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우리 팀에는 괴물이 산다 (8)
나와 지현석은 서울 본부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자동차에 올라타고 지산의 본사 건물로 향했다.
우리 둘만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산의 본사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요란한 승용차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건물 바로 앞의 도로를 차지하고 쭉 늘어선 승용차가 지금 대충 세어봐도 족히 5대는 된다.
누가 봐도 뭔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당장 지산 건물의 경비원들과 직원들 몇몇이 나와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는 잔뜩 날 세운 경비원들이 경계하며 수런거리고 무슨 일인가 호기심을 못 이긴 직원들이 구경을 나온 것에 가까워 보였다.
모두의 시선을 끌 정도로 저렇게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도 주차하면 안 된다느니 실랑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저 정도라면 이미 차량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입구를 지키며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자동차로 진을 친 가운데 딱 한 자리, 본사 정문 바로 앞에 비어 있던 공간에 주차하고 내려서자 다른 시커먼 차량에서도 줄줄이 사람들이 내려섰다.
딱 봐도 시커먼 정장을 차려입은 공무원들이 스무 명도 넘었다.
목에는 보란 듯이 공무원증을 걸었다.
나와 지현석도 내리자마자 목에 공무원증을 걸었다.
나 혼자만 국세청이라고 적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검찰청이다.
우르르 몰려든 수사관들이 늘어서자 꽤 장관이었다.
일부러 요란하고 화려하게 올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우리는 다 때려 부수러 온 사람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를 지키던 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앞에 선 지산의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뭡니까?”
직원들이야 죄가 없지만 입구에서부터 막히는 건 곤란하다.
우리는 지금 본보기를 보이고 있는 거니까.
이것은 조사단을 건드린 놈들에게 향한 시위이자 조사단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더불어 아까 팀장들에게 말했듯 그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가차 없이 쳐버리라는 내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 신재현 부단장님이시죠?”
“제가 누군지 알면서 막는다는 거네요. 공무집행 방해일까요, 아니면 저 위에서 뭔가를 한창 파기하고 있을까요?”
힘없는 직원에게 하는 말치고는 강한 어조인 건 인정한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래서 억지로 밀고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춰준 것이기도 했다.
날 상대로 정말 막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을 테고.
“아, 아니 그럴 리가요! 다만 저희는 왜 오신 건지 이유를 모르니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보고드릴 시간은 주시겠습니까?”
“밖에 저렇게 많은 검찰 수사관들이 차를 대고 있는데 보고가 안 들어갔다구요? 이미 임원 선까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다리란다고 기다려주면 기습 조사의 의미가 없죠.”
“그건 그렇지만……!”
이 정도면 많이 멈춰준 거다.
위에서도 이 직원에게 큰 기대를 걸진 않았을 거다.
그래서 나는 바로 1층을 가로질렀다.
사실 외압을 걸어온 회사는 지산 외에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하필 지산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조사단이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면 얕잡아 보이게 된다.
더 강한 공격이 들어올 것이고 내가 조사단을 지키기는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강하고 커다란 곳을 칠수록 효과가 좋다.
지금의 내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곳.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지산이 제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기도 했다.
지산이 왜 외압에 손을 거들었는지는 모른다.
국회의원과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고, 예전에 빚을 졌던 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하게 조사단이 질 거라 생각하고 국회의원 손을 들어준 걸 수도 있다.
아예 조사단원의 친인척이라는 것을 모르고 외압을 가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보여줘야지.
건드렸다간 어떻게 되는지.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국세청에서는 작년에 지산의 세무조사를 했다.
명백한 탈세와 불법의 증거가 있지 않은 한 국세청은 다시 세무조사를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조사단에는 국세청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탈세만 따져도 꽤 뱉어냈던 회사니만큼 불법적인 것도 뒤져보면 나온다.
오늘 핑곗거리로 삼은 것이 바로 특허권 분쟁이었다.
“그럼 개찰구 좀 열어주시죠.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국세청에게 털려 본 지산의 사람들은 정부 기관이 작정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겪어본 이들이다.
외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무원들이 뭘 할 수 있는가.
오늘은 뭘 하러 왔는가.
작년의 기억이 아직 새록새록 떠오를 테지.
우리가 그를 지나치자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우리를 따라왔다.
임원진도 절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내 생각이 맞았나 보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임원들이 내렸다.
그리고 출입증 필요 없이 오고 갈 수 있도록 당장 1층의 개찰구부터 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40대, 50대 임원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버선발로 나왔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뭐든 협조하겠습니다. 그 전에, 무엇 때문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지현석의 차례였다.
평소와 달리 넥타이를 꽉 매고 소매도 내린 지현석은 틈 없는 검사 그 자체였다.
“중소기업체 여럿과 특허권 분쟁으로 소송 중이시죠? 그 과정에서 불법 리베이트, 부당 계약서 작성, 특허권 침해 등의 의혹이 있습니다.”
“그걸 지금 조사하시겠다고요?”
“예.”
“조사단에서요?”
“물론입니다.”
“조세범 처벌 특별 조사단에서 말이죠?”
“네.”
담담하게 대답하는 지현석과 당혹스러워하는 임원들의 눈빛이 섞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국회의원을 치겠다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우리가 난데없이 특허권을 들먹이니 영문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지산의 다른 일반 직원들과 충분히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임원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임원이 운을 뗐다.
“경영지원팀, 회계팀, 총무팀, 기술개발부, 영업관리부, 특허개발팀 등등 필요하신 부서는 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희는 전적으로 협조할 겁니다.”
원하는 건 뭐든 해주겠다며 달래려는 것이 느껴졌다.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항복 의사를 표출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 조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잠시라도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걸 파악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잘하면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까요? 혹시 회장님 계십니까?”
“회장님은 아시다시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셔서 부회장님이 총괄하고 계십니다. 모시겠습니다.”
임원진이 방향을 틀었다.
아예 고층만 운영하는 직통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옆에서 지현석이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잠자코 따라와 주었다.
“대화하시는 동안 수사관분들은 여기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임원이 먼저 수사관들을 빈 회의실로 안내했다.
부회장실로 들어선 것은 나와 지현석, 둘뿐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그는 동요 없이 우리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가왔다.
작년에 있던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를 원수처럼 대해도 다름없을 텐데 꺼리는 내색도 하나 없었다.
“이렇게 두 분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지산 그룹의 주인이 된 장남 지도석은 비서가 내어 온 차를 권하며 여유롭게 말했다.
“그래서, 특허권 분쟁 때문에 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부회장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기분이 상한 건가 싶었는데 잠시 후 그는 부회장실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크흐흡, 크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올해 들어 가장 웃긴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회장이 신나게 웃긴 했지만 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부회장은 내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으니까.
애초에 그가 웃은 행동 자체가 내게 어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네가 진짜 지산을 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원래의 목적을 말해라.’
부회장의 메시지는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척 조사 얘기를 꺼내는 대신에 가볍게 받아쳤다.
“재밌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생각을 눈치챘다는 티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귀찮은 떠보기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합의이기도 했다.
내가 담담하게 차를 마시자 부회장은 순식간에 미소를 지웠다.
따로 연습이라도 하는 건지 원래 표정으로 돌아오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아니면 애초부터 진짜 웃은 게 아니었거나.
“원하시는 게 뭡니까?”
서론을 뛰어넘자는 무언의 합의 덕분인지 부회장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지현석이 대꾸했다.
“굳이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얻어갈 수 있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아신다고 해서 뭘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지현석도 방금 오간 대화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아먹은 것 같았다.
“글쎄요.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겠죠.”
“방해라…….”
“특허권 침해 때문에 오셨다면서요? 중소기업과의 특허권 분쟁은 물론 중요하죠. 그런데 국회의원 조사하느라 온 국민의 관심을 얻고 있는 바쁘신 분들이 특허권 때문에 지산에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딱 둘밖에 없는 부단장이 모조리 행차하셨는데 웬만한 일은 아니겠죠.”
머리는 좀 돌아가는군.
우리는 침묵을 지키며 차를 마셨다.
어디 더 말해보라는 뜻이다.
“두 분이 하는 일은 정치와 다름없습니다. 어딜 가는지, 뭐라 말하는지 하나하나가 메시지가 되어 퍼지죠. 그러니 지산에 온 이유는 절대 특허권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건 그냥 수사관이나 특허청만 보내도 충분하니까요.”
부회장은 비교적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의 의도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평소라면 머리 좋은 사람을 상대하면 불편한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이해가 빠르니 이야기가 편해질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이미 내 목적을 안다고 해도 주도권을 쥘 필요가 있다.
“그럼 제가 왜 화났는지도 아시겠습니까?”
나는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부회장은 단숨에 표정을 굳혔다.
표정 관리를 실패했다기보다는 내가 짐짓 심각한 척을 하니 그에 맞춰준 것이다.
“걸리는 게 딱 하나 있군요. 제가 하동문 의원에게서 부탁을 받은 게 있거든요.”
부회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국회의원의 부탁으로 공무원 가족에게 외압을 가하는 일이니 당연히 부회장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내용도 아십니까?”
“예, 압니다.”
“그럼 우리 조사단원의 가족에게 부당한 압박을 가하도록 명령한 건 부회장님이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나는 질문을 멈췄다.
여기까지 순순히 대답할 줄은 몰랐다.
내가 다 알고 쳐들어왔다 하더라도 잡아떼면 그만인데.
“어째 솔직하시네요.”
“부단장님은 이미 다 알고 오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특허라는 명목하에 검찰을 대동하고 쳐들어오신 것 아닙니까? 저도 곧잘 쓰는 방법입니다. 감히 지산을 건드리는 놈들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쓴맛을 보여주죠. 가장 편리하고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나와 지현석은 시선을 교환했다.
지현석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그는 답답한지 꽉 매어져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말했다.
“지산에는 회장님만 계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부회장님께서 모든 걸 이어받으셨군요. 지창태 회장님께서 물러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뻔뻔하기는.
하지만 이 자리는 낯짝 두꺼울수록 유리한 싸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노골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부회장님, 그럼 하 의원님이 정확히 누굴 겨냥한 건지 알고 계셨으면서도 부탁을 받아들였다는 뜻인데요.”
“맞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하신 말씀은 아니죠? 지산은 우리 조사단을 적대하기로 마음먹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부회장은 찻잔에 새 찻물을 부으며 피식 웃었다.
“저희는 조사단을 전격 지지합니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지현석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미세하게 갸웃했고 나는 부회장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