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팬카페의 새로운 회원 (2)
“너무 일찍 도착했나…….”
재무이사실은 비어 있었다.
바로 옆 사무실이 회계팀이라 슬쩍 문을 열어보니 파티션으로 군데군데 나뉜 책상이 눈에 보였다.
“어느 부서에서 오신…… 아.”
문에서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젊은 직원이 일어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복도로 걸어 나왔다.
10명 정도 되는 우리 팀원들을 보자 직원이 질린 얼굴을 했다.
“약속 잡혀 있으신 건 들었는데요. 혹시 원래부터 열 분 오신다고 하셨었나요? 제가 전달받기로는 다섯 분 정도로 들었는데…….”
“아, 그렇게 됐습니다.”
팀장이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게, 직원의 말대로 재무이사에게 전달한 인원수는 5명이다.
사람 수가 많아봤자 어차피 질문하는 사람은 소수일 테고, 상대도 부담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장은 나를 포함해서 5명을 추렸는데 남은 공무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저도 좀 가고 싶은데요! 흔히 오지 않는 대기업 재무이사 대면 조사의 기회잖습니까. 보내주시면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저도요! 저번에 이정국 조사관님이 가셨으니까 이번엔 좀 빠지셔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맞습니다. 이정국 조사관님은 남아서 자료 정리 좀 도와주시고 젊은이를 위해 한자리 양보하시죠. 귀중한 경험 아닙니까.”
원래 국세청 본청쯤 되면 이렇게 열정적인가?
나는 감탄했다.
그리고 저번 조사 때 있었다는 이유로 표적이 된 이정국은 대놓고 어이없어했다.
“나이고 경력이고 저랑 다 비슷한 분들이시면서 무슨 양보를 하라는 겁니까? 지금 말이 안 되는 거 다들 아시죠?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가야 할 건 저죠. 조 나뉘어 있을 때 같이 정리한 게 저란 말입니다.”
“이정국 조사관님, 그건 아니죠. 필수로 따라가야 하는 거면 황민우 조사관님까지는 인정하겠어요. 근데 이 조사관님은 그냥 구경하러 가시는 거잖습니까.”
“아잇, 이 사람들이 진짜!”
자꾸만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간다.
누가 누구를 따라간다는 걸까.
제발, 나는 아니라고 해줘…….
나는 아옹다옹하는 공무원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사실 팬카페가 어쩌고 할 때부터 짐작은 했다.
정말 팬이라 가입한다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일개 공무원이 팬카페를 갖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살펴보려고 한 거겠지.
그건 장난이라 생각하는데 지금 이들이 서로 가겠다며 싸우는 건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아니면 그건가?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옆에서 두고 관찰하겠다 이건가?
그렇다고 해도 공사를 구분 못 하면 안 되지.
실력을 증명하는 거야 내게는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이정국은 내게 호의로 돌아선 것 같은데, 앞으로 나도 본청으로 가게 될 테니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그때 알아보면 될 걸 가지고.
팀장 쪽으로 시선은 돌리니 팀장은 더더욱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뒷목을 누르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팀장은 아주 깔끔하게 결정을 내렸다.
“다 함께 갑니다. 대신 처음에 호명되지 않은 5명은 짐꾼 역할입니다. 자료 넘겨주는 역할만 맡으세요. 아시겠습니까?”
“네!”
나 같으면 차라리 안 간다고 할 것 같은데, 다들 신나서 대답했다.
아니지, 내가 잘못 생각했다.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짐꾼이고 병풍이고 잡는 게 맞지.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이들이 다르게 보였다.
과연, 괜히 본청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다르구나.
나는 감탄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세무공무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진짜 선배다웠다.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상자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다른 공무원이 달려왔다.
처음 5명에 뽑히지 못한, ‘병풍’ 취급 당할 예정인 공무원 중 하나였다.
그는 내게서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이건 제가 가져갈 겁니다. 10명이 다 가니까 신 조사관님은 안 들어도 충분해요. 팀장님도 짐꾼 하라고 하셨고.”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가 상자를 낚아채 갔다.
그렇게 10명의 조사팀 전원이 우르르 몰려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회계팀 직원이 우리 머릿수를 세며 얼마나 황당한 심경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정말 죄송합니다만 일단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전재윤 재무이사님이 임원 회의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셨거든요.”
“알겠습니다. 편하게 다녀오세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빨리 온 것이기도 하고, 사람 수도 많아진 거라 회계팀에서 죄송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도 괜찮으니 천천히 갔다 오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직원은 등을 돌리자마자 투다다다 소리가 나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
정말 급해 보였다.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게 5명만 오면 되는 걸 왜 굳이 따라온다고 하셔 가지고!”
등 뒤에서 공무원들이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도 멋쩍은지 상자를 내려둔 채 말없이 기다렸다.
새삼 이렇게 보니 놀랄 만하다.
예고한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쳐들어왔으니 회사 털어버리려고 작정한 건가 싶기도 하겠지.
잠시 멍하니 기다리자 엘리베이터가 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또다시 직원이 슬리퍼 소리가 울리도록 뛰어왔다.
그녀는 숨을 헥헥거리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합석하고 싶으시다고 하네요. 괜찮으시면 10층 대회의실로 모셔도 될까요?”
팀장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되물었다.
“회장님이요?”
“네. 당신도 충분히 아는 것을 대답할 수 있으니 조사관님들께도 유용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 시선을 나눴다.
유용하다마다.
어떤 회사는 검찰에서 조사할 것 있다고 회장을 소환해도 모르쇠 하기 일쑤다.
아무리 일은 아랫사람이 한다고 해도, 중요한 사항은 회장이 보고받기 마련이다.
회장이 말한 것은 나중에 증거로 쓰일 수도 있으며 잘못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말실수가 나올 수도 있다.
‘직원이 했습니다’라며 발뺌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정말 회장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직원이 조금 풀어진 모습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런데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역시 조건이 있구나.
우리 일행 중 맨 앞에 선 팀장이 자세를 바로 했다.
협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직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한우렬 회장님의 막내 아드님이신 한대희 사장님께서 중역 회의에 참석차 오셨다가 아직 남아계시거든요. 합석해도 괜찮으실까요?”
“아, 막내 아드님이면 저번에 사무실에 오셨던 그…….”
“네. 맞습니다.”
팀장이 깊게 침음했다.
한대희 사장은 우리에게 정보라는 선물을 주고 갔다.
혹시 그 대가를 받고 싶다는 걸까?
팀장은 조금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께서 합석하시는데 한대희 사장님이라고 안 될 것은 없지요. 마침 여쭤볼 것도 있었고. 잘됐습니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회계팀 사무실에 들어갔다.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다른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 팀장이 스윽 내게 고개를 돌리며 눈짓했다.
우리는 이미 저번 주에 흡연실에서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잘 차려진 밥상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 염려 했던 일이 지금 생길지도 모른다.
그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곧 회계팀 사무실에서 처음 우릴 맞았던 직원이 나왔다.
노트북 하나와 필기구 등을 손에 든 채였다.
“회계팀도 금방 준비가 될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 수를 보아하니 저쪽도 10명은 되어 보인다.
꽤 각오를 다진 모습이었다.
그러게 5명만 왔어도 되는데.
팀장 바로 뒤에서 따라 걷고 있던 차에 불빛이 눈에 번뜩 스쳤다.
뭔가 하고 옆을 돌아봤더니 이정국이 걸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충고할 깜냥은 안 되지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중차대한 조사를 앞에 두고 뭘 하는 걸까?
혹시 뭔가 알아볼 게 있는 걸까?
남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저절로 시선이 갔다.
뭔가 게시글을 보고 있는 듯했다.
“조사관님, 뭐 하세요?”
내가 묻자 화들짝 놀란 이정국이 얼른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좀 활동하는 카페가 있는데 닉네임 바꾸고 있었어요.”
“닉네임이요?”
“네. 지금 심정을 담아서 ‘곧쳐들어감’으로 바꿔봤습니다.”
“……? 그 혹시 저희 조사 유출되거나 그런 건 아니죠?”
“그럼요. 이 사람들은 제가 누군지도 모를걸요.”
그건 그렇다.
본인이 나서서 밝히지 않는 이상 익명이니까.
그런데 뭔가가 걸렸다.
뭘까,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할까.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회장이 불러오라고 했다는 대회의실 앞이었다.
“회장님, 회계팀입니다. 조사관님들 모셔왔습니다.”
직원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회의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원형으로 둘러앉도록 되어 있는 기다란 테이블에는 각각 자리마다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상석에는 회장이, 그 옆에는 재무이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쯤 덩그러니 앉아 있는 한대희가 보였다.
매형이다.
그는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뭔가를 찾는 듯하더니 날 발견하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 매형…….
내가 어색하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처럼 웃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미치겠네.
아내도 있는 분이.
대체 매형이 왜 저러는지 나중에 혜진 누나에게 전화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라면 큰일이 아닌 이상 절대 만나지도, 전화도 안 하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나는 한대희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일부러 고개를 회장 쪽에 고정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틈에 섞여들었다.
사람들이 벽이 되어 주자 살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자리를 세팅하죠.”
재무이사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타원형 테이블의 한쪽에 주욱 앉았다.
병풍이나 하겠다던 직원들도 여기서는 거절하지 못하고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곧바로 회계팀이 들어왔다.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저쪽도 10명이었다.
회계팀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꽤 많이 빼 온 듯싶었다.
정작 한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장 끝에 가서 앉았다.
참견하지 않고 구경만 하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회계팀은 테이블의 반대쪽에 앉았기에 우리는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서론은 필요 없겠죠.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궁금한 건 다 물어보세요. 그래야 마음 편히 조사를 끝내실 수 있지 않습니까.”
상석에 앉은 회장의 말을 시작으로 재무이사가 한이 서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관님들께서 이렇게 작정하고 오실 줄 알았으면 저희도 자문 회계사를 부를 걸 그랬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래서 저희 팀만 왔는데 혹시 일부러 이러시는 건 아니죠? 저번에도 간단한 조사라고 하셨다가 일이 커졌잖습니까.”
우리는 정말 털어버리려고 온 게 아닌데도 상대편이 침울해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재무이사와 회계팀 직원들의 안색이 꽤 초췌했다.
잠 못 자고 야근하면 딱 저런 얼굴이 되는데.
“일부러 속인 건 아닙니다. 저희 직원들이 열정이 좀 넘쳐서 꼭 참석하고 싶다고 하지 뭡니까. 진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가볍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말씀 믿어도 될지 감이 안 잡힙니다만, 지금이라도 언질을 주시면 자문 회계사와 세무사를 부르겠습니다. 저희도 방어는 해야 하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재무이사는 경영,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던데 그러고도 지금 이 자리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팀장이 애써 그를 진정시켰다.
“장담하는데 길어봤자 2시간이면 끝날 겁니다.”
“2시간이요……?”
재무이사의 표정에 불안감이 스쳤다.
그래도 우리가 예상한 것은 2시간이 맞았다.
그룹 전체를 털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팀장이 가볍게 질문을 날렸다.
“일전에 신재현 조사관이 먼저 여쭤본 것이 몇 건 있을 겁니다. 그 상세한 조사가 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일단 당시에 가장 탈세 의심이 들었던 미혼부모 복지재단에 대해섭니다.”
재무이사가 미간을 구기더니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못 참겠다는 듯 옆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지시했다.
“안 되겠다. 이거 아무리 봐도 절대 가볍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가서 회계사님하고 세무사님 모셔오세요. 제가 촉이 좀 좋거든요.”
“넵!”
기다렸던 것처럼 직원이 반색하며 튀어 나갔다.
나도 모르게 말이 툭 흘렀다.
“진짜로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는 건인데…….”
작게 말한 것인데도 다 들렸나 보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 꽂혔다.
“신 조사관님이 그럴 말씀을 하시다니 땅을 치고 울고 싶습니다.”
재무이사가 체념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진짜로.
억울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