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35화 (335/500)

335화. 한울의 정리 (3)

머릿속이 회오리쳤다.

주변의 자동차가 다니는 소음이 유독 귀에 크게 들려왔다.

수화기는 바로 내 귀에 대고 있는데도 혜진 누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혜진 누나의 수다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한울에 들어간 바로 그날 한대희가 사무실로 구경 온 것.

-그 자리에서 잘 차려진 밥상과도 같은 정보를 선물로 준 것.

-그러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

-한울의 지분조차 없으면서 한울에 출근해 우리 사무실을 지나가며 눈도장을 찍은 것.

-우리가 회계팀과 질문답변을 할 때 그 자리에 앉아 구경한 것.

그때마다 한대희의 행동이 너무나도 이상해서 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는데 누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두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팬이니까 보러왔고, 내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정보를 줬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 밑에 깔린 것은 순수한 호의일 뿐이었으니까.

일부러 한울에 드나들면서 조건이랍시고 회의실에 합석한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팬이라면 나에 대해 여러 소문을 들었을 테고, 어째서 그런 별명들이 생겼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질 만도 했다.

그렇게 열망 어린 눈동자로 보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엉켜 있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은 굉장히 좋아한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니까.

지금 그 대상이 매형과 나만 아니었다면 더 상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듣고 있니? 재현아?

“응. 누나.”

-에이, 뭐야. 그렇게 충격적인가? 그럼 직접 만나서 얘기할걸! 재밌는 구경 놓쳤네!

놀리기 좋아하는 누나가 잔뜩 아쉬워했다.

이 인간이?

“매형이 날 처음 본 게 누나 결혼식 때 아냐? 그때도 제대로 못 봤을 텐데 팬이 됐대? 아니, 대체 언제부터 팬이었대?”

-우리 결혼식 직후였을걸? 그리고 팬 되는데 누가 직접 만나고 결정하냐? 너는 아이돌 좋아할 때 만나보고 좋아해? 그냥 TV 봐서 팍 꽂히는 거지.

나는 아이돌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예시는 이해가 갔다.

“기사나 뉴스 같은 걸 봤나 보다. 그래도 계기는 있지 않아?”

-어머, 너는 네가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 아니지, 얘한테는 그런 게 일상인가?

누나가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하길래 내가 재촉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결혼식에 뭐가 있었…… 아, 그날 형 새끼랑 싸웠구나. 미안해. 누나한테 중요한 날이었는데.

신우현과 결혼식장에서 딱 마주쳐서 목소리를 높이고 싸운 기억이 났다.

누나에게 평생 한 번 있는 결혼식에 형제 싸움을 한 거나 다름없어서 나중에 고개 숙이고 사과했지만, 지금도 그날 생각만 하면 죄책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거는 신경 쓰지 마. 신우현 그 새끼 하객으로 받고 싶지도 않았어. 결혼식장에서 보였으면 버진 로드에서 뛰어나가서 발로 찼을걸?

“어, 그래.”

누나라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럼 뭐지? 결혼식 날 있었던 빅 이벤트는 정말 그것밖에 없는데.

-기억 안 나? 그날 경제수석이 와서 우리 주례 서 줬잖아.

“임현승 수석님? 맞아, 그랬지.”

-나는 잘 몰랐는데 결혼식 때 사회나 주례를 누가 서느냐에 따라서 그쪽 집안의 격을 알리는 게 되나 봐. 근데 차기 경제수석을 부른 게 재벌 쪽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가정인 우리 쪽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 엄청 난리가 났었거든.

“주례는 보통 조금만 면식 있어도 서주지 않아? 연예인들 별로 안 친한데 사회 보고 그러는 경우도 많던데.”

-얘는 왜 머리도 잘 돌아가면서 이런 데서는 맹할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가 결혼식을 다녀봤어야 알지!”

-그럼 나는 뭐 많이 다녔겠냐? 잘 들어. 너는 그냥 우리 집 꿀리지 말라고 수석님이나 되는 분을 모셔왔는지 모르겠는데, 원래는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보통은 그냥 화환이나 축하 멘트 하나만 띡 보내고 끝이라고. 사회자가 ‘경제수석님의 축하 말씀 있으셨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도 그 집안은 선망의 눈길을 받는단 말이야.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임현승은 분명히 이런 경우가 꽤 있다고 했었다.

정치인도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종종 주례도 다니고 자문도 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길래 나도 그다지 부담 갖지 않았는데.

누나의 말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치인들은 이미지가 생명이라 그렇게 함부로 안 다닌대. 그런데도 왔다는 건 누군가를 꼭 얻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그게 바로 너고. 그래서 한울에서는 바로 전략실 가동해서 너에 대해 조사했어.

“응? 나에 대해서? 내가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들 많이 쥐어패긴 했는데 그렇다고 대기업에서 주목할 정도야?”

-네가 한 일들, 그리고 너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면 말도 안 되긴 하지. 그래서 우리 대희 씨도 관심 가지기 시작한 거지. 근데 쨔잔! 네가 앞뒤 없는 미친놈인 걸 알게 된 거지! 그때부터 빠졌대.

“거 참 동생한테 표현이 너무한 거 아니야? 앞뒤 없는 미친놈이라니.”

-그래서? 틀린 말 했냐?

“아니…….”

진짜 누나한테는 이겨 먹을 수가 없다.

“그래…… 매형도 참 특이한 사람이네. 평소에 배우들도 많이 보면서 왜 하필 나한테 그래?”

허구한 날 보는 게 배우와 가수일 테고, 본업이 소속사 사장이니 업계에서 일하다 보면 아이돌도 많이 만날 텐데.

왜 하필 나일까?

그러나 누나의 냉정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너니까 팬질 해도 봐주는 거지. 만약에 아이돌한테 빠졌으면 남편이고 뭐고 없는 거야. 알아?

그랬다.

매형은 유부남이었지.

지나가는 여자에게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품절남 말이다.

누나의 저 성격에 재벌 집 아들이고 뭐고, 다른 여자한테 빠졌다가 걸리면 뼈가 부러지고도 남는다.

“매형도 불쌍하네.”

-뭐얏!

누나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매형이 팬이라…… 부담스럽네.”

-고작 그게 부담스러워? 대희 씨가 신문에 광고도 낸 걸 알면 아예 까무러치겠네.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무, 무슨 광고?”

-3대 신문사에 뜬 광고 있잖아. 문구가 뭐였더라? 어딜 가든 열심히 일하는 신재현을 응원합니다. 이거였던 것 같은데.

맙소사.

아까 매형이 팬카페 회장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와 동급의 충격이다.

“그 광고도 매형이 낸 거였다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끝이 갈라졌다.

-어. 대희 씨가 돈이 좀 많아. 너한테 피해 주기 싫다고 혼자서 일시불로 긁었어. 어휴, 진짜 멋있지 않냐?

이 와중에도 남편 자랑을 하는 걸 보니 누나답긴 한데,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팬카페 회장이 광고를 넣는 건 이상하지 않다.

워낙에 돈도 많은 사람이고.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내가 쪽팔리다고오!”

-우리 남편이 해줬는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아, 쪽팔려! 전국구로 이름 다 팔렸잖아!”

-너는 원래 이름 팔린 놈이야! 뭐가 쪽팔려! 그냥 받아들여! 그것도 선물이야!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 누나는 그런 거 받으면 좋아?”

-당연히 좋은데?

아차. 누나는 배우였지.

잠시 할 말이 없어진 내가 입을 꾹 다무는 동안 누나는 신나게 나를 놀렸다.

여기서 반응하면 더 좋아할 게 분명하다.

내가 애써 꾹 눌러 참고 버티자 재미가 시들해진 누나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한마디를 안 하네. 그래 됐다. 나중에 만나면 두고 보자.

나중에 만나면?

나도 그땐 가만 안 있지.

입을 막아서라도 말을 못 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누나가 막 생각난 것처럼 아! 하고 소리를 쳤다.

-근데 너 이거 누구 전화야? 사무실이야? 전화해도 돼? 아버님은 이왕이면 너랑 전화나 문자도 하지 말랬는데.

“참 늦게도 물어본다. 걱정 마, 공중전화니까.”

-전화해도 되냐고 물어본 입장에서 이런 말 이상한 거 아는데, 공중전화까지는 좀 오버하는 거 아니야? 무슨 첩보 영화 찍니?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나중에 한울이랑 나랑 뒤에서 뭐 있는 거 아니냐고 공격 들어올까 봐 그래. 내가 봐도 웃기는데 어쩔 수가 없어.”

-미친. 그런 일이 있긴 있어?

나도 이런 거 신경 쓰는 거 무지 귀찮다.

근데 나는 손경진이 중부청장이던 시절 그런 공격을 받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직접 봤다.

여의도가 작정하고 물어뜯으면 어떻게 되는지, 언론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얼마나 사소한 것까지 끄집어내는지.

실제로 공격을 당했던 손경진은 다운계약서도 쓰고 위장전입도 한 주제에 국세청장 자리를 노린 파렴치한 인간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야. 20년 전에 있었던 일까지 다 끄집어내는데?”

-기자들이 좀 극성이긴 하지. 너 삼성 세무서에 있을 때는 하루 이틀 만에 너네 집 얘기까지 다 까발려졌더라.

“그래. 그니까 조심해야 돼.”

잠시 생각하던 누나가 문득 물었다.

-근데 그렇게 검증하는 거는 청문회에서나 하는 거 아냐? 너 청장 될 거야?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주위에서 끌어올려 주고 밀어주며 더 올라가라고 부추기고야 있지만 실제로 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정말 청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청장이 되고 싶은 걸까?

때아닌 진로 고민이었다.

“글쎄. 지금은 길이 잘 안 보이긴 하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생각은 있나 보네. 그래서 미리 준비하는 거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는 거야. 굳이 청장이 아니더라도 올라가는 데까지는 올라갈 거니까.”

-그래? 그러면 대희 씨한테도 조심하라고 할게. 네가 쭉 올라갈 거라고 하면 대희 씨도 좋아할걸.

“아, 매형한테 선물 고마웠다고 전해줘. 그리고 한울에 감탄했다고.”

-무슨 뜻이야?

“그렇게만 말하면 알 거야.”

내가 보답해줄 것은 감사 인사뿐이다.

그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어, 진짜? 내용은 모르겠지만 대희 씨 엄청 기뻐하겠는데?

“그럼 다행이고.”

누나의 목소리가 꽤 맑은 걸 보니 내가 잘 말한 듯싶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신문 광고 같은 건 좀 자제해줬으면.

***

[국세청, 한울 세무조사]

-세종시 국세청의 자산과세국 조사팀이 한울의 세무조사를 무사히 끝마쳤다는 소식입니다. 조사팀에는 신재현 조사관이 합류해 있었으며 많은 이들의 우려와 관심 속에 한울에서는 계열사를 다 합쳐 총 40억의 세금이 부과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이는 작년 지산의 조사에 비하면 극히 적은 금액으로 일각에서는 국세청이 지산에 이어 한울까지 건드리기에는 부담을 느낀 것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 국회의원이 신문을 접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주위에 앉아 있던 다른 의원들도 비슷했다.

각자 무언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편안히 소파를 하나씩 골라잡고 앉아 편안히 몸을 기대고 있는 이들은 당적이 제각기 달랐다.

회의장에서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기 일쑤지만 국민들이 보지 못하는 이런 곳에서는 서로 선배, 의원님 하며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치는 어차피 보여주기다.

친구와 적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정치판에서는 단순히 당적만 가지고 척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의원님들 이 기사 어떻게 보십니까?”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의원이 조심스럽게 신문을 들어 보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의원들 중에서 50대의 여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신재현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아닐까요?”

여성 의원은 시선이 몰리자 자신의 의견을 이어나갔다.

“한울에 최소한 200억은 때릴 줄 알았습니다. 지산을 생각하면 40억은 어림도 없는 금액이죠. 우리는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의 타격을 예상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40억이라뇨. 그것도 약 40개의 계열사를 다 합친 과세금액입니다. 이렇게 가볍게 지나가다니요. 신재현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신재현이 국세청 사람들과 회식으로 감자탕을 먹고 있는 동안, 의원회관 지하에서는 정치인들의 진지한 토론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제는 신재현.

여의도 모든 정치인들이 1순위로 꼽는 요주의 인물에 대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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