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조사가 늘어난다 (4)
재무이사도 평생 회계를 해 온 사람이다.
재무 분석과 관리가 주 업무였지만 그래도 세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았다.
눈앞에 계열사 명단을 들이댔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걸 지금 가져와?’
세무조사 한답시고 사무실 내준 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지분 조사만 한다며! 간단한 조사라며! 아니었잖아! 아니었잖아!!!’
당장 창문을 열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만약 회계팀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신재현의 멱살을 잡지 않는 재무이사의 평정심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크흠, 조사관님…… 혹시 전수조사…….”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섭다.
재무이사는 미처 문장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정말로 ‘네, 법인세 조사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오면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재무 분야의 최고 책임자로서 물어야 한다.
재무이사의 이가 타다닥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말로 한울 조사하시게요?”
하지 말라고 안 할 사람도 아니고, 외부에는 제발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다.
여기서 주가가 더 빠지면 경영권 방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재무이사의 머리가 복잡해질 때였다.
“어, 네. 아뇨?”
“……?”
“뭐라 설명해야 하지.”
신재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산처럼 조사하는 거 아니에요. 탈세가 보이면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은…… 아, 그냥 보여드릴게요.”
“보여줘요? 뭘? 대체 뭐를?”
지레 겁먹은 재무이사의 널따란 책상 위에 재무제표가 여럿 놓였다.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다.
각오한 재무이사의 귀에 신재현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 회사는 뭔가요?”
“아, 거기는 장애인 분들 보조기구와 부품을 만드는 곳입니다.”
“보니까 설립 시점부터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데 혹시…….”
가짜 납품 기록을 만들어서 비자금을 만드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재무이사는 신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펄떡 뛰었다.
“아닙니다! 이상한 건 하나도 없고요, 그건 제가 장담합니다! 회장님께서 장애인 분들 보조기구에서까지 이익을 낼 필요는 없다고 여기서는 원가 가격으로 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원가나 인건비가 뛰는데 판매가는 동결하거나 조금만 올리다 보니까 계속 적자가 나요.”
신재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회사는 페이퍼 컴퍼니로 의심받기가 딱 좋아서 더 캐물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쉽게 물러나자 재무이사가 더 놀란 표정을 했다.
“말로만 설명한 건데 그냥 넘어가세요?”
“네. 진짠지 아닌지 알겠거든요.”
재무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무제표만 보고 실제 거래인지 안다고?’
회계사들이 감사 때 괜히 공장으로 시찰 나가는 것이 아니다.
서류만으로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무이사는 금세 납득했다.
‘신재현이라면 그럴 수 있지! 비법이 있어도 조사 대상 회사 재무담당자에게 말해줄 리가 없지, 암!’
탈세액이 보이기 때문에 재무이사에게 확인만 받은 것이라는 걸 알 리가 없는 그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여기는 뭔가요? 지원금 명목으로 뭔가 많이 나가는데, 대충 보니까 인건비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아, 맹인안내견 훈련소입니다! 맹인안내견은 사람들하고 많이 접하고 공공장소도 많이 돌아다니고 해야 하는데 그걸 일반 가정에 위탁해서 진행하고 있거든요. 거의 자원봉사자 분들이긴 한데 비용까지 부담시킬 순 없어서 최소 경비는 지급해 드리거든요. 인건비도 약간 드리고.”
“아, 그거였구나. 알겠습니다.”
재무이사는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후로도 신재현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 기부금 영수증 발급 기록이 꽤 많던데요.”
“미혼모, 미혼부 복지재단입니다. 전국에 10개의 지사를 두고 있어서 규모가 꽤 됩니다. 저희 그룹 차원에서 다른 어느 곳보다 신경을 쓰고 있는 곳이지요.”
“그렇군요. 신경 많이 쓰신다고 했는데 재무는 누가 담당합니까?”
“혹시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긴장된 얼굴로 재무이사가 묻자 신재현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만 훑어본 거긴 한데, 여기는 조금 위험합니다. 지사 쪽에서 누군가 장난치는 것 같아요.”
“이런 찢어 죽일! 회장님께서 공들인 건데! 어딜 감히 미혼모, 미혼부 지원 단체에서 장난질을 쳐! 이건 사람도 아니지!”
재무이사가 펄펄 날뛰자 신재현이 그를 진정시켰다.
“한탕 해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단계 같습니다. 그룹에서 감시의 눈이 조금 헐거워졌나 보죠? 한 3년 전부터 이쪽 지사가 좀 수상한 결재 목록이 있었어요.”
신재현이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가 아차 했다.
서울청에서 팀원들이 챙겨주던 버릇이 나온 것이다.
이정국은 그가 뭘 원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는 황민우도 있었다.
황민우가 자료를 내려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자 신재현도 얼른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제가 찾을게요.”
“아뇨, 찾았습니다. 여기요.”
신재현이 분명 또 설명하다 자료를 요구할 걸 예상한 황민우는 이미 늘어놓은 서류들 위치를 다 외운 상태였다.
황민우가 챙겨 준 종이 다발을 손에 든 신재현이 다시 재무이사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 보시면 현금 수입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일련의 과정을 본 이정국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쳤다.
‘팀원 굴린다는 게 뭔지 알겠네. 근데 이건 팀원이 자진해서 오냐오냐해주는 건데? 팀이 좀 특이하구나.’
왜 서울청에서 팀을 굴리네 마네 하는 소문이 나왔는지 알 법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뜻은 아니었다는 것도.
지금 이정국이 본 것을 남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그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 팀원을 굴려요.
그 사이 신재현의 설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한탕 하기 전에 본사에서 알아채나 못 알아채나 시험하려고 조금씩 삥땅 치는 과정 아닌가 싶습니다.”
“맞는 것 같네요. 서류상이긴 하지만 어긋나는 게 조금 있어요. 감사합니다.”
재무이사도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가 가라앉았다기보다는 안으로 삭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재무이사가 입가를 푸들푸들 떨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고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더 굴욕적이다.
본사의 눈을 벗어난 놈이 있다는 것은 결국 재무이사의 책임으로도 귀결된다.
신재현은 쉬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여기 이 재단은 토지를 100평 소유 중인데 100평을 더 매입했더라구요. 거기에 건물도 새로 올렸던데. 뭔가요? 부동산 투기 법인 아니죠?”
이제 대놓고 물어봤지만 재무이사는 아까처럼 발끈하지 않았다.
신재현이 확실히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콕 집어서 물어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재무이사는 해명에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는 야생동물 보호센터 지원재단입니다. 수리부엉이, 삵, 수달 같은 멸종위기종들은 하루에도 몇 마리씩 다치거나 죽어서 발견됩니다. 그걸 치료해서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야생동물 보호센터는 수익 내는 구조가 없어서 지원금으로만 운영하거든요.”
여기만은 깨끗하다고 자부한다는 듯 재무이사는 힘주어 설명했다.
앞서 횡령과 탈세가 발견된 복지센터의 불명예를 만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저희 한울 쪽 지원재단에서 전국 곳곳의 보호센터에 지원금뿐만 아니라 보호소 부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충청도 지역 보호센터에 포유류 보호소 건물 올려준 거예요. 감사하러 직접 가 본 회계사가 사진을 찍어왔는데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재무이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신재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것은 옆에서 듣고 있던 황민우와 이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대기업은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기부를 많이 한다.
이 사회에서 벌었으니 일부라도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마인드는 선진국이라면 다들 갖고 있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순수한 뜻을 갖고 있지는 않다.
개중에는 비영리법인을 이용해 회장의 비자금을 만드는 대기업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는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재벌의 귀감이었다.
“와, 사회 환원을 열심히 하시네요. 규모가 꽤 큰데 괜찮은 겁니까?”
신재현이 칭찬하자 재무이사가 가슴을 쭉 폈다.
“회장님의 뜻입니다. 이미 다른 회사에서 엄청나게 벌어들이고 있으니 여기 이런 회사들에서는 수익 같은 거 생각 안 해도 된다고요.”
물론 재무이사의 말이 정말인지 모든 회사가 깨끗한지 검증은 해 봐야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한울은 역대급 대기업이라는 말이 된다.
‘탈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내가 본 곳 중에서는 가장 깨끗한데…….’
신재현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눈앞에 휘몰아치는 숫자들을 읽었다.
명단에 적힌 계열사 이름 위로 투명 필름이 겹쳐지듯 숫자가 지직거리며 돌아다녔다.
중간 중간 가려진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백 단위를 넘지 않았다.
“자랑스러울 만하네요. 진심입니다.”
“하하, 그렇죠? 자, 다 물어보십쇼. 혹시 이상한 점 있으면 바로 알려주세요. 알아야 고치니까요.”
신재현이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재무이사는 아예 자리를 옮겼다.
자료를 늘어놓은 테이블이었다.
“길어질 것 같은데 차라도 드시면서 하시죠. 뭐 드릴까요? 다즐링? 녹차는 우작이 있을 겁니다.”
“어…… 둘 다 뭔지 모르겠는데 추천하는 걸로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재무이사가 신나서 사무실을 나갔다.
넓은 사무실에 손님 셋이 덩그러니 남았다.
신재현은 제집처럼 편안하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민우는 흩트려 놓았던 종이를 정리했고 이정국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뭐야, 이놈 물건이었잖아!’
***
“간 지 한참 됐는데 안 오네요…….”
공무원들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슬슬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재무이사를 이렇게까지 오래 붙잡아 두다니, 뭔가 일이 생긴 건가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진짜로 법인세 조사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셋이서요?”
“아니, 그건 아니죠. 셋이서는 안 돼요. 그냥 지분 물어보러 간 거겠죠.”
정말로 신재현이 탈세 여부를 물으러 갔다는 것을 모르는 공무원들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이 들었다.
신재현 입장에서야 정말 ‘가볍게’의 수준이지만 말이다.
한참이 지나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 2조의 세 명이 돌아왔다.
신재현은 팔팔한데 나머지 둘은 꽤 지친 모습이었다.
“어, 왔어요? 담배 콜?”
“예, 가시죠.”
신재현이 들어오자마자 팀장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이제는 흡연실이 둘의 비밀 대화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은 1조의 공무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정국에게 달려들었다.
“어땠어요? 대체 뭐 한 거예요?”
이정국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우물거리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로 대답했다.
“법인세 조사요.”
공무원들이 손을 내저었다.
“예? 거짓말하지 마시고. 셋이서 무슨 법인세 조사예요. 아, 계열사 하나 뭐 이상한 게 보이셨나? 그거 물어보러 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법인세 조사한다는 거 알려져도 되나?”
공무원들의 짐작은 타당했다.
이정국도 만일 1조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실제로 자기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국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정국은 더없이 흥분한 말투로 터뜨리듯 말했다.
마치 어제저녁 마늘 치킨을 앞에 두고 짓던 그 표정 같았다.
“오늘 씨발 나는 신재현 팬카페 가입할 겁니다.”
“……예?”
이정국의 색다른 감탄사에 사무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