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42화 (342/500)

342화. 국세청장의 한탄 (1)

국세청장실은 어두웠다.

불이 켜져 있고, 겨울 해가 창문을 넘어 안을 흰빛으로 물들이는데도 그랬다.

창을 꼭꼭 닫아뒀는데도 시린 겨울바람이 넓은 청장실 안에 맴도는 것 같았다.

-째깍째깍.

고요함 속에 시계 초침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만 울렸다.

책상 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국세청장 오낙현은 가만히 눈동자만 굴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3시.

그토록 들어오고 싶었던 국세청장실이 자신의 것이 되고 나서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빈 곳에서 골프 연습해도 될 것 같은 너른 청장실의 공간이 황량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 말이다.

“내가 미쳤나 보군.”

오낙현은 자조했다.

평생 몸담은 조직의 정점이다.

이런 우울감은 말도 안 된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환한 불빛마저 침침하고 시리게 보이는 것은 광량이나 그의 시력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그만큼 어둡다는 뜻이었다.

오낙현은 시선을 내려 책상 위를 보았다.

[특수 조세범죄 조사단 발족 보고서]

수많은 결재판 사이에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보고서가 있었다.

소속부터 단장, 설립 목적과 구성원, 활동 방향에 이르기까지 현재 시점의 조사단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한 최종 보고서였다.

작성자에는 민치호라는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혀왔다.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다.

신재현을 특사경으로 임명한다고 했다는 건 들었지만 조사단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대충 규모만 봐도 타 정부 기관이 참가하는 대형 프로젝트였으며 소속은 무려 청와대였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나는 얼굴마담이다.

국세청의 수장으로서, 아니 조직의 책임자로서 굴욕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며 자신에게는 사후 보고서만 도착했다.

물론 이해는 한다.

국세청장은 1년에서 2년 있다가 교체되는 자리고 이 프로젝트는 딱 봐도 장기다.

가장 높은 위치에서 ‘언젠가 조사단을 구성할 테니 준비해라’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명령 특성상 무조건적인 비밀 유지는 당연하고.

그래도 침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 조사단을 기획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은 지방청장이었으며 민치호는 국장이었다.

대체 어떤 식으로 높으신 분 눈에 들어 이런 걸 담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런 대형 건이라면 국세청장인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건 안 봐도 뻔한데 그동안 언질 한번 없던 것은 어째서인가?

“아니, 언질은 줬나.”

오낙현은 민치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판을 깔 거라느니, 앞으로 뭔가 있을 테니 준비하라느니.

뭔가 있어 보이는 얘기는 몇 번 했었다.

그 ‘뭔가’가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뿐이다.

오낙현은 폐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당장 언제 이 소식을 듣고 여의도에서 전화가 올까 두려워 청장실의 전화선까지 뽑아 두었다.

비서에게는 없다고 전하라는 말까지 해둔 상태다.

자신을 배제한 것도 기분이 나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자신이었다.

“씨발…… 나더러 얼마나 욕을 처먹으라고.”

민치호에 대한 분노보다 더 큰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생각을 좀먹었다.

오낙현이 차마 보고서를 열어보지 못하고 표지만 쓸어보고 있을 때 누군가 청장실 문을 두드렸다.

오낙현이 돌 맞은 개구리마냥 몸을 바짝 움츠렸다.

전화선을 뽑아뒀으니 용건이 있으면 비서가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낙현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 문밖에 성난 국회의원들이 서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렇게 대답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 2순위, 민치호였다.

“뭐야! 나 없다고 안 했어?”

오낙현은 어쩔 줄 몰라하며 민치호 뒤에 서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

민치호는 비서를 안심시킨 뒤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왜 허락도 없이 벌컥벌컥 들어와? 이제는 민 청장이 실세다 이건가? 내가 그렇게 우스워?”

오낙현은 말하고도 아차 했지만 말이 도저히 곱게 나가지 않았다.

대인배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윗사람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맞이해야 하는데.

오낙현은 그렇게 속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치호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청장님, 이러실 것 같아서 제가 직접 왔습니다.”

오낙현이 어쩌고 있을지는 눈에 뻔히 보였다.

그래서 민치호는 전화 연결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차를 몰았다.

“이럴 걸 알면서도 일을 이렇게 한 겁니까?”

오낙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민치호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저벅저벅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열어본 흔적조차 없는 보고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이미 부동산 투기 특별조사단이라는 예가 있습니다. 예전에 임무를 마치고 해체됐지만 관할이 다른 정부 기관끼리 힘을 합쳐 수사했다는 의의가 있는 조사단이었죠. 그것의 연장선상입니다.”

“압니다. 특별조사단이라는 게 뭔지는 나도 알아요.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습니까?”

“예, 압니다. 서운해서 그러시는 거죠.”

“서운? 서운이라는 말로 끝날만큼 이 사태가 가벼워 보여요? 민 청장은 내가 대체 얼마나 우습습니까?”

청장 간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꽤 싸구려였다.

그러나 둘 다 알면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은 속내를 감추고 돌려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감정을 뱉어내는 것이 나았으니까.

민치호는 여기서 국세청장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서 세종시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이유기도 했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청장님께서도 솔직히 말해주실 겁니까?”

“아예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 이겁니까?”

“청장님이 하문하시는 말에 뭐든 대답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프로젝트는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민치호는 보고서를 펼치며 손을 턱 얹었다.

손가락 사이로 조직도가 보였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청와대’라는 글자와 더불어 국가 기밀이라는 말에 오낙현은 움찔했다.

‘역시 이거에는 주춤하시네.’

얼마나 날고 기는 공무원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법과 대통령이라는 이름이다.

때문에 일부러 민치호가 기선제압을 위해 꺼낸 것이다.

조금 강경책이었지만 그만큼 지금 순간이 중요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이런 프로젝트가 새어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먹이자 오낙현의 붉어졌던 얼굴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그는 심호흡을 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좋아요, 그럼 묻겠습니다. 민 청장이 정말 나를 윗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숨기지 말고 다 대답해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이제는 밝혀도 되는 일이니까요.”

오낙현은 천천히 일어나 소파로 가서 앉았다.

민치호가 손에 보고서를 들고 테이블 위로 탁 내려놓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낙현이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명령을 받은 것이 언제냐는 뜻이다.

민치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5년쯤 됐습니다.”

“5년이요?”

오낙현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대통령 임기가 약 1년 정도 남은 시점이니 5년 전이라면 대통령이 되기도 전의 일이다.

“VIP도 직접 만나봤습니까?”

“예, 뭐…… 몇 번 만났죠.”

“몇 번씩이나? 독대도 했어요?”

“그럼요.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데 누굴 옆에 끼고 만날 수가 없잖습니까.”

“이야…… 나도 독대는 임명장 받을 때 딱 한 번 해봤는데. 그럼 민 청장한테만 그런 명령이 있었던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각 기관마다 있습니다. 국세청에서는 저고, 검찰 쪽에서는 검사장이 있죠. 경찰하고 관세청 쪽에도 있습니다.”

“스케일 크네.”

그러자 오낙현은 더욱 의문이 생겼다.

“당시부터 계획된 겁니까? 이 조사단이라는 거?”

민치호는 이번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먼저 기획을 하고 거기에 대통령을 꼬신 겁니다.”

“음?”

오낙현이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흥미가 동하는 얼굴을 했다.

그야 그동안 숨기고 있던 비밀 이야기에 더불어 비하인드 스토리도 풀어주는데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오낙현은 어느 샌가 민치호의 이야기에 푹 빠진 상태였다.

“정확히 어떤 형태로 하자는 계획은 없었고 목적은 딱 하나였어요. 개새끼들을 때려잡자. 그런 목표 하에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대표로 저희 둘이 국회의원이던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둘이서? 한 명은 민 청장일 거고 다른 하나는 누굽니까?”

“현재 서울서부지검장인 송대희입니다. 작년에 차장검사였는데 승진했어요.”

오낙현이 무릎을 탁 쳤다.

“허어! 그래서 단둘이 대선후보를 찾아갔다 이거군요.”

민치호는 잠시 혈기 넘쳤던 그때를 떠올렸다.

국세청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파벌을 만들고 점점 위로 올라왔지만 무력함은 마찬가지였다.

위에는 더 위가 있고 국세청에서 아무리 높아져도 모든 걸 엎어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키우고 모으자.

친구였던 송대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대선 후보를 찾아갔지만 정말 그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십 년도 넘게 학습된 무력감에 모든 걸 던져 버리고 싶어진 순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도박을 해본 것이다.

-제안받을 겁니까, 말 겁니까? 하기 싫으면 아예 이 자리에서 못 한다고 말해주세요. 괜히 기대감 품게 하지 말고.

퉁명스럽게 내뱉은 것도 반쯤은 포기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더 큰 힘을 찾는 것 말이다.

이번에도 안 된다면 민치호는 거꾸러졌을 것이다.

그것이 기적처럼 통해서 여기까지 왔다.

민치호의 무뚝뚝한 얼굴에 흐르는 아련한 감정을 읽은 오낙현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미친놈들. 그래서 민 청장 밑에서 키우는 놈들도 다 또라입니까?”

“이선균 과장은 점잖은데요. 하나가 좀 날뛰어서 그렇지.”

“그 하나의 존재감이 너무 크잖아요. 아주 작정한 티가 나는데 그걸 어디서 배웠나 했더니 민 청장부터 그랬구만. 지금까지는 얌전떠느라 힘들었겠습니다.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오낙현은 도로 입가를 씰룩였다.

생각해보니 민치호에 대한 배신감이 무럭무럭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불현듯 부정적 감정이 스쳤다.

한마디로, 오낙현은 삐진 상태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애가 된다더니, 대놓고 티를 내는 윗분의 표정에 민치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올 정도면 화는 어느 정도 풀렸다고 봐도 되니 다행이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청장님. 본색이라뇨.”

“솔직하게 말해보자면서요.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실세는 민 청장이구만. 당장 이 보고서만 해도 사후 통보 아닙니까.”

오낙현이 푸념하듯 말하긴 했지만 그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지금 국세청의 실세는 민치호다.

원래라도 차기 국세청장은 민치호로 예정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더욱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저 높은 곳에서 민치호의 국세청장이라는 직함에 도장을 찍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 청장님께는 숨기지 않겠습니다. 저는 국세청장이 될 준비를 해왔습니다.”

“역시 그렇구만.”

“하지만 그건 청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세무공무원이 국세청장을 꿈꾸는 게 뭐가 나쁩니까.”

씁쓸하게 웃던 오낙현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게 말하면…… 맞긴 한데.”

오낙현은 지금 민치호의 논리에 설득되고 있었다.

“사후 보고인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청장님께서도 양해해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으니까요. 심지어 신재현 팀장도 모르고 있던 일입니다.”

“아, 신재현도 몰라요?”

민치호의 왼팔인 신재현마저 모르고 있던 거라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납득이 간다.

“청장님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나중 일이 어떻든 간에 현재 국세청의 수장은 청장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흠…….”

오낙현의 불편했던 표정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는 팔걸이를 토도독 두드리더니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

“조사단의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는 게 우리 국세청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조사단을 좌우할 권한은 없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청와대 직속이고 여러 기관이 모였으니까요. 국세청과 아예 별개라고 보셔야 할 겁니다.”

국세청장이라는 빌미로 조사단에 손을 뻗칠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오낙현이 팔짱을 꼈다.

“명령은 못하더라도 뭘 할 건지 보고는 들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누구를 대상으로 한다던가. 내가 어디다 정보를 흘릴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요.”

“그럼요. 수사한 사항은 청장님께 재깍 보고드리는 것이 조세범처벌절차법의 내용 아닙니까.”

“VIP의 특별 지시사항이니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타겟은 어딥니까? 대기업? 공기업?”

오낙현의 질문에 민치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험악한 얼굴에 입꼬리만 올라가자 오낙현이 흠칫했다.

“여의도에 좀 오래 계신 분들을 건드려볼까 합니다.”

“뭐? 미쳤어?”

오낙현이 뒤로 넘어갈 듯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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