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45화 (345/500)

345화. 서울청의 준비 (2)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오늘 계속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아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더했다.

“제가, 제가 부단장이라구요?”

나는 말 더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목소리가 떨려서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손끝이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조사단이 만들어진 것만 해도 벼르고 별러서 판 깐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청장급 인사들이 꽤 힘을 썼구나, 하는 게 피부로 와 닿았다.

그런데 거기서 내게 부단장 직책까지 준다고?

아까는 그래도 긴장감 끝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기대감이 찾아왔는데 이제는 살짝 두려움도 들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이제 사치다.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안다.

부담감이다.

“왜요? 못하겠습니까?”

이선균이 슬쩍 떠보듯 물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면서도 묻는 것이다.

얼른 마음의 정돈을 마치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선균이 맞다.

지금 와서 내가 떨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렇게 하나씩 차분히 설명해주고 있는 것만 해도 나에 대한 배려는 충분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화하지 못한다 해도 꾸역꾸역 집어삼키고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깨가 무겁다고 해도 말이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바라던 것 맞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같은 날 두 번째 충격이다 보니 회복이 조금 빨랐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바라마지않던 바로 그 순간 아닌가.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까지 걸어가며 최대한의 힘을 퍼부어주고 있다.

아마 이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저야 감사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총동원을 해도 됩니까? 어떤 일을 하든 3할의 힘은 남겨 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아, 신재현 씨 보기에도 그런가요?”

나는 걱정을 섞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의위원회까지라면 괜찮았다.

위원장인 청장과 구성원이 날아가는 선에서 끝나는 일이니까.

그런데 나까지 부단장으로 올린다는 건 조사단에 국세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걸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국세청이 주체구나, 하지 않을까?

“잘못되면 청장님으로 끝나지 않겠는데요.”

내 입장에서 국세청장을 걱정하는 건 건방진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선균은 내 바로 건너편 자리에 앉아 턱을 문질렀다.

“뭐, 저도 걱정입니다. 신재현 씨 말대로 지금 상황은 갖고 있는 모든 힘과 인맥을 쏟아부은 거나 다름없어서요. 3할은커녕 1할도 안 남은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 사활을 건 거나 다름없는데.

그러나 이선균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런데 우리 민치호 청장님의 성격 아시잖아요.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을 쥐여 주시는 분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을 느낄 정도로 과한 힘을 주고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 지켜보는 식의 방법을 많이 사용했었다.

내 입장에서는 정말 과하다 싶은 적도 몇 번 있었는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딱 감당할 만큼만이었다.

서울청에 나만의 TF팀을 만들어준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민치호는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청장님께서는 지금 힘을 아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력을 다해도 어렵다고 보시는 것 같아요.”

이것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지금 애매하게 힘을 남겨두느니 올인하는 걸 선택하신 거군요.”

“네. 그렇게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지금 못 하면 나중에도 못 해요. 한 번 실패하면 다 갈려 나갈 테니까.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내가 엄살을 부리자 이선균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것 치고는 여유로워 보이는데요. 아까는 긴장한 것 같더니 이제 좀 살만합니까?”

“예. 아까는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장난스레 웃자 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황민우 씨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어? 형!”

옆을 돌아본 나는 딱딱하게 굳은 황민우를 발견했다.

그는 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내가 그의 팔을 툭 치자, 물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잔뜩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 나누세요. 솔직히 지금 정신 나갈 것 같습니다…….”

응, 딱 봐도 알겠다.

지금 황민우는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동자를 어디에 둬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나를 봤다가 이선균을 봤다가, 지금은 천장 근처를 쳐다보는 것 같은데.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계속 눈동자가 흔들렸다.

“크흐흡, 오늘 황민우 씨 운전시키지 마세요. 큰일 나겠네.”

“네. 술 취한 것 같네요.”

이선균과 내가 황민우를 놀리며 한바탕 웃었는데도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건 아예 귀를 막은 거다.

더 이상 정신이 가출하기 전에 얼른 얘기 끝내고 가야겠다.

이선균도 나랑 똑같이 생각했는지 말이 빨라졌다.

“보고서는 1부 가져가세요. 지현석 검사 측에도 이미 복사해서 전달했습니다. 조사단 인원들 이력 사항도 조사해서 넣어뒀으니 미리 파악하면 좋을 겁니다. 아, 당연하지만 기밀입니다. 절대 외부에 흘러나가면 안 돼요. 보관 잘 해야 합니다.”

세무 공무원이야 항상 보안에 투철한 업무를 하고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기밀 냄새를 풀풀 풍기는 문서를 다루는 건 처음이다.

조심스럽게 들고 종이를 넘기자 가벼운 조직도가 있었다.

이선균의 말대로였다.

맨 위에 경제수석 임현승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바로 밑에 두 개의 사각형이 있었다.

그중 왼쪽에는 지현석 검사, 오른쪽에 내 이름이 적혀 있다.

그 밑으로는 기재부,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관세청, 국토부, 과기부, 식약처 등의 각 정부 기관이 적혀 있었다.

조사단에 참가하는 각 기관의 팀이다.

단 3명밖에 참가하지 않는 기관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각 부서에서 최대한 끌어모은 느낌이 났다.

그만큼 민치호가 오래 준비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뭐 할지는 부단장 둘이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니 단체 목적 같은 건 안 적었습니다. 대신 직원들 이력 사항은 철저하게 조사해서 채워 넣었어요. 각자 특기 위주로 적어놨죠.”

“이걸 과장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각 기관 쪽에서 참여할 직원들 신상명세서 받은 후에 최종 보고서 작성은 저하고 민치호 청장님이 하셨죠. 조사단 보고서 쓰는 걸 고대해서 그런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썼네요. 다른 보고서는 죽도록 쓰기 싫은데.”

허허롭게 웃는 이선균을 보고는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의 공무원 생활이 여기에 녹아 있는 듯했다.

꽤 두꺼운데도 흐트러지지 않게 각을 맞춰 철끈으로 묶어 놓은 것도 그렇고 문서 여백도 딱딱 맞는다.

뒤를 넘겨 보니 내 신상명세서도 있었다.

이름과 나이, 주소는 그렇다 치고 이력 사항도 어디서 몇 달 근무했는지 꽤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경력은 다 몇 달 단위네.

1년을 채운 게 삼성세무서 체납징세과밖에 없었다.

공무원 된 지 만으로 겨우 3년 조금 넘었는데 참 온갖 부서를 옮겨 다녔다 싶었다.

내가 봐도 참 화려하다.

거기에 화룡점정은 바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특이사항이었다.

-특이사항 : 겉으로 보기에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불 잘 가림. 덤벼도 되는지 아닌지 각을 볼 줄 알기 때문에 무작정 덤벼드는 일이 적음. 계획을 세울 줄 앎. 그렇게 안 보이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판을 보는 눈이 있음. 판을 짜는 경험은 부족하지만 윗선의 입장과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남을 이끌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됨.

나는 읽다 멈추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이라뇨. 과장님 저를 어떻게 보시고.”

“에이, 저는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만 세간에 퍼져 있는 이미지는 또라이잖습니까. 물불 안 가리고 일단 덤벼서 끈질기게 물어뜯는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팩트가 너무 아픈데.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어, 그건 그러네요.”

나는 순순히 수긍하고 계속 읽어나갔다.

-……다만 나이가 어리고 다른 단원들보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단원들을 휘어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초반의 시행착오가 예상됨.

이것도 사실이다.

촌철살인이 따로 없네.

이 보고서를 읽을 정도의 인물이면 조사단의 위험성을 알아야 하는 위치의 사람일 테니 될 수 있으면 정확하게 장점과 단점을 다 적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보고서가 나에게 주어진 이유를 깨달았다.

“조사단 발족은 언제입니까? 그 전에 다 읽어봐야겠네요.”

“여유는 많지 않을 겁니다. 그 안에 외울 정도로 달달 외우세요. 이유는 아는 것 같으니 따로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예.”

내가 단순히 국세청 대표일 뿐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부단장 자리까지 주어진 이상 내가 명령권자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뭘 시켜야 할지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지현석도 있지만 딱 둘인 부단장인데 그에게 부담을 다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검찰과 국세청, 두 개의 축을 세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도 한 사람의 몫은 해야 한다.

“한 가지 힌트를 줄까요?”

내가 심각하게 보고서를 읽고 있자 이선균이 슬쩍 운을 떼었다.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당장 보고서의 평가에도 ‘시행착오가 예상됨’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면 이선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데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그동안 느꼈던 것을 하나씩 읊었다.

“화를 참는 것, 칭찬 잘하는 것, 쓸데없는 일을 시키지 않는 것, 내가 먼저 솔선수범할 것. 이 정도일까요?”

이선균은 내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차 없이 말했다.

“다 틀렸습니다.”

“예……?”

“제일 중요한 건 이거예요. 잘 조지는 것.”

이건 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 얼떨떨한 기분으로 쳐다보았지만 이선균은 전혀 미동도 없었다.

“신재현 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라는 게 논리와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어린 상사가 능력도 좋으면 고까워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겁니다. 고르고 골라 인재만 모아 놓은 조사단도 100명 넘는 대규모인 이상 분명 잡음은 생기겠죠. 처음에야 다들 높은 뜻을 품고 모였으니 서로 잘해보자 할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압박이 들어오다 보면 예민해질 겁니다.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몇 번 있던 일입니다. 제가 더더욱 열심히 해야죠.”

“아뇨. 갈구고 조지세요.”

이선균은 단호했다.

“그동안은 웬만하면 다 팀원들이 존중해줬을 겁니다. 크게 부딪치려는 사람도 없었을 테고. 하지만 앞으로는 아예 상관없는 사람들과 모일 겁니다. 국세청의 직원이 아닌 공무원들은 신재현 씨에 대해 잘 모를 거예요.”

이선균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렇다면 조지라는 말은 진심이라는 소린데.

“칭찬과 솔선수범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히 옵니다. 그러니 조지세요. 무조건 소리 지르고 화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뭘 잘못했는지 집어서 해결책을 말해주세요. 마음에 안 들게 일을 해오면 참기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갈구라는 뜻입니다.”

아직도 갈구라는 말은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저거라면 나도 잘 할 수 있다.

“네.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급하게 일손이 더 필요하거나 원하는 자료가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면 됩니다. 새벽이어도 상관없어요. 무슨 뜻인지 알죠?”

“넵. 조사단의 활동을 최우선으로 지원해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일이 진행될 순서를 알려드리죠.”

이선균은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귀를 활짝 열었다.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이선균의 이야기를 외웠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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