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조사단 국세청 지부 (1)
박원형은 두근거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지금 본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무공무원이라면 다들 꿈에 그리던 국세청 본청 입성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들뜬 이유는 단순히 본청에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원형에게 있어 공무원이 된 이후는 절망의 연속이었다.
분명히 공시생 시절에는 꿈이 있었는데, 막상 공무원이 되고 나서는 현실을 느끼고 말았다.
사실 이것은 어느 직업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건에 진심으로 대해야지, 친절해야지, 그리고 굽히지 말아야지.
꿈은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꿈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웬만하면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포기했을 것이지만 박원형은 손에서 꿈을 놓는 시간이 조금 늦었다.
그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저 조금 더 노력한 잘못.
꺾이지 않으려 애쓴 잘못 말이다.
여당의 큰 어른 취급을 받는 대선주자의 아들에게 호기롭게 과세통지서를 보냈을 때.
-네가 뭐 신재현인 줄 알아? 어디서 나에게 세금을 내라 마라야?
-세상이 어느 땐데 큰 소립니까? 선생님, 그냥 깔끔하게 내고 끝내세요.
-응, 네 인생이나 끝내.
그렇게 박원형은 꺾이지 않는 대가로 지방의 세무서로 떨려나고 말았다.
이미 매운맛을 봤는데도 박원형은 굽히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세금 10억이 4억으로 줄어듭니까?
-……그러니까 박원형 조사관님도 알아서 잘 처신하세요. 올해 인사고과도 말아먹으면 다음엔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
박원형이 꺾일 뻔한 순간이 한 번 더 있었다.
지방의 세무서에서 팀장에게 저런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위기였다.
팀장에게 저런 말을 들은 비참함과 원통함보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느껴졌다.
저런 놈들이 멀쩡하게 살아 숨 쉬며 공무원 일을 해 먹고 있는데도 손 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이 굉장히 버티기 힘들었다.
뭘 잘 해보겠다는 꿈이 깨짐과 동시에 자신이 속한 조직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박원형에게 있어 신재현과의 만남은 단순한 기회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자 희망이었다.
조직에 남아 있을 계기였으며 그가 완전히 신재현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물론 신재현이야 파벌을 만들 생각 따윈 없었지만 박원형에게는 그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믿고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하나 더 탄생한 것이다.
신재현이 모르는 곳에서.
다만 박원형은 솔직히 신재현이 자신을 잊어버렸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근무지에서 스쳐 지나간 인연일 뿐이다.
그가 명함과 연락처를 주긴 했지만 그걸 제대로 써본 적도 없었다.
지역 유지와 유착하던 비리 공무원인 팀장을 쳐내고 그 지역의 탈세를 잡아내면서도 그랬다.
솔직히 명함에 쓰여 있는 번호로 전화해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하다못해 신재현에게조차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은 것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다.
전화하면 일이 쉽게 풀리겠지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지역 유지의 탈세를 탈탈 털면서도 그를 대놓고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놓고 신재현이 명함을 주고 갔는데 지역 세무서에서 누가 그를 막겠는가.
덕분에 나름 지역신문에도 자그맣게 기사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대로 공무원 잘려도 상관없다 싶을 정도로 원 없이 하고 싶었던 것을 했다.
공무원이 된 후 처음으로 시원하게 십억 단위 고지서도 내질러 보았다.
때문에 신재현이 제주도로 좌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쯤 포기했다.
주변에서 들리는 대화들도 거의 그랬다.
-역시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
-뒤에 뭐 대단한 거라도 업은 것처럼 날뛰더니 꼴좋네. 그래 봤자 박원형은 신재현처럼 못 해.
-신재현도 제주도 갔는데 박원형 이제 끈 떨어진 연 아니야? 이제 평생 승진도 못하고 지방에서만 돌겠네.
-혼자 탈세범 잡는다고 유난 떨고 잘난 척 다 하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들의 목소리에 시기와 질투가 서린 것은 박원형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신재현이 누구의 사람인지 아는 이상, 박원형도 좋은 줄을 잡았다고 부러워하는 눈길이 쏟아졌으니까.
다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에휴, 열정도 있고 일도 잘하는데 안타깝네요. 조금만 참지. 사람들이 괜히 성질 죽이고 사는 줄 아나?
-진짜 열심히 하고 좋은 사람인데 앞길 막히는 건 너무 아깝네요. 왜 꼭 착한 사람들은 손해 보고 사는 걸까…….
진심 어린 위로 몇 마디가 전해졌지만 박원형은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미 진작 잘릴 각오를 했다.
지금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신재현 덕분이다.
그러니 자신도 언제 잘리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가보자.
그렇게 묵묵히 일하던 박원형에게 정기발령 소식이 떴다.
그의 이름 석 자 옆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발령지가 쓰여 있었다.
-국세청 본청.
처음엔 착오라고 생각했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박원형을 보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 조사관님 지금 우시는 거예요?”
박원형은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 자신이 놀랐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자 눈물이 그치기는커녕 왈칵 솟아 나왔다.
온갖 회한이 휘몰아쳤다.
공시생 시절 품었던 마음, 서울의 세무서에서 사람 하나 잘못 건드렸다는 이유로 지방으로 갔을 때의 그 참담함, 지방의 세무서에서 비위 행위를 목격했을 때의 절망감, 결국 신재현이 와서 상황을 해결했을 때의 그 짜릿함.
주마등처럼 그 기억과 감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잊지 않았구나. 내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구나.
그런 고마움도 들었고.
-혹시 나도 그 전설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걸까.
기대감으로 벅차올랐으며.
-혹시 탈세범들 시원하게 때려잡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지역 유지긴 하지만 정의를 실현했다는, 세무공무원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다해냈다는 짜릿함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보는 주변의 눈빛은 조금 달라졌다.
-부럽다. 나도 신재현 줄 잡고 싶네.
-진짜 줄 잘 잡았다. 이제 박원형 탄탄대로 아니야?
-탈세범 친다, 친다 아주 노래를 부르고 다니더니 결국 소원 이루네.
-2급지서에서 지방청도 안 거치고 바로 본청으로 간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이게 권력의 힘인가?
-거기 간다고 끝이 아닌데. 저놈 나대다가 또 좌천당해서 여기로 돌아오는 거 아닌가 몰라.
말 그대로 ‘조금’ 달라졌다.
그 밑바탕에 시기와 질투가 깔려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평소라면 영양가 없는 이야기에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박원형은 이제 참고 싶지 않았다.
“줄이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신재현 줄 잡을 기회가 저만 있었는 줄 아십니까? 신재현이 직접 여기 온 적도 있었잖아요. 그날 직접 말씀하시지 왜 안 하셨습니까? 저한테 참으라고, 숙일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던 분들이 이제 와서 큰소리입니까? 예, 말씀하신 대로 국세청 가서 원 없이 탈세범 잡아보렵니다!”
내내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박원형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앞에서 뒤에서 그를 비웃던 사람들은 정작 아무도 그에게 반박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저런 사람들이 주류가 되지 않도록 안에서부터 바꿔나가야 해. 공무원이라고 다 저런 철밥통은 아니니까.’
박원형은 다짐하며 세종시로 올라왔다.
그가 느끼기에도 지금 이것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신재현은 자신을 잊지 않고 불러주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멋지게 맡은 일을 해내겠다는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신재현도 같은 국세청 내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함께 일하게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첫 출근에서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힘차게 인사한 것은 그런 열정의 발로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끄러움이 밀려왔지만 다행히 자기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먼저 와서 입구 쪽에 앉아 있던 몇 공무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주 인사를 해왔다.
박원형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국치고는 작고 과치고는 크다.
대충 책상은 서른 개 정도.
그리고 여유 공간이 넓었다.
테이블이나 화이트보드가 새로 하나 들어와도 될 법 했다.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다들 어찌 된 상황인지 잘 모르는 눈빛이었다.
‘기다리면 설명해주겠지.’
첫날이라 아직 업무 할당도 없는 상태라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박원형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시계가 9시를 가리키자 안쪽의 창가 자리에서 한 여성이 일어났다.
‘팀장인가?’
사실 박원형은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여기가 정확히 어느 국 어느 과 소속인지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팻말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신설된 과인가?
재작년 국세청장의 의지로 세무서에 체납징세과가 신설된 적이 있다.
국세청장은 작년 가을에 바뀌었으니 올해 새로운 시도를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긴 생머리를 한 여성은 앞으로 나가더니 프로젝터를 조작했다.
그리고 무언가 영상을 띄웠다.
재생을 누르기 직전 여성은 사무실 안의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오신 것 같으니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왔다고?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가서 꽂혔다.
분명히 가장 안쪽에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저기는 누가 봐도 상석이다.
비워 두었다고 보기에는 이상했다.
“원래라면 팀장님이 오셔서 브리핑하셔야 하는데 팀장님은 지금 서울에 계십니다. 때문에 1반 반장인 제가 설명을 맡게 되었습니다.”
서울이라면 지금 출발해도 2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오전 업무는 종 쳤다고 봐도 된다.
첫날부터 조금 이상했다.
“따라서 그 시간에 우리가 놀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정확한 지시는 팀장님이 도착하셔서 내리겠지만 그 전에 우리 사무실이 뭐 하는 곳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영상 보시죠.”
반장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재생 버튼을 눌렀다.
팀 설명에 영상 프레젠테이션이라.
박원형은 생각할수록 이 팀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영상에서 청와대 기자회견이 뜨는 게 아닌가.
분명히 어제저녁만 해도 기자회견이 있다는 말조차 못 들었다.
그렇다면 아침 일찍 기습적으로 연 것이라는 뜻이다.
그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부동산, 해외 자금 도피, 지하경제 등의 광범위한 조세포탈 조사를 위한 특별조사단이 발족할 예정입니다.
사무실 곳곳에서 경악으로 입을 떡 벌리는 모습이 보였다.
박원형도 기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세청 공무원으로서 가슴이 뛸 정도로 엄청난 내용이었다.
그런데 영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다.
“어! 신재현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짓이었지만 그가 먼저 외친 것은 다행이었다.
자칫하면 박원형이 신재현의 이름을 부를 뻔했기 때문이다.
박원형은 아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영상에 빨려들어 갈 듯 눈을 부릅떴다.
청와대 기자회견에서는 분명히 조세범 처벌 조사단을 꾸린다고 했는데 그 부단장이 바로 신재현 아닌가!
“와…… 정신 나갔네.”
이 말도 동감이다.
누구도 무례하다 지적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더한 감탄사가 나올 것 같았으니까.
예를 들면 ‘미친’처럼 당황과 놀라움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감탄사 말이다.
이윽고 그 장면이 나왔다.
-네. 권력자들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신재현이 힘 있는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본 순간 박원형은 느꼈다.
아, 이 인간 뭔가를 저지르려는구나!
그리고 그 순간을 내가 도울 수 있겠구나!
영상이 끝나고 반장이 다시 앞에 섰다.
그러나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 짧은 영상의 여운에 취해 넋이 나가 있었다.
이래 봬도 국세청에서 고르고 골라 모은 사람들이다.
국회의원을 친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이들의 가슴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왔다.
반장은 차갑고 냉철한 표정으로 박수를 짝 쳤다.
“정신 차리세요! 다들 어떤 심정일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상태로 일할 겁니까? 여기는 바로 저 영상에서 나온 조세범 처벌 특별조사단의 국세청 지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와 있는지는 여러분이 더 잘 느끼실 텐데요.”
반장의 일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직원들이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불쾌함은 서려 있지 않았다.
분위기가 차게 가라앉자 반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따라서 제가 방금 문자로 받은 지시사항을 전달 드리겠습니다.”
반장은 칼로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팀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현직 국회의원 신고 상황 리스트업 합니다.”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장은 힐끔 시계를 보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제 부단장은 조사본부의 첫 회의에 출석했을 것이고, 빨라도 점심시간은 되어야 국세청에 도착한다.
그 안에 어디까지 정리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우수한 직원들만 골라 모아놨다는 조사단에서 반장에 앉은 그녀다.
그 유명한 신재현에게 국세청의 힘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박원형이 겪었던 치졸한 질투심보다는 경쟁심에 가까웠다.
‘오면 놀라실 겁니다, 우리 팀장님.’
반장은 신재현의 반응을 기대하며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