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36화 (336/500)

336화. 한울의 정리 (4)

여성 의원이 말을 마치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당적과 성별, 나이, 경력이 매우 다양한 의원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듣다 보니까 뭔가 이상한데. 신재현이 국세청에 복귀했단 말입니까?”

소식이 느린 의원이었나 보다.

정치판에서 정보가 느린 사람은 도태되기 쉽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낀 의원들이 남자를 무시했다.

아무도 사정을 설명해주지 않자 남자는 답답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국세청에 복귀했다면 대형사건 아닙니까! 이럴 때가 아니죠! 모두에게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에요?”

남자의 주장은 타당했다.

그의 판단으로 신재현은 조금이라도 싹수가 어릴 때 잘라내야 하는 놈이었다.

이미 지금도 시기를 놓치긴 했지만 그나마 기회였다.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혀져 가고 국세청 내에서도 한직으로 좌천된 지금이 확실하게 누르기엔 적기라는 것이다.

“제주도로 갔다기에 괜히 건드리면 긁어 부스럼 될까 봐 놔둔 건데, 이렇게 되면 국세청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밟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돌아와서 자리를 잡으면 그때는 늦어요!”

남자는 절절하게 외쳤다.

내용만 아니었으면 어디 유세라도 하는 것 아닐까 싶은 호소력이었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그의 말은 꽤 달변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왜 다들 그런 얼굴로 계십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당적 상관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세무서에 있을 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간과했고 그렇게 때를 놓친 겁니다!”

신재현이 서울청에 온 후에도 기회는 있었다.

다만 이들은 가볍게 생각했다.

이미지가 괜찮으니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지지율 반등을 노려보겠다는 속셈과 그를 이용해 국세청에 손을 뻗쳐보겠다는 흑심이 가득했다.

신재현이라는 이름 석 자도 모르고 그냥 ‘요즘 뜨고 있다는 7급 공무원’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치권에서 이름이 좀 통하려면 적어도 국세청장이나 검찰총장 정도는 되어야 했다.

7급짜리 공무원을 얕본 것은 그들의 실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장관 모가지가 날아가고, 제1야당 실세의 오른팔이 날아가고.

그때가 되어서야 이들은 급히 모여 회의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가뜩이나 선거철을 앞두고 있는데 과하게 대응하다가 역풍이 부는 것은 두려웠다.

그래서 의원들이 간신히 해낸 것이 바로 신재현의 좌천이다.

무려 공무원 하나를 제주도로 날려 보내기 위해 당을 초월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너무 쪽팔려서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낼 일이다.

더 웃긴 것은 그렇게 애써서 좌천된 놈이 겨우 4달 만에 복귀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서울청이 아니라 국세청 본청으로.

“이건 국세청에서 우리를 무시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렇게 잘 알아듣게 얘기를 했는데! 지금 선거철이라 우리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얕보고 있는 겁니다!”

남자가 구구절절하게 호소했지만 단 한 명의 노호성에 막히고 말았다.

처음 얘기를 꺼냈던 여자였다.

“좀 조용히 하세요!”

“뭐, 뭐요?”

면박을 들은 남자가 얼굴을 붉혔지만 그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흩어져서 편한 자리에 앉아 있던 의원들이 그에게 눈치를 줬다.

닥치고 앉으라는 험악한 소리도 들려왔다.

여자가 삿대질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의원님이 정보가 느린 걸 갖고 뒷북치지 좀 마세요. 시간 아깝게!”

“아니,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합니까!”

“서로 의견을 나눠야 하는 소중한 시간을 의원님의 정보 부족으로 허비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의원님, 자꾸 이러실 거면 그냥 여기서 나가세요. 우리끼리 얘기 좀 하게.”

이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정보를 얻고 서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모임인데 여기서 쫓겨나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이 정보가 늦은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남자는 엉거주춤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귀한 시간 내셨는데 이대로 가면 어느 한 분이 계속 질문을 하실 것 같아서 아주 간단히 지금 상황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의원님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자가 딱 한 명을 콕 짚어서 구박하듯 말했지만 남자는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여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신재현은 정식으로 어디에 소속된 게 아닙니다. 현재는 필요한 곳으로 지원 나가는 형태죠. 한마디로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얍삽한 구조란 말입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6급 승진시험을 아예 마쳤다고 해요. 신재현이 돌아오는 건 기정사실이고 아마 근무지도 청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서울청이냐 국세청이냐의 문제죠.”

의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단 지켜봤는데 하필 한울으로 나가는 조사팀에 신재현이 껴 있었단 말입니다. 한울도 때려 맞나 했는데 이번에 겨우 40억으로 끝났어요. 그래서 지금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겁니다. 거기 의원님, 이해하셨습니까?”

“끄응. 거,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사람이 바쁘게 살다 보면 좀 모를 수도 있지.”

남자가 툴툴거렸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왕 나선 김에 이 자리를 장악하려는 것처럼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이었다.

“한울을 가볍게 때렸잖아요. 물론 40억이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만 신재현의 명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그런 의미에서 국세청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재현을 제주도에서 썩게 두기에는 아깝다, 올려보냈지만 잘 알아듣게 타일렀으니 앞으로 신재현이 날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잘 관리하겠다. 이런 메시지 말입니다.”

이제 진짜 토론의 시작이었다.

여자의 말에 의원들이 생각에 잠겼다가 하나둘 입을 열었다.

“한울과는 인척 관계입니다. 한울만 봐준 것 아닙니까?”

“정 의원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친형인 신우현을 가차 없이 쳐낸 것 보셨잖습니까. 재벌 집 사위로 들어간 형이 지금은 이혼소송에서 위자료까지 물어주게 생겼습니다. 거기에 감옥행 확정이고요. 친형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는데요? 한울이 가까우면 얼마나 가깝겠습니까. 사촌 누나가 한울의 막내며느리인데, 정작 그 한울의 막내아들은 한울의 지분도 얼마 없어요. 그냥 내놓은 자식입니다. 신재현이 한울을 봐줄 필요가 있습니까?”

잠시 침음하던 의원이 다시 의견을 냈다.

“그럼 왜 벌써 신재현을 불러올린 겁니까? 이해가 안 가잖아요. 겨우 반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무시한 처사나 다름없어요. 우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질문에는 여자도 답변이 궁했다.

그녀는 비록 지금 신재현을 옹호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 자리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왜 지금 신재현을 복귀시켰는가.

신재현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는 알겠는데요.”

여유로운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가운데 어느샌가 방 안에 들어와 있는 한 명의 남자가 보였다.

전직 국세청장 정상훈이었다.

이 모임의 정식 멤버도 아닌 사람인지라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저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저라고 오고 싶어서 왔나요? 부르셔서 왔죠.”

“대체 누가…….”

정상훈은 국세청장 은퇴 후 정치판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꽤 높았다.

이번 총선에서 여유롭게 지역구 당선될 거라고 점쳐지는 신예다.

그러나 국회의원 사이에서는 운 좋은 놈이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전직 국세청장이라서 지지율 쪽쪽 빨아먹은 주제에…….’

‘우리 당에 오라니까!’

‘저 지지율도 다 신재현 덕분 아닌가? 국세청이 인기 많아지니까 덩달아 저놈도 편승해서…….’

‘그러니까 우리 당에 오면 되잖아!’

‘사람이야 어쨌든 간에 지지율은 탐나는데.’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앉아 있던 한 의원이 반갑게 맞았다.

내내 조용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희끗한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어서 오세요. 제가 불렀습니다.”

“오 의원님이요? 아니 사전에 얘기도 없이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 됩니까?”

정보가 느린 의원이 불편한 얼굴을 했지만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뭐 어떻습니까. 다들 이분하고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것 다 알고 있는데요.”

정상훈을 부른 희끗한 머리의 여자, 오 의원이 손을 펼쳐 주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다른 의원들은 먹이를 바라보는 매의 눈빛으로 정상훈을 보고 있었다.

멤버가 아닌 사람이 불시에 방문해 느낀 불쾌감은 기회라는 생각에 금방 묻혀 사라졌다.

의원들이 앞다투어 자리를 안내했다.

“잘 오셨습니다, 정 청장님. 이쪽으로 오세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상훈이 안내받은 곳은 비교적 안쪽의 자리였다.

1인용 소파에 앉자 육중한 풍채의 남자가 물었다.

“벌써 신재현을 불러올린 이유가 뭡니까? 같은 식구였으니 청장님 말씀이라면 저희 의견보다 정확할 것 같군요.”

“글쎄요. 같은 식구라서 안다기보다…… 여기 계신 분들도 몇 분은 짐작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허허, 시험하지 말고 말씀해주시죠.”

정상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야 지금이 아니면 불러올릴 기회가 없으니까요.”

“으음.”

이 짧은 말 한마디로 이해한 사람도 있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정상훈은 좀 더 풀어서 설명했다.

“지금은 신재현이 복귀한 걸 알아도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럽잖습니까. 총선이 지나면 복귀가 가능하겠습니까? 의원님들이 갖은 수단으로 압박 주실 텐데.”

웃는 투로 말했지만 가시가 돋쳐있는 말이었다.

그도 국세청장으로 있을 적에 국회의원들의 압박을 받아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의원들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거나 아예 모르는 척 뻔뻔하게 굴었다.

“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열정적인 의원님들은 의문을 표하실 수도 있죠. 그 과정에서 청장님이 고생하실 걸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풍채 좋은 국회의원 하나가 배려하는 척을 했다.

정상훈은 이제껏 열심히 웃는 낯을 연습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세청장으로 있던 시절의 그였다면 당장 침을 뱉고 자리를 박찼을 것이다.

“그럼 저도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청장님, 신재현이 이번 한울 조사를 가볍게 하고 넘어간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제 생각에는 국세청의 메시지 같은데요.”

당초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던 여자 의원이 끼어들었다.

주목은 빼앗겼지만 눈도장은 찍어야겠다는 속셈이 보였다.

그리고 정상훈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이것이 일전에 민치호가 말했던 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류가 올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탈 거예요.

민치호의 예언과도 같은 말에 등골이 쭈뼛했다.

정상훈은 애써 웃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 청장 그 친구가 약삭빠른 잔꾀를 잘 내죠. 일부러 제주도에 좌천 보냈던 공무원을 데려와 보낸 것이 바로 대기업 조사라면 그건 그냥 한 일이 아닐 겁니다.”

정상훈은 민치호 대신 현직 청장인 오낙현을 들먹였다.

민치호와 신재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민치호는 차기 청장으로 낙점될 만큼 이미 국세청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긴 하지만 승냥이 떼 같은 의원들의 눈에 띄기에는 일렀다.

‘그 자리가 쉬운 자리가 아니야. 소나기는 수시로 맞아줘야 하는 자리라고. 그러니까 원망하지 마라, 오낙현.’

더불어서 민치호 덕에 쉽게 청장 자리에 오른 오낙현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신재현이 사방팔방 적을 만들고 다니는 건 솔직히 국세청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꽉 눌러놨다는 판단하에 여러분께 보여주려고 한 걸 수도 있죠.”

정상훈은 일부러 ‘~걸 수도 있죠’라며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

당연히 나중에 추궁받으면 도망칠 구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의원들이 저마다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걸 정말 화해의 증거라고 봐도 될까요?”

“하긴, 제까짓 게 날아봤자 공무원인데 어쩌겠습니까. 적당히 편안하게 공무원 생활하고 싶으면 알아서 기어야죠.”

이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때가 늦든 빠르든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신재현이 그대로인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금방 ‘그럴 줄 알았다’라는 안도로 바뀌었다.

조금 머리가 있는 사람은 ‘혹시’ 하는 생각도 했지만 여기서 말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다른 당적의 의원들도 함께 있는 곳이다.

언제나 3할의 본심은 숨겨야 했다.

“건드리기 조금 부담스러운 시기이긴 합니다. 저쪽에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거라면 조금 두고 볼까요?”

“어차피 총선 지나면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정 안 되면 정부를 압박해서라도 수를 써 봐야죠.”

신재현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해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의 총선 때문에 손대기 힘들 뿐.

그렇게 여의도의 살아 있는 권력들은 또 한 번 싹을 밟을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재밌네. 진짜로.’

코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정상훈은 진심을 담아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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