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34화 (334/500)

334화. 한울의 정리 (2)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두 분도 회식 참가하실 거죠?”

우리는 지금 세종시에 내려와 있었다.

아직 나와 황민우는 소속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였고, 한번 맡은 조사니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우리가 따라 내려가는 것에 이의를 갖지 않았다.

당연히 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임시 출입증도 발급받고 남는 책상도 받았다.

그렇게 팀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냈을 때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회식을 권했다.

큰 건을 끝냈으니 회식을 가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우리에게까지 권하는 것이 조금 의외일 뿐이었다.

그래도 몇 주 함께 지냈다고 팀원 취급은 해주는 건가?

처음엔 굉장히 차가운 눈빛이었는데.

그때와 비교해보면 몰라보게 따뜻한 반응들이다.

먼저 커피를 타서 갖고 오기도 하고,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하고.

한 지붕 식구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나도 기분이 좋다.

내가 그동안 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내부 결재도 다 떨어졌고 고지서도 나갔으니까 끝난 거잖아요. 그럼 당연히 회식 가셔야죠.”

내가 머뭇거리자 각자 자리를 정리하던 팀원들이 재촉의 눈빛을 보내왔다.

물론 나도 참석하고는 싶다.

시간도 오늘밖에 없다.

다들 알고 있듯이 나는 아직 정식 발령이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쪽 팀 일이 끝났기 때문에 당장 내일 다른 청에서 부름이 올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정식 발령은 본청으로 올 것 같긴 한데, 그 전에는 내가 원래 있던 곳이자 내가 모시는 분이 계시는 서울청으로 갈 확률도 높았다.

그러니 아쉽게도 이들과 함께 마음껏 저녁을 먹을 시간도 오늘뿐이라는 뜻이다.

“불러주신다면 저도 당연히 가야죠.”

“진짜죠? 그럼 얼른 정리하고 나가요. 오늘 같은 날은 일이십 분 빨리 퇴근한다고 팀장님도 뭐라고 안 하실 거예요.”

“아, 잠깐 통화할 데가 있어서요. 주소 알려주세요. 먼저 가 계시면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음? 그렇게 급한 통화예요? 나중에…… 아!”

그는 말하다 말고 뭔가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응? 대체 뭘 생각한 거지?

내가 어디에 전화할지 절대 상상하지 못할 텐데.

“주소는 문자로 찍어드릴게요. 천천히 통화하고 오세요! 중요한 일일 텐데.”

혹시 내가 민치호나 이선균 같은 다른 청의 상사와 통화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의 착각이었지만 딱히 해명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내버려 두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따 뵙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국세청을 나왔다.

챙길 짐도 별로 없었다.

올 때 들고 왔던 노트북과 필기구 몇이 전부였다.

그동안 얼굴 좀 익힌 입구의 경비원에게 인사도 하고, 1층 로비에서 임시 출입증도 반납했다.

데스크의 공무원이 깜짝 놀랐다.

“어? 아예 반납하시는 거예요?”

“네. 이쪽에서 있던 일이 다 끝났거든요.”

우리의 출입증을 받아든 공무원은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곧 보게 되겠네요. 정기 발령 때 저도 옮길지 여기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또 봬요.”

이 공무원은 나를 세종시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렇다.

누가 보면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본청으로 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꽤 마음이 급했다.

운전대를 잡은 황민우가 알아서 미리 봐둔 곳으로 향했다.

바로 공중전화였다.

세종시는 싹 개발해서 그런지 공중전화가 몇 없었다.

정부종합청사에는 하나 있긴 한데 건물 내에 있어서 내가 통화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정부청사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면 내 얼굴을 다 알 텐데, 오가며 누가 듣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건넜다.

6분 거리의 낡은 건물 앞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다녀오세요. 이 앞에 있겠습니다.”

“네. 금방 갔다 올게요.”

나는 공중전화를 향해 뛰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전화기 위에 동전을 잔뜩 쌓아놓고 번호를 눌렀다.

괜히 몰래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두근거렸다.

사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급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그동안은 야근하느라 매번 전화할 때를 놓쳤고, 바빠서 틈이 없었다.

이제 겨우 시간이 났는데 더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마음가짐으로 즐거운 회식은 불가능하지.

나는 내 궁금증을 풀어야겠다.

그렇게 지금 회식을 가다 말고 이 먼 공중전화까지 오게 된 것이다.

-네. 여보세요.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발생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가 남자였다.

분명히 여자여야 하는데?

“어, 혜진 누나 핸드폰 아니에요?”

-죄송한데 누구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처음에는 한대희인가 했는데 아무리 전화 너머라고 해도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한대희는 목소리가 더 굵다.

“방혜진 씨에게 전화했는데 남자분이 받으시네요? 혜진 누나 지금 어디 갔습니까?”

나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내가 전화했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아서 공중전화로 한 거였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내 이름을 말하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가 받았다는 게 수상하다.

혹시 누나가 핸드폰 잃어버렸나?

아니면 일하는 중이라 동료가 받았나?

-아이씨, 당신 누구예요? 사생팬? 기자? 좀 작작 하세요.

어처구니없는 오해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아차 했다.

아, 내가 핸드폰으로 연락했으면 이름이 떴을 텐데 공중전화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더욱이 혜진 누나는 배우인 데다가 현재 재벌 집 아들과 결혼한 상태니 더더욱 이상한 놈이 꼬일 수도 있겠다.

누나도 고생이 많네.

-당신 같은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 와요. 배우도 사람이거든요? 예? 이렇게 자꾸 전화하면 나도 가만 안 있습니다.

처음엔 조금 황당했는데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직장 동료인지 매니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혜진 누나를 위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약간의 동질감도 느껴졌다.

나도 간혹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 일이 꽤 잦다.

혹시 업무 전화일 수도 있어서 일단 받긴 하는데 ‘XX일보 기자입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끊는 일이 다반사다.

“푸흐흐흡. 크흐흡.”

억지로 웃음을 참아보았지만 잇새로 소리가 새어나갔나 보다.

전화를 끊으려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 이거 미친놈 아니야? 당신 뭐야! 내 말이 그렇게 웃겨?

나는 얼른 웃음기를 지웠다.

“아, 죄송합니다. 비웃으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요.”

-뭐? 이 자식이 그래도!

“잠시만요, 제가 누군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더 늦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쌍욕이 날아올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빨리했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혜진 누나의 사촌 동생인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혜진 누나의 어머니가 제 고모 되세요.”

-뭔 미친…… 응?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진짜 사촌 동생 신재현 맞습니다. 누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혹시 옆에 있어요?”

남자는 화를 가라앉혔지만 긴가민가한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진짜 신재현 씨라고요? 핸드폰으로 전화하시면 제가 의심할 일도 없을 텐데. 진짜 맞으시면 이 전화 끊고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와,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들어줄 수 없는 이야기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공중전화로 했어요.”

-아니, 이 사람 진짜 수상하네. 핸드폰으로 왜 못 해요? 당신 신재현 맞아?

“으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이야기로 증명할 수 있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목 왼쪽에 점이 있다던가 하는 건 누나의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거고.

특히 배우인 데다 재벌 아들과 결혼했다는 이슈 때문에 검색만 해도 고화질 사진이 꽤 나왔다.

그렇다고 누나의 깊은 비밀까지 알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며, 비밀을 안다고 해도 누군지 모를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끙끙 앓던 나는 결국 어릴 적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했다.

“제가 7살인가 8살 때 누나 생일 초를 불어버리는 바람에 누나한테 머리채를 잡힌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누나 정강이를 발로 찼어요. 고모네 집 마당에서 둘이 죽어라 쥐어뜯고 싸운 기억이 나네요. 누나한테 한번 확인해보시겠어요? 맞다고 하면 바꿔주셔도 되잖아요.”

-……잠시만요.

남자가 조용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아예 음소거를 누른 듯했다.

잠시 후 잡음이 섞이더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꺄하하하핫! 재현아! 너야?

“어, 누나. 나야.”

전화 너머에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아까 내 전화를 받은 그 사람인 것 같다.

누나 말로는 매니저라는데, 옆에서 연신 사과하고 있었다.

누나가 매니저를 말렸다.

-재현이는 신경 안 쓸 테니까 괜찮아요. 잠깐만 통화할 테니까 저 쉰다고 얘기 좀 전해줄래요?

다시 한번 남자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와 함께 누나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하하하! 근데 너 그거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내가 너 진짜 먼지 나게 두드려 팼는데!

“……너무 신나게 웃는 거 아니야? 그때는 누나가 더 컸으니까 그렇지.”

어릴 때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고 하던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나의 덩치가 더 큰 건 당연했다.

더욱이 누나는 평소에 학교에서 얼마나 말괄량이처럼 하고 다녔는지, 사람의 어딜 때려야 아픈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팔꿈치로 등을 찍어 누르는데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누나는 신나게 웃지만 나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내 생일 초인데 네가 불었잖아. 맞아도 싸지.

“그래서 다음 내 생일 때는 누나가 불었잖아.”

-그때는 네가 내 머리 잡았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럼 뭐해. 그때도 내가 졌는데.”

-맞아, 그랬지! 꺄하하하!

누나가 다시 낄낄대며 웃었다.

대체 매형은 누나의 뭐에 반한거지?

분명히 매력적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으니까 결혼까지 한 것일 텐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게 그건가? 콩깍지?

-그래서? 왜 전화했어? 너 요즘 일부러 전화 안 했잖아.

“미안해. 안부 전화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냐 아냐. 너는 기사에도 자주 나오는 공무원이고 나는 재벌 집 막내며느리인데. 연락이 잦으면 민폐가 될 수 있다고 시아버지도 언질 주시더라. 그래서 나도 일부러 연락 안 했어. 너 잘 지내는 건 기사로 봐서 알고 있었거든. 정 궁금하면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너네 집 어떤지 소식 들으면 되고. 우리 엄마는 가끔 외숙모랑 통화하는 것 같더라.

그동안 쌓인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지 누나는 수다를 떨어댔다.

중간에 끼어들어서 멈출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시간이 많은 건 아닌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가할 때 할걸 그랬나?

분명히 아까 매니저에게는 10분이면 된다고 한 것 같은데.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하는 찰나, 누나의 화제가 매형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대희 씨가 네 얘기 많이 하던데. 한울에 갔었다며?

“아, 얘기 들었겠구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왜? 대희 씨가 뭐 잘못했어? 탈세?

“아니. 탈세 아냐. 세금 문제가 아니고 그냥 매형이 좀 수상해서. 자꾸 이상한 눈으로 본단 말이야. 혹시 매형이 나에 대해 무슨 말 한 거 없어?”

열망이라고 하기에는 관심을 많이 가진 눈빛이었다.

혹시 내 뒷조사라도 했나?

아니면 학창시절의 흑역사라도 잡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누나는 오히려 숨넘어갈 듯 웃었다.

원래부터 잘 웃기도 하고, 웃는 얼굴이 예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웃으면 기분이 나쁘지.

“누나. 자꾸 그렇게 웃을 거야? 다음에 만나면 등 한 대만 때려도 돼?”

-미친놈아. 그랬다간 너 머리털 다 뽑히는 수가 있어.

“아, 죄송합니다.”

음, 머리카락은 소중하지.

이 누나는 한다면 한다.

나는 바로 말을 철회했다.

원하는 만큼 웃었는지 누나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희 씨가 네 팬이야.

“아…… 팬?”

팬이었구나.

인척 관계인 사람이 팬이라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그런데 누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냥 팬 아니야. 너 팬카페 있잖아? 무려 거기 회장이야. 팬카페 회장!

“……뭐? 무슨 회장?”

말도 안 된다.

나는 자리에 선 채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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