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이제 어쩝니까 (2)
곳곳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가만히 놔두면 들쑤실 것 같다니. 그래서 일부러 유도했다는 거예요?”
의심과 힐난의 눈초리가 정상훈에게 향했다.
이 상황은 미연에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천재지변이라면 그나마 억울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을, 그것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일을 간과한 결과가 이러니 속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던가.
그나마 처음 신재현이 제주도에서 올라왔을 때, 한울의 세무조사에 껴들었을 때.
그때는 국민들의 관심도 적던 시절이었다.
신재현이 복귀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상당수였고 여론도 조용했다.
차라리 그때 손을 썼더라면.
의원 몇 명이 쌍욕 먹고 총선에서 물러나야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다.
지금은 신재현이 제주도에 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오히려 관심이 더 커졌다.
신재현이 누구를 어떻게 털어줄지, 두근거린다는 댓글이 뉴스마다 수두룩했다.
그렇다면 왜 그때 막지 못했는가?
첫째는 당연히 총대를 매기 싫어하는 의원들의 보신주의가 문제다.
당시 신재현을 건드리면 반향이 나왔을 것이다.
가뜩이나 총선 전이니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었겠지.
조용히 총선 치르고 다음에 처리하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잘못 건드려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간 총선 때 낙선하기 십상이다.
둘째는 정상훈 때문이다.
의원회관 지하에서 있었던 그 조그만 회의 결과는 양 당의 중진 의원들 귀에 들어갔다.
그때 느낀 바는 그랬다.
정상훈이 신재현을 비호하고 있구나.
그것까지는 봐줄 만하다.
전직 국세청장이 신당을 창당하고 유력 후보가 될 정도로 지지율이 올라간 것은 전직 국세청장이라는 이름값이 컸다.
국세청에 신재현이 있기 때문이다.
신재현이라는 인재가 있으니 그를 키워낸 국세청도 청렴하고 일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이미지 덕분이다.
그러니 비호하는 거야 이해하지만 정상훈은 의원들을 속였다.
“유도는 아니었죠.”
정상훈은 뻔뻔하게 나왔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정치인 되더니 뻔뻔함부터 배웠나, 의원들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래서 제가 그때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나요? 제 의견을 물으시기에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걸 듣고 판단을 내리신 것은 그 자리에 계신 의원님들이죠. 제가 어떻게 의원님들께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 의견에 의원님들이 좌우될 분이 아니잖습니까.”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들 속에 구렁이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작자들이다.
그들은 정상훈이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정상훈에게 유도한 거라고 따지면 의원들은 그것 하나 간파하지 못한 멍청이가 되고, 그렇다고 정상훈의 말을 인정하자니 그의 의도에 놀아난 셈이 된다.
어떻게 말하든 정상훈에게 당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정상훈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그 자리에 계신 의원님들한테서 나중에 따로 얘기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결국 여러분들께서도 그 생각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뜻인데, 그때는 신재현을 가만 놔두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제 탓으로 돌리십니까? 신재현을 건드리지 말자고 했던 건 다른 의원님들이십니다.”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상훈의 말투는 날것 그대로였다.
직설적이었고 부드럽게 꾸미지 않았다.
정치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려 말하는 법을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의원들에 대한 타격은 몇 배로 들어왔다.
정상훈의 말뜻은 결국 이랬다.
-결국 너희들이 판단 실수한 거잖아. 내 탓 할 것 없어.
어떻게 보면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의원들은 수치감에 이를 갈았고 몇 명은 날카로운 눈으로 정상훈을 바라보았다.
‘정치 처음 하는 놈 같지가 않은데.’
‘뭐야. 왜 저렇게 잘해?’
‘생각보다 고단수네. 국세청 이름값으로 지지율 먹은 깡통 아니었나?’
생각 좀 있는 사람들은 수치감보다 경계심을 먼저 느꼈다.
지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상대 나이가 얼마든 간에 일단 각이 보인다 싶으면 물어뜯고 보는 것이 정치인이다.
그런데 지금 정상훈에게 한마디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결국 답이 나오지 않는다 여긴 5선의 의원이 지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동문과 차주혁 모두 잡아먹을 듯 매서운 눈으로 정상훈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났다.
5선 의원 입장에서는 저들의 싸움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지금은 목 앞에 칼이 들어왔으니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지금 매우 다급했다.
“제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신재현을 치는 게 낫다고 봅니다.”
때문에 그의 해결책은 조급하고 직선적이었다.
다른 의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조사단이 출범했습니다. 국민들의 반향이 클 겁니다.”
“그거야 프레임을 씌우면 될 일 아닙니까. 아까 하 의원과 차 의원님께서 하신 말씀 있잖습니까. 정부가 국세청과 짜고 차기 대선을 위한 판 만들기에 나섰다. 이런 기사면 바로 이미지 박살 날 것 같은데.”
거기에 신재현을 엮으면 끝이다.
아무리 깨끗한 이미지라도 정치와 엮이는 순간 국민들은 실망하고 떠나게 된다.
정치가 진창으로 불리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의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이미 청렴하고 깔끔한 이미지가 박힌 사람입니다. 그것만으로는 흔들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신재현이 국회하고 부딪힌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자기 손으로 장관까지 모가지를 날려 버린 위인입니다, 그 작자가. 대통령이 아주 작정하고 나온 거예요. 신재현이 있는 이상 조사단에 먹물 튀기기는 힘들 겁니다.”
여기에는 자기 보신을 위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일전에 신재현이 국세청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은 이유와 같다.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 끝이 좋을 리가 없잖은가.
다른 의원들 살리자고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아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기자들에게 소스를 뿌려달라고 하면…….”
“기자들도 지금 몸 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목숨 아까워하는 게 그들입니다. 가뜩이나 제주도에서 가짜뉴스 뿌린 놈들 세무조사 받아서 박살 났잖습니까. 그 이후로는 섣불리 확인되지 않은 소스는 안 쓰려고 해요.”
의원들이 혀를 찼다.
“에잉. 그러게 이런 일이 생기 전에 잘라냈어야 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의원회관에 침묵이 흘렀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나간 일을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후회가 들었다.
-그때 조질걸.
-서울청 왔을 때 조질걸.
-삼성세무서 시절 류석호가 찍혀나갔을 때 조질걸…….
불편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하동문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신재현. 지금 상대할 방법이 있나?
아주 오랜만에 보내보는 상대였다.
자신이 믿었던, 그리고 실망해서 내쳤던 오른팔 유진환이었다.
신재현에게 연신 물먹어서 실망한 건 사실이었지만 여태껏 그만한 인재는 보지 못했다.
시간도 꽤 지났겠다, 이런 난감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오른팔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화도 식었다.
지금 와서는 유진환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신재현이 잘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다.
이 사태를 잘 헤쳐나가려면 오른팔이 필요했다.
-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이 정도라면 미리 상황을 파악하고 언제든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동문은 문자를 읽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 웃음이 나오시나 봅니다. 하 의원님, 어디 좋은 생각 있으시면 말씀을 해보시죠. 다 같이 살자고 모인 자리 아닙니까?”
말 그대로 당을 초월한 회의다.
희끗한 머리의 5선 의원이 안달 난 듯 캐물었다.
“방법이 하나 있네요. 이것만으로는 균열 하나밖에 안 되겠지만 물고 늘어지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균열 벌리는 건 다들 전문 아닙니까.”
“대체 뭡니까? 속 시원히 말씀을 해 주세요.”
애타게 물었지만 하동문은 보란 듯이 차주혁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까 차 의원님께서 안부를 물으신 우리 정책실장이 아주 좋은 의견을 보내왔어요.”
차주혁에게 한 방 먹은 것이 그렇게 분했나보다.
하동문은 어떤 방법인지 쉽사리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차주혁이 애가 탔지만 자존심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가 우물거리자 하동문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원님들께서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전면적으로 조사한다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길들이기와 같다. 신재현의 결정이 우려스럽다. 폭주하는 국세청, 어디까지 가는가?’ 억지로 아까 말씀하신 프레임 갖다 씌울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과하다는 인상만 주세요. 그러면 그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총대를 매주신다는데 그거야 고맙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지금 여론은 다들 찬성 분위기인데 그걸 반전시킬 방법이 있다고요?”
“국회의원 조사라는 건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초유의 사태입니다. 그걸 가능케 하는 건 신재현이지요. 결국 그놈만 떨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떨구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흑역사를 끄집어내 이미지를 먹칠하던지 절차에 트집을 잡던지.
그러나 의원들은 동감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 신재현만 없어지면 나머지 놈들은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건 쉽죠. 근데 그게 어려운 거잖습니까.”
신재현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한때 대기업 기획실과 국회의원 보좌관, 그리고 기자들까지 그의 뒤를 파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올 것은 다 나왔고, 결국 신재현에게 타격이 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소리를 듣게 했던 형, 신우현마저 신재현 손에 재판으로 넘겨졌으니.
이제 완전히 약점이 없다고 봐도 된다.
“제가 졌습니다! 그냥 시원하게 말씀하시죠!”
참지 못한 차주혁이 소리치자 하동문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어느 한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전직 국세청장 정상훈이 편안히 앉아 구경하고 있었다.
그제야 차주혁은 아차 했다.
정상훈이 신재현을 돕는다는 건 정황상 의심이 간다.
그 밖에도 이 안에 대화를 흘릴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놈들은 뭔가 하나씩 찔리는 놈들이 대부분이고, 그런 놈들은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놈들이니까.
예를 들어 신재현에게 정보를 가져다주고 자기는 봐 달라고 거래하는 식 말이다.
“두고 보시면 알 겁니다.”
하동문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까맣게 변하기 직전 액정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진환 : 그의 이미지는 손대지 못하더라도 조사단 부단장에서 끌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그의 승진 과정을 문제 삼으면 됩니다.
***
요즘 TV든 인터넷이든 뉴스는 하나같이 조사단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공중파 저녁 뉴스에서는 패널들을 데려다 놓고 과연 정말 국회의원들을 칠 것인가 하는 주제로 격론을 벌였고 인터넷 기사에서는 정치, 사회, 경제란 모두 조사단 관련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신재현과 관련 없는 기사가 나오는 탭은 딱 하나 뿐이었다.
연예란.
조사단이 발족한 날로부터 며칠간은 조사단의 목표와 성과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루었지만 발족 사흘째 되던 날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때 이른 승진, 특혜인가?
-국민 조사관 신재현의 유일한 오점, 낙하산 승진이 될 것인가
-[칼럼] 공무원은 3년 만에 6급이 될 수 있는가.
-이번엔 국세청의 신재현 사랑이 과했다. 도를 넘은 인사.
신재현이 낙하산 소리를 들을 위치는 아니었지만 기자들은 마치 신재현이 부당하게 승진한 것처럼 기사를 썼다.
가짜뉴스를 쓰기엔 부담스러우나 이번 건은 그럴듯하다, 조회수에 눈먼 몇 기자들의 계산이 깔린 기사였다.
의혹이 나오면 당연히 해명을 요구하게 되는 법이다.
여론 또한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가 점점 긴가민가한 반응들이 많아졌다.
-속 시원히 해명해주면 좋겠다.
-신재현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승진이 좀 빠르긴 해. 내 친구도 공무원인데 7급에서 6급까지 11년은 일해야 한다더라.
-공무원도 일 잘하면 승진시켜주는 거 있지 않음?
-진짜 이번에 해명 잘 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게 원래 나락 가는 거 한순간임. 지금까지 잘 쌓아오던 이미지 이거 한방으로 날아가는 수가 있음.
-믿습니다 형!!!!!! 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분위기가 슬금슬금 과열되던 때, 국세청에서는 아무 말 없이 딱 하나의 영상을 내놓았다.
[FULL] 신재현 6급 특별승진 면접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