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44화 (344/500)

344화. 서울청의 준비 (1)

위원회 사전 임시 소집이 끝났다.

민치호는 회의실 출구 바로 앞에 섰다.

그의 바로 뒤에는 이선균과 내가 삼각형을 이루며 섰다.

황민우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민치호는 나가는 위원들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위원들은 심각한 내용이었는데도 꽤 가벼운 표정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하면 뵙겠습니다.”

“위원회 일정 나오면 따로 연락 주세요.”

“나중에 뵙죠.”

이제학이나 가문대학교의 교수처럼 날 아는 사람들은 민치호의 인사를 받으면서 흘끔 내게 시선을 보냈다.

나와 좀 더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도 그들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들이 날 반겨줬듯이 나 또한 그들이 반가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중에 따로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그들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떠났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신 팀장은 나중에 봐요.”

“네.”

보통 이런 위원회는 본 팀과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상황은 조금 특별하다 보니 일로도 마주치는 일이 많지 않을까.

물론 시간 되는 대로 연락은 할 생각이다.

마지막 차례는 권현아였다.

“권 팀장, 많이 좀 도와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을 맡기는 부모 같은 말투였다.

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권현아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한 손을 흔들어 보인 후 회의실을 떠났다.

권현아와도 나눌 이야기가 많은데.

서울청을 떠나기 직전 권현아가 자기 일처럼 화내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떠나가는 권현아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든 위원이 떠나고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넷뿐이었다.

“청장님, 조사단 설명하실 거죠?”

이선균이 다음 순서를 물었다.

이제는 실무자인 내가 미리 전달받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민치호는 잠시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어.”

민치호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번호를 눌렀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현직 국세청장인 오낙현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치호가 여러 번 반복해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국세청장이 서울청장의 연락을 씹는다니, 예사롭지 않은 일인 것은 분명했다.

“이 인간, 또 삐졌나.”

민치호는 혀를 찼다.

미세하게 눈썹이 올라간 거로 봐서는 약간 초조한 것처럼 보였다.

“안 받으세요?”

이선균이 묻자 민치호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국세청장이랑 틀어지면 곤란해.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평소라면 몰라도 중요한 시점을 앞두고 있으니 사람 관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다녀오십시오. 중요한 건은 다 끝났으니 나머지 전달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맡기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기다리지 말고, 일 끝나면 복귀해.”

“네.”

이선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치호가 복도를 달렸다.

꽤 빠른 속도였다.

우리야 바쁘면 뛰기도 하고 그러다 상사에게 한소리 듣기도 하지만 청장쯤 되면 뛸만한 일이 별로 없다.

그러니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 우린 청장실로 갑시다.”

이선균은 민치호 대신 우리를 청장실로 이끌었다.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하는 이선균의 바로 옆에 따라붙으며 내가 물었다.

“지금 세종시로 가신 것 맞죠?”

“예.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 같네요.”

“국세청장님 말이군요.”

복도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서울청의 직원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작년까지 서울청에서 봤거나 다른 세무서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들은 우리를 보고는 어, 하고 짧게 소리쳤다.

우리는 아는 척해오는 직원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이선균이야 원래 웃는 낯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옆에 있다 보니 웃음이 옮았나 보다.

정확히는 이선균을 보고 따라 하려다 보니 절로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말을 걸어오는 직원은 작년 서울청 법인세과에 있던 사람이었다.

저쪽과는 도움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서로 안면을 익혀서 그런지 조금 더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직원도 먼저 인사를 건넨 거겠지.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나도 친숙했다.

서울청을 떠나기 전 인사하러 갔을 때 사탕도 쥐여주던 사람이다.

“신재현 팀장님 서울청 돌아오시는 겁니까? 당연히 오실 거라 생각은 했는데 진짜 빨리 오셨네!”

그의 관심사는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이선균에게는 인사만 건네더니 내게는 아예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완전히 돌아오신 거죠?”

내가 이선균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팀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발표하기 전까지는 내부에도 말하면 안 되는 기밀 사항이었으니까.

“네. 그렇게 됐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크아, 역시! 신 팀장님이 실무를 안 뛴다는 건 말도 안 되죠! 잘 오셨습니다. 서울청으로 오시나?”

“음, 아직은 미정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그, 징계 여파가 조금 있나 보네요.”

남자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 반응에서 다른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아직 정식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것이 윗분들의 압박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안타까워하는 눈빛만 봐도 그러했다.

“얼른 돌아오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이번에 조사 3국으로 갔거든요.”

“와, 좋은 데로 가셨네요.”

성실납세지원국의 법인세과에서 조사국으로 갔다면 충분히 승진이라고 할 만하지.

내가 감탄하고 있는데 남자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진심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어쩐지 단순한 덕담이나 안부 인사가 아닌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남자가 말끝을 흐리며 이선균의 눈치를 보았다.

상사 앞에서는 말하기 힘든 얘기인가 보다.

나는 이선균을 먼저 보내려 했다.

“과장님, 먼저 가서 계시면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거든요.”

그러나 남자가 우리를 말렸다.

한차례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요? 신 팀장님 가시고 난 후에 조금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요?”

나는 남자의 말에 오히려 이선균을 바라보았다.

뭔가 중요한 얘기였으면 이선균이 먼저 내게 말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전해 들은 것이 없었다.

혹시 내가 들으면 곤란한 일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기에는 지금 이선균의 표정이 평온했다.

남자의 말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큰 변화는 아닌데, 약간 얕보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신 팀장님 계실 때는 저희도 좀 수월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납세자분한테 ‘이거 탈세입니다’라고 하면 납세자분이 좀 화는 내시더라도 순순히 협조해주셨어요.”

간간이 좀 거칠게 거부하는 납세자가 있긴 하다.

쌍욕은 기본이고 돈 없다, 배 째라 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

나도 그런 사람 꽤 봤다.

그래도 요즘엔 조사 나가면 거의 순순히 내던데.

적어도 내 부모님 안부를 묻는 납세자는 없었으니까 그 정도면 ‘협조적’이라고 봐도 된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직원에게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나 보다.

“다른 청보다 특히 우리 서울청이 나가면 납세자가 날뛰다가도 얌전해진다니까요. 오죽하면 세무서에서 전화 와서 청에서 조사 건 좀 가져가면 안 되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세무서 직원들이 ‘저희 선에서 해결 안 되면 서울청에서 나올 겁니다’라고 하면 납세자들이 갑자기 조용해진다는 거예요.”

옆에서 황민우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힘입어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저희는 사실 그 효과를 잘 몰랐거든요. 왜냐면 소리 지를 사람이 덜 지르는 걸 저희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이분이 협조적이구나, 했죠. 근데 신 팀장님 나가고 나니까 딱 티가 나더라고요.”

남자가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기존에 조사 중이던 건들 있잖습니까. 자료도 순순히 주시고 부르면 재깍 달려오고 그랬던 사람들이 신 팀장님 나갔다는 소식 들리니까 바로 눈빛부터가 달라져서 없다, 모른다로 일관하는데 와…… 진짜 어떻게 나가자마자 이렇게 되는지 참.”

남자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조금 머쓱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내가 원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물론 나 한 사람만으로 국세청을 보는 눈이 확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탈세 좀 해볼까?’하고 마음먹었던 사람이 ‘저놈 잘 조지네’하고 탈세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얼른 돌아오세요. 서울청이든 국세청이든 일단 돌아오시면 당당하게 탈세하던 사람들이 좀 기어들어 갈 것 같거든요. 저희 욕먹는 거 좀 힘듭니다.”

마지막은 장난스럽게 마무리한 남자가 인사를 건네고 떠나가자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좌천되었다는 기사가 뜬 후로 탈세가 수면 위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걸 보면 내가 서울청에 있을 때 목표한 효과가 조금이라도 있긴 했나 보다.

생각이 많아져 우두커니 복도에 서 있는 내 어깨를 이선균이 가볍게 툭 쳤다.

“우리 고생하는 국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얼른 준비해서 돌아와야겠네요.”

“네.”

이선균의 부드러운 위로와 함께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청장실로 들어가자 겨우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속도를 좀 더 내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빠르게 조사단 규모와 조직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이선균은 익숙하게 청장실 이곳저곳을 뒤지더니 보고서를 가져왔다.

“국세청장님, 그리고 윗선에 올라간 보고서와 정확히 동일한 물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윗선이라면 국세청장보다 더 위다.

아마 청와대 얘기일 것이다.

“단장은 임현승 경제수석님께서 맡으실 거예요. 직접 조사단에 참여하진 않으시고 외부 행사용, 대외용입니다. 청와대의 수석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이끌고 있으면 함부로 무시 못 하거든요.”

물론 임현승의 커리어에도 큰 모험이 될 것이다.

잘못하면 여기서 거꾸러질 수도 있고.

그만큼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지금 쭉 진행되는 판을 보면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집중되고 있었다.

아예 작정하고 퍼부어주는 느낌이다.

“그러니 단장과는 만날 시간도 별로 없을 겁니다. 원래 수석 업무도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럼 실질적인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부단장이죠.”

“어느 분이 맡게 되시나요? 혹시 과장님이 가십니까?”

이선균이 짓궂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원래 웃는 낯이긴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진심이었다.

“아뇨. 저는 심의위원회 해야죠. 부단장은 신재현 씨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잘 아는 사람이요……?”

쉽게 가르쳐줄 생각은 없나보다.

내가 끙끙거리고 있자 이선균이 황민우에게도 물었다.

“황민우 조사관은 어때요?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습니까?”

황민우 역시 고개를 젓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국장급은 되는 분이 맡으셔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아는 분 중에 실질적으로 조사단을 책임지실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황민우 뒤에 나도 말을 덧붙였다.

“일단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능력도 되고, 인지도도 있는 사람이 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청장님하고 과장님께서 심의위원회를 맡으시는 걸 보니 국세청 쪽에서는 조사단에 더 깊게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 같구요.”

심의위원회만 해도 여의도의 돌을 맞기 딱 좋다.

이미 국세청에서 많은 힘을 퍼부었는데 여기서 더 참가한다면 국세청 혼자 여의도의 반발을 다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런 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되는 지위를 아무에게나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윗선에서 맡으신다면 송대희 서울서부지검장님이 가능성 있겠네요. 조금 밑으로 내려온다면 지현석 검사님 정도일까요?”

특사경의 수사 지휘는 검사가 한다.

법조문을 생각해본다면 부단장은 검찰이 맡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심의위원회라는 중요한 기관을 국세청 쪽에서 맡았으니 검찰이 뭔가를 하나 가져야 균형이 맞기도 하고.

“오, 맞췄습니다. 판을 보는 눈이 늘었네요.”

이선균의 때아닌 칭찬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선균의 웃음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반만 맞췄습니다. 부단장은 둘이거든요.”

“예? 그러면 검찰에서 두 명인가요? 아니면 다른 기관에 한자리 줍니까?”

경찰이나 관세청이라면 부단장 한자리 줄 법 하다.

그러나 이선균은 웃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단장이 대외용 얼굴이니 부단장은 실무자로만 채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단장은 여기…….”

이선균이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신재현 씨가 맡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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