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우리 팀에는 괴물이 산다 (5)
사실 오늘 퇴근할까 야근할까 오후 내내 고민했다.
쌓인 일을 보자면 야근을 하는 게 맞았다.
평소 내 성격이라면 당연히 남아서 야근했을 것이다.
문제는 내일 아침 서울에서 회의가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운전하려면 너무 늦게까지 일하긴 곤란하다.
물론 내 멘탈이 정상이었다면 야근 감수하고 새벽에 차를 몰고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운전은커녕 야근할 자신도 없었다.
아까 그 상태로 야근했다간 사고가 터졌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내 상태를 보았을 때 그랬다.
숫자가 눈에 제대로 안 들어오고, 보고서를 봐도 세법이 안 떠올랐다.
그래서 6시가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왔다.
퇴근하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직원들은 남아서 야근하면서도 오히려 내게 힘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가 외부의 일로 바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세종-서울 퇴근 버스에 올랐다.
6시 30분에 정부세종청사 제3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퇴근 버스는 이미 퇴근하는 공무원들로 대부분의 자리가 차 있었다.
나는 뒤쪽의 자리를 하나 잡고 눈을 감았다.
보통 회사 일로 멘탈이 깨질 때는 둘 중 하나인데.
일이 힘들거나 사람이 힘들거나.
이번엔 그 틀에서 벗어난 일이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나쁜 의미로.
-부우웅.
버스가 지친 공무원들을 싣고 주차장을 나섰다.
세종시를 벗어날 무렵 차창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이 버스를 두드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부드럽게 버스의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를 묻었다.
버스 안은 조그만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다들 지쳐서 자고 있는 것이다.
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눈을 감아도 잠이 들지 않았다.
결국 서울까지 오는 내내 뜬눈으로 옆에 지나가는 차들의 번호판이나 훑었다.
막상 서울에 도착하고 나니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저마다 집으로 향하는데, 정작 나는 버스 정류장 안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이제 대충 아무 데나 모텔을 잡고 하룻밤 잔 후에 내일 아침 일찍 본부로 출근하면 된다.
제주도 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월셋집의 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이다.
세종시에서 자그마한 집을 하나 얻었는데 어머니는 지금 거기에 있다.
원래라면 서울이 내 근거지였고, 이렇게 비를 피할 필요도 없이 집에 가면 되는 거였는데.
내가 집 없는 사람이 아닌데도 갑자기 갈 곳이 없다는 막연함이 들었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걸 보니 지금 꽤 우울한 모양이다.
단적인 예로,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었는데도 우산을 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눈에 띄는 대로 아무 모텔이나 들어가려다가 누군가를 떠올렸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그때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민치호의 아파트를 찾았다.
막상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는 덜컥하는 마음도 들었다.
전화라도 하고 올걸.
집에 없으면 어떡하느냐는 둘째치고 민치호가 있어도 문제다.
뒤늦은 후회로 아차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민치호는 날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먼저 꺼냈어야 했는데 그 순간에도 나는 나를 먼저 생각했다.
“청장님, 오늘 하루만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왜 왔냐,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는 말은 없었다.
민치호는 당연하다는 듯 옆으로 비켜 섰다.
그것이 너무 고마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선균이 말없이 수건을 건넸다.
이선균도 있었구나.
하긴 둘은 언뜻 봐도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
거실에 놓인 술잔을 보아하니 이미 한창 마시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상사의 저녁 시간을 방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은 시간에 말도 없이…….”
“오고 싶으면 와야지. 할 말도 있는 것 같고. 맞지?”
“네…….”
민치호 앞에서 숨길 수는 없었다.
숨길 생각도 없었고.
나는 이선균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민치호와 이선균도 각자 잔이 놓인 자리에 앉았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예고 없는 불청객인 내가 끼어들었어도 자연스러웠다.
언제까지고 기다려줄 것처럼 둘은 말없이 술만 홀짝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온 것까진 좋은데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첫째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서였고, 둘째는 믿고 맡겨줬는데 내가 고민을 한다는 게 미안해서였다.
“많이 힘듭니까?”
내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자 이선균이 안부 인사라도 묻듯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비 오네요? 수준의 단조로운 말투였다.
나는 즉답했다.
“아뇨. 힘들지는 않습니다. 재밌어요.”
“그럼 뭐가 그렇게 신 팀장을 이 비 오는 날 여기까지 몰아붙였을까요?”
이선균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민치호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둘은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날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운을 뗄까 하다가 나는 먼저 묻기로 했다.
“혹시 따로 보고 받으셨습니까?”
“어떤 걸 말이죠?”
“조사단에 공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조사단원의 친인척에게 불이익을 주는 식입니다. 이미 확인된 것만 국세청 지부에서 다섯 명이고 다른 기관에서도 몇 보이고 있습니다.”
“처음 들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민치호와 이선균 모두 모르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조사단의 보고 체계는 딱 둘이었는데 모든 자료는 일차적으로 나와 지현석에게 모인다.
그리고 부단장인 우리 둘이 서로 정보를 공유해 취합한 후 윗선으로 올린다.
그 윗선이 바로 국세청장과 지검장이었다.
나는 국세청장에게, 지현석은 지검장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원래라면 보고 체계 중간에 민치호가 낄 자리는 없다.
하지만 검찰 쪽에 민치호의 친구가 있고 민치호 역시 따로 정보망이 있다.
그래서 뭔가 들은 게 없나 했는데 오늘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아직 민치호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입니까?”
이선균의 질문에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느니 영업정지를 받았다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설명할 동안 내내 묵묵히 듣고만 있던 민치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개새끼들이…….”
그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신 팀장이 고민할 만하네요. 해결책이 필요하겠군요.”
이선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민치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신재현.”
“예, 청장님.”
“해결책을 원해서 여기 온 거야? 그런 거라면 전화로 보고해도 될 텐데. 공격받아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걸로 이렇게까지 고민할 성격은 아닌 것 같거든. 아니면 그건가? 남이 공격받으니까 정상적인 판단이 안 돼서 그러는 건가?”
민치호는 과연 날카로웠다.
“예. 맞습니다. 저 나름의 해결책도 세워 봤어요. 그런데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민치호에게 보고를 한다고 생각하자 두근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내가 애매하게 무작정 두려워하기만 하던 것이 뚜렷한 형태가 되었다.
나는 그 걱정을 쏟아냈다.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닐까? 과연 나는 이걸 진짜 행동에 옮겨도 되는 걸까? 나는 지금 정상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네가 생각한 해결책이 어떤 건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처음 저희 반장한테서 불이익 받은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했어요. 그때가 오늘 오전, 조사단 서울본부에서 여러 팀장님들을 모시고 회의할 때입니다. 다들 각자 부서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하려는데 그 팀장님들 얼굴을 보자마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어? 지금 나는 국세청만 가진 게 아닌데?”
미세하게 손끝이 떨려 왔다.
“저는 오늘만 해도 검찰과 경찰 쪽 조사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왔습니다. 조사단은 여러 기관의 집합체잖아요. 그렇다면 저는 이걸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다는 소리잖아요.”
날 부단장에 앉힌 것이 힘을 쥐여주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편적으로 생각했다.
그저 지위가 높아지고 감투를 쓰고, 그렇게 내 말에 힘이 실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불이익 받은 예를 자세히 듣고 나서 깨달았다.
그들이 한 짓을 나 역시 똑같이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업에 압박을 주고 싶다고 치자.
국세청의 6급 직원인 나는 세무조사를 나갈 뿐이다.
그러나 조사단의 부단장인 나는?
검찰, 금융감독원, 관세청 등등 그 회사의 사업 종류에 따라 기관을 보내면 된다.
국회의원이 지금 하고 있는 저 더러운 짓거리를, 그토록 싫어하는 저 짓거리를 내가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지금 조사단원을 건드는 이유는 쉽게 말해서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에요. 국회의원 쪽에서 압박을 주라는 명령이 내려오니까 거절하지 못한 거죠. 왜냐? 국회의원이 더 무서우니까. 차라리 조사단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게 더 쉬우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건드리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실제로 경찰에서는 조폭이나 범죄자가 경찰 일원을 건드릴 경우 온 조직이 나서서 잡아넣는다고 하더군요. 아예 건드릴 생각을 못하게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점점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겨나겠죠. 게다가 선례가 남아 버리면 다음에 누군가가 좋은 의도로 권력자를 조사하려고 덤빌 때 똑같은 방법으로 굴복시키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조사단은 절대 굽히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말문이 트이자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만들고 싶은 구도, 그리고 걱정하는 것들.
우리 팀원에게도, 심지어 황민우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민치호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이 둘은 나의 상사이다.
한마디로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나와 똑같은 고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민치호가 지금껏 나를 보호하고 판을 짜준 이상, 그는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힘이 강한 청장이니까.
“그러니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손에 쥔 것을 휘둘러도 괜찮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힘 좀 손에 넣었다고 과하게 나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러라고 쥐여준 게 아닌데 벌써부터 계략을 쓸 생각이나 한다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전에 서울에서 세종시로 운전하는 차 안에서도, 오후에 일을 하면서도, 공무원 통근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도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민치호를 찾아온 것은 오늘 반나절 동안 내가 고민한 결과인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하며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흐음…….”
민치호의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흘렀다.
내가 잘못한 게 맞구나, 하는 생각에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이선균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민치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재현. 질문이 틀렸군. 너는 휘둘러도 되는지 궁금한 게 아니야. 그렇게 휘두른 끝에 저들과 똑같은 놈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 내 말이 틀린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민치호는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파에 손을 짚고 고심하더니 다시 흐음, 하고 신음했다.
“이걸 칭찬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예?”
이 상황에서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되묻자 민치호는 피식 웃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옷부터 갈아입지. 젖은 옷으로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그 전에 밥은 먹었나?”
퇴근하자마자 버스를 탔는데 밥 먹을 시간이 있었을 리가.
내가 머뭇거리자 이선균이 일어섰다.
“청장님, 주방 좀 빌리겠습니다.”
“그래, 이 과장이 뭐라도 좀 해 줘.”
내가 기겁하며 말렸다.
“예? 아닙니다. 잠깐 앞에 나가서 사 먹고 오면 됩니다. 말씀 끝나고 바로 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저녁에 신세 좀 지겠다며. 자고 간다는 거 아니었어? 이 과장이 나랑 다니면서 시달리느라 사람이 먹을 만한 건 만들 수 있어.”
“아닙니다. 어떻게 과장님께…….”
“밥 먹을 정신도 없어서 이 시간까지 공복인 사람한테 밥도 안 주고 내보내면 욕먹어. 갈아입을 옷은 있나? 없으면 어디 보자, 내 아들놈 옷이 맞으려나…….”
나는 얼른 손에 든 가방을 가리켜 보였다.
“옷은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 서울에서 회의하기로 해서요. 서울 와서 잘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잘됐네. 뜨끈한 물에 좀 담그고 나와. 그다음에 얘기하자고.”
이선균은 부리나케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얘기가 이렇게 흘러간다고?
진지한 기분이었던 나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민치호의 재촉에 떠밀려 엉겁결에 대답했다.
“네에…….”
그렇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민치호 집 욕실에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