요 없습니다. 들어봤자 괜히 마음만 어지러울 뿐이죠. 저희는 100% 이기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회장님이 양쪽 다 적대하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확신이 서네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지 않을 확신이요.”

부회장도 미미한 미소와 함께 찻잔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아까 임원들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희 지산은 전적으로 도와드릴 겁니다. 원하시는 부서가 뭔지 말씀만 하세요.”

“작년 세무조사가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조사단에 그렇게 내어주시면 타격이 있을 텐데요.”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상황에서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꼬리가 아니라 팔다리를 요구해도 내어주실 겁니까?”

잠시 부회장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내내 감췄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비쳤다.

그러나 금방 원래대로 평온한 낯으로 돌아갔다.

“부단장님께서는 그렇게 과한 요구를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쥐셨다 해도 나서서 적을 늘릴 필요가 없잖습니까.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계시다 해도 국회의원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우실 텐데요.”

나는 부회장을 살피듯 눈을 가늘게 떴다.

조사단에 여력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협상 테이블에서 그걸 빌미로 삼게 놔둘 수는 없다.

“혹시 그걸 약점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한데요.”

“그럴 리가요. 만약 여력이 없다 해도 저희가 선을 넘으면 바로 치실 분이 부단장님입니다. 이미 작년에 우리 지산 식구들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당분간 지산이 원래 위치를 되찾을 때까지 국세청과 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회장님 말씀은 이거죠? 지산은 우리가 원하는 걸 내어줄 생각이 있다. 하지만 살은 줘도 뼈는 줄 수 없다. 그것이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협상할 수 있는 선이다.”

“그것만으로도 부단장님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뭘 원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본보기죠.”

역시 알고 있었구나.

하긴 부회장에게 주어진 정보로도 충분히 추측 가능한 사실이다.

국회의원과 조사단이 맞붙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국회의원이 지산에만 압력을 청탁할 리는 없다.

조사단의 입장을 보여주기에 지산만 한 먹잇감이 없다.

“참 감회가 새롭네요.”

내가 부정하지 않자 부회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런 취급 받았을 회사가 아닌데. 우리 지산 말입니다.”

“국회의원의 외압에 이용당한 것 말입니까?”

“아니요. 조사단 말입니다. 정확히는 신재현 부단장님이요.”

“제가요?”

내가 어리둥절하며 묻자 부회장은 반쯤 식은 찻물을 들이켰다.

“우리 회장님은 말입니다. 이 시대에도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라서요. 절대 공무원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하실 분이 아닌데, 따로 저를 불러 지시를 내리셨단 말입니다. 만약 조사단에서 신재현 부단장이 직접 오거든 절대 문전박대하지 말고 원하는 걸 다 들어주라고요.”

이 말을 듣자 내내 잊고 있던 질문이 떠올랐다.

“회장님이 자애롭고 따스한 성격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둘째 따님과 사위를 재판정에 세운 저에게 그런 후한 평가를 내리시는 이유가 뭡니까?”

결론적으로 지산은 장남이 순조롭게 승계받게 됐지만 자기 가족을 건드리고 회사의 주가가 떨어졌는데 날 곱게 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인가.

“원한은 감추는 법입니다, 부단장님. 칼을 들고 날뛰는 전쟁터 한복판에 감정만 앞세워서 뛰어들 만큼 바보는 아니라서요.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부단장님에게 별 감정이 없습니다.”

“그건 또 왜죠?”

“주제도 모르고 경영권을 탐내는 동생과 매제를 치워주셨으니까요.”

부회장은 전혀 숨김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내게 원한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턱을 받쳤다.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물론이죠. 그걸로 뭔가를 보답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결과적으로 장남인 부회장에게 이롭게 흘러갔지만 나는 당연히 그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거래가 아니었고 우리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으니 서로 주고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것을 짚기 전에 부회장이 먼저 선수를 쳐서 말한 것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화려하게 신문을 장식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죠.”

“특허권 분쟁으로 나오셨으니 그걸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중소기업의 특허를 저희 사업부에서 빼앗은 건이 있는데.”

살쯤이야 내어주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부당행위를 말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어졌다.

평소에 대체 어떤 식으로 사업을 키워왔는지 알만했다.

나는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내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가볍게 내어주는 ‘피와 살’이 중소기업의 특허권 쟁탈이라. 파고들면 얼마나 불법적인 거래가 나올지 궁금한데요.”

국회의원의 청탁도 받은 놈이니 분명 평소에도 여의도와 이런저런 거래가 있었을 거다.

비자금도 있을 테고 돈세탁도 했겠지.

저번 세무조사 때는 딸과 사위만 건드리고 넘어갔다.

그 덕에 파란을 면했지만 언젠가는 불법적인 면을 걷어내 주고 싶은 회사였다.

부회장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설마요. 제가 뭐 대단한 불법과 비리를 했겠습니까? 다만 어떤 회사든 털겠다고 마음먹으면 먼지는 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죠. 부단장님이 마음먹으면 지산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태풍을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야 지금이 적기긴 했다.

세무조사가 있던 것이 바로 작년이고 조사단에 큰 힘과 관심이 집중된 지금 치면 재계 서열 30위 정도는 더 내려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모아둔 힘은 이런 놈에게 쓰려고 아껴둔 것이 아니다.

바로 여의도를 치기 위해 벼려둔 것이다.

부회장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적당히 마무리하자는 협상이 가능한 것이고.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군요, 부회장님.”

“사업에 그런 감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단장님.”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맞받아치는 부회장을 보고는 나는 선을 그었다.

이 사람은 얽힐수록 곤란한 종류의 인간이다.

“이번 건은 거래입니다. 지산에서 국회의원 편을 들어 우리 조사단을 압박하려 한 것과 지산에서 특허권 침해 건을 내어준 것. 거스름돈 없이 이걸로 끝인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서로 더 빚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 만나면 0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런 뜻이었다.

“100을 받으면 120을 돌려줘서 마음의 빚을 안겨드리는 것이 정석인데, 부단장님과 적대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깔끔하게 끝내겠습니다. 전무에게 미리 언질해뒀으니 나가서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향하다 말고 뒤돌아서서 부회장을 노려보았다.

“다음에도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회사든 털면 먼지가 나온다구요? 제가 본 다른 대기업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지산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이자 경고가 될 겁니다. 만약 다음에 제가 지산에 왔을 때도 여전히 불법과 탈세가 판치고 있다면 그땐 가용 전력 전부를 동원해서 털어드릴 테니까요.”

부회장 입장에서는 위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다음에도 넘기면 된다고 생각할 테고.

그런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오늘 협상했다는 사실만으로 혹시라도 ‘저놈은 거래가 통하는 상대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길 바랐다.

그러니 보내는 경고였다.

부회장이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눈 얘기를 봐서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사도 나누지 않고 말없이 일어섰다.

일종의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문으로 나가는 우리의 등을 향해 부회장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단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정세와 판도를 바꿔주세요.”

겉으로 보아서는 응원 같았지만 절대 아니다.

우리가 정국을 흔들어놓으면 혼란을 틈타 그 사이에서 이익만 쏙쏙 빼먹겠다는 속셈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대답 없이 부회장실을 나섰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임원 중 하나가 아직도 남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부터 가시겠습니까?”

그는 아예 말만 하면 어디든 데려다줄 것처럼 얌전히 내 말을 기다렸다.

내가 잠시 생각하고 있자 지현석이 말했다.

“특허권 담당하는 부서 어딥니까?”

“연구전담부서 말씀이시군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막 발을 떼려던 둘을 내가 막아섰다.

“반으로 나누죠. 지현석 검사님은 특허권 조사하러 가주세요. 그리고 전무님께서는 하청 업체들 명단 좀 주시죠.”

“예? 하청이요?”

부회장이 넘겨주기로 한 것은 특허권 분쟁이다.

그런데도 부회장실을 나오자마자 거래를 어기는 듯한 행동에 지현석도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물론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잠시 손을 들어 지현석을 멈춘 후 임원을 재촉했다.

안내를 맡은 전무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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