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33화 (333/500)

333화. 한울의 정리 (1)

한울의 중역 회의에는 침울함이 흘렀다.

정확히는 두 남자에게서 나오는 어두운 감정이 회의실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다.

회의에 참가한 중역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에 몸을 꿈틀거렸다.

초대 회장의 세 딸과 그 가족들 모두가 참가한 이 중요한 자리에서 분위기가 안 좋은 이유는 하나였다.

한우렬 회장의 장남과 차남에게 세무조사결과통지서가 온 것이다.

회장의 앞에는 이미 재무이사가 검토를 끝낸 통지서 2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국세청 본청에서 나온 세무조사팀이 돌아간 후, 이별 선물처럼 당도한 것이다.

“우리 회사를 전체적으로 훑고 갔는데 말입니다.”

회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저것은 꽤 화가 났다는 뜻이다.

기분을 10단계로 나누었을 때 3단계 정도?

참고로 최고로 기분 좋음이 10이라고 쳤을 때의 얘기다.

“이 두 결정문에 적힌 금액이 각각 15억 3천만 원이랑 21억 7천만 원이에요. 다른 계열사에 날아온 과세금액이 다 합쳐서 3억 8천만 원인데 말이죠.”

세무조사팀은 대체 언제 그렇게 일을 해놨는지 현장 조사에서 철수하자마자 순서대로 계열사마다 고지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각 계열사에서는 곧바로 재무이사에게 보고했다.

재무이사는 즉시 모든 고지서를 취합했다.

그 결과가 회장이 말한 그대로였다.

전 계열사 합쳐서 3억 8천만 원밖에 안 되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신재현의 악명 아닌 악명을 생각해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사팀이 거의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세금 적게 나와라, 기도하던 재무이사조차 조사팀의 실적이 걱정될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뒤이어 날아온 2부의 결정문을 본 순간 회장에게 보고할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한울 그룹의 다른 계열사들이 깔끔한 것이 오히려 악재가 되었다.

약 40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합쳐서 3억 8천만 원인데, 회사 단 하나에서 각각 15억과 21억이라니.

더더욱 두 아들의 행태가 도드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아버지, 저는…….”

“회장님.”

장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회장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부르게 했지만 평소에 실수로 ‘아버지’라고 하면 못 들은 척 넘어가곤 했었다.

이렇게 차갑게 잘라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회장님. 저희 회사의 규모가 얼마인지 아시잖습니까. 5년 치 부과된 세금이 15억 3천만 원이라는 것은 1년에 3억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이것은 꽤 낮은 금액…….”

“너, 뭐라고 했어?”

회장이 반말을 내뱉었다.

자제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표시였다.

조용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회장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임원들이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 자리에서든 눈치 없이 당당하게 굴던 철없는 막내아들도 지금은 얌전히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주눅 든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거나 껄렁한 자세로 앉아 히죽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회장님. 1년에 3억입니다. 다른 계열사가 과세액이 적어서 많아 보이는 것뿐입니다. 중소기업조차 세무조사를 받으면 3억은 우습게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회사가 충분히 선방했다는 증거이며 나름 깔끔하게 운영했다는…….”

“그 입 다물어라.”

장남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 말을 따랐다.

입을 꾹 다물었지만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차남도 마찬가지였다.

불호령 듣는 것이 싫어서 가만히 있긴 했지만 생각은 장남과 동일했다.

매출만 해도 몇백억 나오는 회사에서 세무조사 결과로 나온 금액이 겨우 21억이다.

대기업치고는 적게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장의 저런 반응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아들의 찝찝한 표정을 못 알아볼 회장이 아니다.

회장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회의실 안에 다른 임원들도 있는 것을 상기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함부로 소리를 지를 순 없다.

그런 지론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두 아들을 쥐어패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랬다간 장남을 따르는 임원들이 불쾌할 것이 뻔했다.

굳이 두 아들의 패가 아니더라도, 임원들이 뭘 잘못했다고 큰소리 듣는 꼴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어야 하는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결국 그것은 반발이 되어 돌아온다.

지산처럼 회장이 모든 권력을 쥐고 패왕처럼 군림하는 회사라면 몰라도 한울은 달랐다.

초대 회장의 세 딸에 의해서 경영이 나뉘어 있으므로, 한우렬 회장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회장은 귀찮지만 잔소리를 하는 것을 택했다.

“두 사장은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회장은 두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중역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다른 회사라면 그 정도 세금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죠. 그렇습니다, 많이 나온 금액도 아닙니다. 각 회사에서 충분히 일시불로 감당 가능한 금액이고요.”

방금 전까지 혼쭐을 낼 것처럼 하던 회장이 자신들의 의견에 동조하자 장남과 차남은 서서히 얼굴이 펴졌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이고, 자식인데 적당히 혼내고 용서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회의실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담했다.

이 안에서 회장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장남과 차남, 둘뿐이었다.

두 아들의 안심하는 표정을 본 막내 한대희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렸다.

그걸 또 어느새 봤는지 회장이 한대희에게 경고의 의미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한대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여기는 한울입니다. 한울은 깨끗해야 하고, 항상 깨끗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실수한 걸로 탓하진 않습니다. 우리 계열사에 세금이 나온 걸 갖고 제가 뭐라고 하진 않았잖습니까. 문제는 마인드입니다.”

회장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1년에 3억? 말은 바로 해야죠. 그래서 결국 지금 회사에서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15억과 21억입니다. 그뿐이 아니죠. 다른 계열사는 세금 내는 게 좋아서 힘들게 관리했겠습니까? 이는 다른 계열사의 사장들을 무시한 처사이자, 본인들이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자백입니다.”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대신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금 회장이 얼마나 자제심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까짓거 탈세 조금만 감수하면 경영하기도 편해지는 거 다들 압니다. 알고서 그 고생을 하는 거예요. 지금 두 사장은 단순히 방만한 경영을 한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한울의 임직원들을 쉽게 보고 한울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말투가 험악해지자 장남이 끼어들었다.

“회장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실수였을 뿐이고…….”

“한재희 사장. 지금은 둘은 질책하는 자리입니다. 낄 자리 안 낄 자리 구분 못 합니까?”

“……죄송합니다.”

장남은 끽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

다른 임원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두 사장이 한울의 미래를 보고 있는 이상 이 사태는 더 심각합니다. 지금도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한울을 맡았다간 얼마나 방만하게 굴지 상상도 못 하겠습니다.”

두 아들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회장에게 동조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회사, 예를 들어 지산이라면 회장의 두 아들에게 임원들이 힐난의 눈빛을 보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권력이 나뉘어 있는 구조인 한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임원들이 돌아서면 날고 기는 회장의 아들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밑밥을 깐 회장은 결심한 듯 말했다.

“과한 경쟁에 눈이 멀어 이런 사태가 된 것이라면 더더욱 나의 불찰입니다. 한재희 사장과 한명희 사장은 열기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둘은 당분간 부사장에게 경영을 맡기도록 하세요.”

“회장님!”

당장 두 아들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 경영에서 빠지라고 말씀하십니까! 회사가 위태롭다 느껴지면 외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최적의 조건만 갖춰지는 건 아니지요. 아예 사장 자리까지 빼앗기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 기회에 불리한 상황에서 헤쳐나가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하세요.”

한우렬 회장, 그러니까 2세대가 경쟁하며 서로 실력을 증명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두 아들은 한참 못 미더웠다.

경영권을 부사장에게 넘기고 회사를 흔들리지 않게 얼마나 잘 끌어갈 것인가.

그것 또한 회장의 시험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 아들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회장의 선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대희 사장.”

“예?”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그답지 않게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한대희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한대희 사장은 한울의 식구이긴 하지만 한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는 엄연히 따지면 한울의 그늘에 있는 것이 아니죠.”

한 엔터테인먼트는 한대희가 전액 자신의 돈을 부어 만든 회사였다.

100%의 지분을 한대희가 갖고 있었으며 경영, 투자 면에서도 한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한대희 사장도 놀고먹게 놔둘 순 없습니다. 감사로 임명할 테니 시간 될 때마다 출근하세요.”

“예에?”

이 말에는 한대희뿐 아니라 장남과 차남, 그리고 다른 임원들도 놀랐다.

특히 방계에 해당하는 초대 회장의 딸들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우렬 회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감사요?”

“네.”

“회사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혼자 일하는 거 아니잖습니까. 알아서 배워서도 못 합니까?”

이미 한울에는 3명의 감사가 있었으며 그에 딸린 감사실의 직원만 해도 여럿이었다.

한대희가 들어갈 여지도 없거니와 들어간다 해도 할 일도 없었다.

배우는 데만 한참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한대희에게 진짜로 감사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한대희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이제 와서?’

임원들과 방계의 식구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형들의 집안싸움에 진저리 내고 집을 뛰쳐나간 막내의 이야기는 한울에서는 유명하다.

지분조차 가장 적고 맡은 계열사조차 하나도 없었다.

두 형에게 좋은 감정이 없는 그가 감사 자리에 앉으면 둘을 돕기보다는 견제하기가 쉽다.

‘장남과 차남을 견제하기 위함인가?’

‘전체적으로 그룹 상황을 훑어보고 배우기 좋긴 한데, 너무 늦지 않았나? 장남과 차남을 따라가려면 한대희로는 힘들 텐데.’

‘한대희가 저 둘을 견제하게 하고 방계 쪽에서 올라오길 기다릴 생각인가?’

‘장남에게 총수 자리를 물려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방계 쪽에도 가능성이 있군.’

어찌 되었든 이것은 회장이 한대희에게 내어준 기회였다.

한대희 본인은 원하지 않았지만.

“저도 회사 있어요. 그거 하나 굴리는 것도 힘든데 제가 무슨 감사예요?”

무슨 대기업이라도 경영하는 것처럼 비싸게 굴자 회장이 벌컥 화를 냈다.

그러나 아까 장남에게 하던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화난 척만 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쬐끄만 회사 경영하는 게 뭐가 어려워? 그리고 회사에 신경 쓰는 것 치고는 요즘 한울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은데. 누가 보면 정직원인 줄 알겠어.”

회장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최근에 조사팀 눈도장 찍겠답시고 거의 매일 한울로 들락거리다가 회장에게 들켜서 등짝을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아버지! 진짜로 싫어요!”

공적인 자리였지만 회장은 굳이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구슬렸다.

“쯧. 팬이라는 놈이 이렇게나 몰라서야.”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팬이라는 언급을 했다는 것은 결국 신재현과 관련 있다는 뜻이었다.

한대희는 이것이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글쎄. 감사가 뭐 하는 직책인지를 생각해 봐라.”

감사라면 법인의 재산 상황과 이사의 업무를 감시하는 직책을 말했다.

경제, 경영뿐 아니라 회계와 세법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했다.

또한 감사가 요구하면 어느 부서든 재깍 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한마디로 한대희가 잘만 하면 언제든 회사를 들여다보며 부당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멋있어 보여.”

한대희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들은 임원들이 뒷목을 잡았지만 한대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한울이 깨끗한지 내가 직접 감시할 수도 있고, 나중에 혹시 내가 그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한대희는 씨익 웃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의 웃음이었다.

‘왠지 그분하고 좀 비슷해지는 것 같아. 좋아, 짜릿해.’

한대희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답했다.

“저도 좋습니다. 감사 일, 열심히 배워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법무팀은 바로 절차 밟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방계의 식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가장 손해를 본 회장의 두 아들은 죽상이었지만 그 외의 오너 가족은 모두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회장님이 판을 공평하게 깔아주시네. 선두주자를 손수 끌어내려 주시고.’

‘아니, 속으로는 자기 아들이 3대 회장이 되길 원할 거야. 이건 사실 다르게 보면 기회잖아. 실력을 입증할 기회.’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지. 정확히는 내 딸에게.’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오로지 이 안에서 한 사람만이 순수하게 기뻐했다.

‘우리 자기한테도 자랑해야지!’

부인에게 자랑할 생각으로 가득 찬 한대희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