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대기 중 (1)
“하아…….”
강혜원은 시무룩했다.
벌써 정기발령 시즌이다.
곧 자리를 옮기고 책상을 바꾸고 모르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고 새로운 얼굴과 함께 새 업무를 시작하는 그런 시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강혜원은 그렇게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팀이 해산하고 몇 달.
짧게나마 일했던 정든 세무서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
물론 공무원이라는 게 그렇다.
1년, 또는 2년에 한 번씩 근무지를 이동하고, 또 그 안에서 과를 바꿔 이동하기도 했다.
그러니 몇 달 다녔던 곳에 정들었다고 지금 시무룩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인사이동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났는데 강혜원은 지금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공문 봤을 때는 좋아 죽는 줄 알았는데.’
강혜원은 인사이동 공문이 뜨던 순간을 떠올렸다.
두근거리며 로그인하고 열어본 문서에는 강혜원의 이름과 함께 국세청 본청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옆자리 동료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으며 부러워했고 강혜원은 날아갈 듯 기뻤다.
세무서로 날아올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것임을 믿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언젠가 신재현이 다시 팀을 불러줄 거라고.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왔구나 싶었다.
그것도 국세청 본청이라니!
엘리트 코스를 밟아야 갈 수 있는 과세기관의 중심부 아닌가.
그런데 막상 공문을 자세히 뜯어 보니 자세한 발령지가 쓰여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옆자리 직원은 서울지방국세청 산하 강동세무서 소득세과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쓰여 있었다.
강혜원의 경우엔 어느 부서 어느 과 소속인지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국세청’.
이게 끝이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경기지역 세무서에 흩어져 있던 장세훈, 안길진도 ‘국세청’이라는 석 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혹시 몰라서 황민우와 신재현도 찾아보았다.
그들도 구체적인 발령지는 쓰여 있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신재현이 단체 대화방에 이런 말을 올렸다.
-아직 출근지가 안 정해졌어요. 제가 알아보고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정해지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강혜원은 장세훈, 안길진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대기발령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소속은 국세청이지만 지금 당장 본청으로 출근한다 해도 책상이 없을 것이 뻔했다.
어느 부서인지도 모르는데 책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거 뉴스로만 봤던 그거 맞죠? 창고에 책상 갖다 놓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는 거.’
안길진이 눈에 띄게 우울해했다.
그 상황에서 장세훈과 강혜원마저 실망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팀장님을 믿어야죠. 막말로 우리 책상은 없더라도 소속은 국세청 아닌가요? 팀장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게 항상 준비하고 있자고요.’
그렇게 안길진을 달래고 헤어졌지만 셋 다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이 대기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각오했던 거잖아. 2급지 세무서로 좌천될 생각도 했잖아. 그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믿고 기다려야지.’
강혜원은 각오를 다졌다.
화장실 앞에 책상 주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도 그 수모를 견딜 자신이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신재현은 더한 압박을 받고 있을 테니까.
언제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어차피 월급 줄 거면 놀리지 말고 어디 민원실이라도 책상 주지. 세금 아깝게.’
공무원이라 월급 받는 것도 다 세금이다.
5명이나 되는 사람을 무한 대기발령 상태로 놀린다는 것은 말단 공무원인 강혜원이 보기에도 아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괴롭히고 싶으면 민원실이나 신고 도우미로 굴리는 게 최고인데 말이다.
‘하여튼 직원 길들이기는 어딜 가나 똑같아.’
강혜원은 투덜거리며 자신이 근무했던 세무서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미 모르는 얼굴이 자신의 책상에 출근해 앉아 있었다.
“엇, 혜원 씨네! 오랜만이에요!”
돌아보니 예전에 9급일 적에 고양 세무서의 같은 과에서 근무했던 직원이었다.
공무원은 이게 좋다.
근무지가 한정되어 있어서 돌다 보면 아는 얼굴 하나씩은 만나게 된다.
“우와,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진짜 오랜만이네!”
“혜원 씨, 이번에 여기서 근무해요?”
강혜원을 반갑게 맞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발령받았다면 이미 출근해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며칠 지나 사무실로 들르니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책상이야 하나 새로 가져오면 되는 일이라지만 조직도와 사무실 자리표에 강혜원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의 소속이 아니라는 뜻이다.
강혜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작년부터 몇 달간 여기서 일했었는데 제가 놓고 간 게 있어서요.”
강혜원은 자신의 자리였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직원이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으로 부드러운 웨이브의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강혜원이 다가가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입가를 가렸다.
“엇, 안녕하세요!”
숫기 없는 목소리였지만 인사만큼은 또박또박했다.
딱 봐도 신입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저번 주까지 이 자리를 썼는데 뭘 하나 놓고 갔어요. 정말 죄송해요. 잠깐만 찾아봐도 될까요?”
숫기 없는 여직원은 환한 표정을 짓더니 서랍을 열고 파일을 하나 꺼냈다.
인쇄된 A4용지와 이면지들이 가득 꽂혀 있는 갈색의 파일이었다.
군데군데 견출지가 붙어 있고 손때가 잔뜩 묻은 것으로 표지에는 ‘강혜원 공부용 파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따로 챙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강혜원은 활짝 웃으며 파일의 표지를 쓸었다.
어느 직업이든 다 그렇겠지만 공무원도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부서로 골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생활 하면서 여러 과를 돌고 돈다.
때문에 강혜원은 자신이 일하면서 특이한 케이스를 맞닥뜨리면 세법과 판례를 인쇄해서 공부한 후 따로 파일에 꽂아두었다.
그걸 놓고 간 것이다.
“뭔가 싶어서 열어봤거든요. 근데 안에 자료 정리된 게 있길래 중요한 거다 싶어서 따로 빼놨어요.”
신입 직원은 헤헤, 하고 웃었다.
칭찬을 바라는 너무도 순수한 눈망울이라서 강혜원은 저도 모르게 신입 직원을 껴안았다.
“끼아! 진짜 감사합니다! 신고서 작성 순서라든가 검토 순서 같은 것도 다 써놔서 지금도 가끔 헷갈리면 열어보거든요.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했는데, 은인이에요! 은인!”
강혜원이 조금 오버하며 말하자 신입 직원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자고로 신입을 어화둥둥 달래주는 것은 선배의 의무이다.
따라서 강혜원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비록 주위에서 이상한 얼굴로 보고 있다 해도 말이다!
“혜원 씨, 우리 막내 직원한테 눈독들이시면 안 돼요. 저희가 잘 키우고 있단 말이에요.”
강혜원과 안면 있던 직원이 뾰로통한 표정을 했다.
물론 진짜로 삐진 것은 아니고 삐진 척이다.
“두 분 용건 끝나셨으면 이제 이거 드려도 되죠? 신입 직원에게 국세청장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한테요?”
직원 하나가 입구에서 커다란 상자를 하나 가지고 와서 신입 직원의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그걸 본 강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신규 임용자 환영 박스가 왔어요? 빠르네.”
“그럼요. 얼른 줘야 직원들이 괜히 돈 낭비 안 하잖아요.”
신입 직원이 어리둥절했다.
“돈 낭비요?”
“네. 쓸 만한 거 꽤 많거든요. 얼른 열어봐요.”
졸지에 언박싱의 관객으로 참가하게 된 강혜원이 옆으로 물러섰다.
자신도 몇 년 전에 이런 박스를 받은 적이 있다.
매년 신입 직원에게 주는 환영 선물 같은 것이었다.
이럴 때면 애사심이 팍팍 솟는다.
“우와!”
그것은 신입 직원도 다르지 않았는지 박스를 열자마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강혜원은 슬쩍 고개를 들이밀고 구성을 살펴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풍성해진 것 같다.
‘하긴, 세월이 지났으니 당연한가.’
책상 위에 놓으면 딱 좋을 크기의 3단 서랍 안에는 스카치테이프, 포스트잇, 풀, 견출지, 자 등등의 사무용품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딱 필요한 것들이다.
거기에 연필꽂이와 색색의 펜, 형광펜까지 합치니 완벽한 사무용품 세트가 되었다.
각종 세무 스케줄이 적혀 있는 탁상 달력도 보였다.
“뭐야, 요즘엔 마우스랑 충전기도 주네?”
언박싱은 남의 것이라도 재밌는 법이다.
주위에 하나둘 모여든 직원들이 관심을 보였다.
“오오, 사원증 목걸이다.”
그러나 신입 직원의 관심사는 목걸이에 가 있는 듯했다.
당기면 주욱 늘어나는 공무원증 목걸이다.
그것이 또 신입스러워서 강혜원은 피식 웃었다.
이 직원은 오래 버텨서 나중에도 만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신입 직원이 책상 위를 정리하며 미니 서랍을 놔둘 자리를 찾는 걸 보며 떠나려는 순간,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짙은 푸른색의 책등에 굵은 글씨체로 ‘세무조사 실무’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리니 의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발행처는 교육원, 그리고 저자는 강혜원도 아주 잘 아는 인물이었다.
-저자 : 신재현, 황민우.
“어?”
강혜원은 도로 발걸음을 돌리고 책을 가리켰다.
“저거 잠깐 봐도 돼요?”
“아, 그럼요.”
신입 직원은 흔쾌히 두꺼운 실무서를 뽑아서 건네주었다.
강혜원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두 명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미친 사람들…… 거기 가서 책까지 썼어?”
강혜원의 혼잣말에 신입 직원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부터 여쭙고 싶었는데요, 여기 이 신재현 팀장님과 같은 팀 맞으시죠?”
이번엔 강혜원도 놀랐다.
같은 공무원들이라면 신재현 팀이야 유명하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신입 공무원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을 텐데.
신재현이라는 이름은 유명하지만 그의 팀원까지 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마디로 신입 직원은 신재현 팀에 꽤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 맞아요. 어떻게 저를 아세요?”
“우와아! 기사에서 몇 번 봤어요! 그리고 교육원에서 선생님도 가끔 말씀하셨고요.”
“네…… 네? 누가 제 말을 해요?”
“신재현 선생님이요! 저희 세무조사 실무 배웠거든요. 진짜 리얼했어요. 막 빠루로 문 따고 들어간 적도 있다면서요. 듣는데 진짜 두근두근했어요.”
강혜원은 잠시 머리가 멈추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재현은 제주도 교육원으로 갔고 거기서 강의도 했다고 들었다.
그러면 올해 7급 신입들은 다 신재현의 수업을 들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러나 그동안은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신재현이 강의를 한다니.
상상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증거가 지금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 그러네요. 팀장님이 강의했으면 그걸 들은 사람도 있겠죠. 왜 생각을 못했을까…….”
강혜원이 딱딱하게 굳은 목을 부자연스럽게 덜걱거리며 움직였다.
신입 직원은 신나서 설명했다.
“강혜원 조사관님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엑셀을 무지 잘하시고 정리가 빠르시다던데요.”
“……그거 말고 또 뭐라고 했어요?”
강혜원은 불안감과 호기심이 섞여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신입 직원이 해맑게 말했다.
“그리고 무지 꼼꼼하신 건 좋은데 견출지 색깔에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어서 색 헷갈리면 싫어하신다고요.”
“아~ 그래요?”
강혜원이 웃는 낯으로 맞장구 친 순간 신입 직원은 어쩐지 냉기를 느꼈다.
순간 신입 직원의 말문이 닫혔다.
강혜원은 팔짱을 끼고는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서 우득 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이 인간들이 후배들한테 별 얘길 다 했네, 그쵸? 하여튼 눈곱만큼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남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타지에서 텃새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더니. 아주 재밌는 강의도 하셨다, 이거지?”
강혜원은 웃는 얼굴로 손에 든 책을 가리켰다.
“죄송한데, 이거 사진 좀 찍어도 돼요?”
“넵! 그럼요!”
허락도 떨어졌겠다, 강혜원은 실무서를 꼼꼼하게 찍었다.
생각보다 두꺼웠다.
표지를 가장 먼저 찍고 그다음으로는 목차를 찍었다.
중간중간 흥미로워 보이는 페이지를 펼쳐 읽기도 했다.
그러다 서문을 발견하고는 강혜원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흐음, 이런 걸 쓰셨다 이 말이지?”
강혜원은 냅다 단체 대화방을 열었다.
그리고 가볍게 준비운동 삼아 몇 장의 사진을 올렸다.
가장 먼저 폭탄의 미끼를 문 것은 방장인 장세훈이었다.
-장세훈 : 어? 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