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우리 팀에는 괴물이 산다 (6)
-쏴아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민치호와 이선균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들이 일부러 정색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표정관리를 하느라 부드럽게 하고 있던 얼굴의 근육을 푼 것에 가까웠다.
연기할 필요가 없으니 지금의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푸후…… 이런 고민을 벌써부터 할 줄은 몰랐는데.”
민치호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양팔을 올려 등받이에 걸쳤다.
이선균 역시 주방에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맞장구를 쳤다.
언제 웃었냐는 듯 딱딱한 얼굴이었다.
“청장님 말씀대로입니다. 무척 빠르네요.”
이선균은 익숙한 듯 프라이팬을 두 개 꺼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한 치도 헤매는 법이 없었다.
선생님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가르치면 곧잘 따라오는 학생이 있다고.
그런 학생에게는 수업 진도 외에 뭔가를 더 가르쳐주고 싶어진다고.
이들에게는 신재현이 그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그런 천재의 부류는 아니었다.
다만 가르치면 금방 이해한다.
무언가를 할 때 옆에 세워두기만 해도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일머리라고 할 수 있으려나.
지능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그랬다.
나이에 비해 조금 벅차다고 할 수 있는 부단장 직책을 거리낌 없이 맡긴 것 말이다.
이들 생각에는 신재현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지금도 잘 하고 있고.
그 믿음을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이젠 앞서 나가네요.”
“그러게.”
진도가 너무 빠르다.
원래 이 둘의 계획은 신재현에게 일단 중간 관리자의 맛을 보게 해 주는 거였다.
명령을 듣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은 보는 것이 확연히 다르다.
고려해야 할 것도 달라진다.
건물 밑에서는 뭐가 보이겠는가.
교통 체증이나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겠지.
거기서 5층만 올라가도 건물 너머가 눈에 들어온다.
이 교차로만 빠져나가면 저 멀리는 길이 뻥 뚫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올라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이 골목으로 빠져나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그것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설령 판단을 실수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직책을 맡기긴 했지만 그만큼 뒤에 버티는 사람도 많다.
대통령에 경제수석, 전임 국세청장과 현직 국세청장.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일부러 끌어들인 사람들이다.
신재현이 어떤 사고를 치든 웬만하면 다 수습이 가능한 라인업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라.
하고 싶은 만큼 해 봐라.
날뛸 수 있게 준비해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신재현이 하는 고민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적어도 국회의원 다 치고 난 다음에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막 새 업무를 받아보는 사원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몰라서 막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업무에 익숙해지면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막 나갔는지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멋모르고 일할 때가 가장 거침없을 때다.
그리고 지금 조사단 부단장은 차라리 그렇게 겁 없이 날뛰는 사람이 더 어울렸다.
본인이 어떤 짓을 했는지 깨닫고 겁먹는 것은 국회의원의 상당수를 치고 난 이후에나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재현은 지금 그 단계를 이미 뛰어넘은 것이다.
자신의 손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잠깐 시간은 벌었다 치고, 뭐라고 해줄지 생각은 해 두셨죠?”
“잠깐 생각해봤는데 결국 본인이 납득해야 하는 거잖아? 그럼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 아닌가?”
“더 혼란스러워 하는 거 아닐까요?”
“이미 본인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알면서 이래도 되는지 도덕과 이성이 충돌하니까 고민인 거잖아.”
이선균이 식탁 위에 음식을 깔기 시작했다.
급하게 민치호의 집 냉장고를 뒤져서 있는 재료로 한 거다 보니 볶음밥과 계란프라이, 소시지야채볶음이 전부였다.
민치호가 자연스럽게 잔을 들고 식탁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냉장고에 게장 있어. 그것도 꺼내 줘.”
“예.”
이선균이 다시 냉장고를 열고 밑반찬을 탈탈 터는 동안 민치호는 금세 술 한 잔을 다 비워냈다.
이선균에게는 딱 한 잔만 하겠다고 말해놓고서 지금 도로 빈 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잔에 얼음을 먼저 넣는 걸 보니 내일 출근한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아서 이선균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마침 욕실 문이 열리고 신재현이 나왔다.
따뜻한 물 덕분인지 그는 아까보다 한결 표정이 풀려 있었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얼른 표정을 원래대로 고쳤다.
민치호가 손짓했다.
“이 과장이 타이밍 잘 맞췄네. 어서 와서 앉아.”
신재현은 한 상 그득하게 차려진 식탁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과장님이 다 하셨다구요?”
“아뇨. 밑반찬은 사모님 솜씨죠.”
“……그러니까 이거랑 이거는 과장님께서 직접 하셨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선균이 거실의 테이블로 가더니 자신의 술잔을 들고 왔다.
그냥 한마디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왔을 뿐인데 졸지에 상사가 해주는 밥을 먹게 된 신재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딱 두 개밖에 안 했는데……? 그리고 소시지는 우리 안주라 좀 많이 한 거고.”
이선균까지 식탁에 자리 잡자 민치호가 젓가락을 들고 단박에 소시지를 집어먹었다.
그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서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신재현은 주춤하며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감히 상사에게 밥을 차리게 만들다니.
불편함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 깨작거리던 신재현도 한술 뜨고 나니 흡입하듯 퍼넣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9시가 넘은 시각이다.
잊고 있던 허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제 밥이 좀 들어가나 봅니다.”
“아, 과장님. 진짜 맛있네요. 한두 번 해보신 솜씨가 아닌데요.”
“그야 우리 청장님이 예전부터 몇 번 부려먹으셔서 그렇죠. 청장님 댁에서 잡다한 얘기 하다 보면 시간이 늦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꼭 저한테 시키신단 말입니다. 그래도 윗분인데 요리 못한다고 대충 해서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연습했습니다.”
이선균이 허허 웃으며 주제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러니까 늦은 시간에 왔다고 해서 청장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청장님은 갑자기 뭐 생각났다고 저희 집에 쳐들어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선균의 말에 민치호가 놀리듯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 과장이 자꾸 우리 집으로 오는 거구만. 이젠 신 팀장도 합류하는 셈인가?”
조금이라도 부담감을 덜어주려는 노력이었다.
이미 이선균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언제든 와도 된다고.
민치호와 이선균은 술을 홀짝이고 신재현은 볶음밥을 들이켜다시피 했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직도 두렵나?”
주어와 목적어가 빠져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는 뻔했다.
아까 거실에서 하던 이야기의 다음이다.
신재현이 으드득거리며 게장을 먹다 말고 손가락에 묻은 간장을 쪽 빨았다.
“예. 저놈들이 하는 수법을 볼 때마다 치를 떨었어요. 실망스럽고 화도 나고. 그런데 제가 하려는 것과 저놈들이 하는 짓이 뭐가 다를까요? 목적이 다르니까 괜찮다? 아니면 나에겐 정의가 있으니 괜찮다?”
신재현의 목소리는 무겁고 우울했다.
“제가 언제까지고 옳은 축에만 있을까요? 나중에…… 정말 혹시라도 제가 틀린 선택을 하게 되면 어쩝니까? 제가 저놈들처럼 행동하면요?”
이선균도 어느새 한 잔을 다 비웠다.
민치호의 뒤를 따르듯이 이선균도 두 잔째를 따랐다.
민치호는 반 정도 남은 잔을 홀짝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뭐 어떤가?”
“……예?”
신재현으로서는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민치호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신재현. 그 생각도 해 봤지? 그동안 나와 이 과장 말이야. 저놈들이 수작 부리는 게 처음이 아닐 텐데, 하다못해 국세청 내부에서도 손경진 원장님 같은 사람들하고 치고받고 했을 텐데. 그럼 지금 네 고민하고 똑같은 고민을 했겠지. 그런 생각에서 물어보러 온 거 아냐?”
“……네. 그렇습니다.”
“그래. 네가 생각한 대로야. 당장 최근에 있었던 손경진 원장 건을 예로 들어보지. 손 원장님에게도 사람은 꽤 있었어. 그들을 원장님에게서 떼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원장님은 능력 있으면 기용하고 쓸모없으면 가차 없이 버리는 타입이라서 그쪽으로 공략했어. 원장님은 더 이상 힘이 없고,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으며 국세청의 대세는 이미 내게 기울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지.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신재현은 계란프라이를 젓가락으로 가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전국으로 흩어 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정기발령도 기다리지 않고 전부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에 관계없이. 원장님이 그걸 막지 못했으니 단번에 힘의 실추를 느꼈을 거야. 그들은 미련 없이 원장님을 버렸다. 여기서 내가 뭘 가장 고려 했을까?”
신재현은 반숙 노른자를 볶음밥에 얹다 말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정답이 맞는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피해의 최소화요?”
“그래.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완벽할 수는 없어. 항상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손경진 원장님 건도 그랬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을 줄 수는 없어. 손경진 원장님 건만 해도 그랬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파벌이 완전히 와해되면 원장님의 사람들을 다시 불러올려서 적재적소에 쓰겠지만, 그들이 원치 않게 지방으로 날려 간 건 사실이야. 그들에게는 부당한 피해겠지. 그래서 가만 놔뒀으면 어떻게 됐을까.”
“원장님의 힘이 그대로 국세청에 남으니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겠죠. 국세청은 내부에 적을 안고 외부와 싸우게 되었을 거고.”
“너는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나? 많은 피해가 발생했으니까?”
“아니요.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고 봅니다.”
“그래, 그거야.”
민치호가 든 잔이 흔들리며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재현 역시 남은 볶음밥을 해치우느라 식기가 부딪혀서 달그락거렸다.
“네 안에 기준을 딱 세워.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 기준으로 행동해. 참고로 내게 있어 최우선의 기준은 내 사람이 다치지 않는 거야. 상황이 좀 나쁘게 돌아가도 결국 사람만 무사하면 어떻게든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거든.”
신재현이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신재현이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민치호는 거실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신재현이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왔을 때는 이선균이 어디선가에서 가져온 과자로 아예 판을 벌려둔 후였다.
거기에 깨끗한 새 잔도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신재현이 소파에 앉자 민치호가 손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한 모금 크게 삼킨 후, 신재현이 입을 열었다.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 최우선 기준은 탈세범을 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원래 정해진 용도 외로 조사단을 써도 되는 겁니까?”
“그 이외의 방법을 생각해봤나?”
“네. 이보다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게 현재의 최선책이야. 최선이라는 건 모든 이에게 완벽한 대책이라는 뜻이 아냐. 여러 선택지 중 가장 좋고 훌륭한 대책이라는 거지. 이 이상의 선택지가 있나?”
신재현은 잔을 한 바퀴 돌렸다.
그 안에서 빙글 도는 얼음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재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됐다. 망설일 필요 없어.”
어떻게 보면 무서운 말인데도 민치호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가 평온한 얼굴로 과자를 집어먹자 이번에는 이선균이 입을 열었다.
“신 팀장은 너무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시 앞으로 똑같은 놈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라면,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내가 단언해줄 수 있어요.”
희망을 구하는 눈빛으로 신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가장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은 이 둘의 확신 어린 말이었을 것이다.
괜찮으니 해도 된다는 믿음 섞인 허락, 잘하고 있다는 확언.
그리고 민치호와 이선균은 필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한 순간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신 팀장은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테고. 그럼 적어도 길을 잘못 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할 거잖아요.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지. 맞죠?”
“네, 과장님.”
신재현은 여전히 가라앉은 모습이었지만 아까처럼 흔들리는 기색은 없었다.
눈빛에 힘이 실리는 것을 본 민치호가 종지부를 찍듯 말했다.
“네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 이제는 주저하지 마. 상대 쪽에 어떤 피해가 발생하든. 주저하면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어.”
“예. 알겠습니다.”
굳은 음색으로 대답하는 신재현에게 힘을 실어주듯, 민치호는 이제 망설임이 사라진 부하 직원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가서 조져. 그렇게 네 힘을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